월터 힐톤 (1343-1396년)
“영성균형 바로 잡아”
봉사∙명상의 삶을 조화롭게 하는데 기여
겸손∙사랑에 기초한 실질적인 삶에 초점
터 힐톤은 리차드 롤과 노르위치 줄리안과 함께 영국 중세시대의 대표적인 신비주의자이다. 월터 힐톤(힐톤)은 이 셋중에 가장 신학적이다. 힐톤은 14세기 기독교 신자의 영성의 균형을 잡아준 인물이다. 힐톤은 영성을 추구하는 신자들이 항상 갈등을 겪는 봉사와 명상의 삶의 균형을 잡아서 세상에서 열심히 봉사하는 삶을 살면서도 깊은 명상의 삶을 살수 있는 실질적인 방법을 제시하였다. 힐톤은 신자의 영성은 광신적인 열성보다는 모든 것을 적당하게 조절하는 온건주의식의 가르침에서 참다운 영성을 찾았다.
힐톤이 영국의 어느 곳에서 태어났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그가 영국에서 태어난 것은 확실하다. 그는 켐브리지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였다. 그러나 그는 법관이 되는 길을 버리고 어거스틴 수도회에 입문하여 수도사가 되었다. 힐톤은 1375년에는 노팅햄셔에 있는 수도원의 수도원장이 되어서 수도사들을 가르치며 영성에 대한 책들을 저술하였다. 특히 그의 대표작인‘완전함에 오르는 사다리’ (Scale of Perfection)는 수도사들의 영성을 지도하는 지침서뿐만 아니라 평신도에게도 크게 사랑을 받았던 저서이다. 힐톤이 살았던 시대는 100년 전쟁, 1381년 평민의 반란, 롤라드 운동 등으로 영국 사회가 혼란하였으나 그는 비교적 평온한 삶을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힐톤의 영성신학은 어거스틴과 베르나르드의 영향을 받았다. 특히 그는 영성의 기본적인 요소에 있어서는 어거스틴의 영향을 받아 겸손과 사랑이 신자의 기본적인 두 개의 덕이라고 가르쳤다. 힐톤은 신자의 봉사하는 능동적 삶과 명상의 삶을 동시에 살 수 없다고 가르쳤던 리차드 롤을 따르지 않고 능동적 삶과 명상의 삶을 동시에 살수 있다는 어거스틴과 대그레고리의 견해를 따랐다.
능동∙명상∙혼합된 삶
힐톤은 신자에게는 세 종류의 삶이 있다고 가르친다. 이것들은 능동적 삶, 명상의 삶, 혼합된 삶이다. 능동적 삶은 일반적으로 외적인 사역이 삶의 거의 모든 부분을 차지하는 삶이다. 그러나 능동적 삶을 사는 신자도 어느 정도는 금욕의 삶을 살면서 자아를 억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힐톤은 가르친다. 능동적 삶은 신자로 하여금 자비와 선행의 삶을 살게 하면서 구원으로 이끈다고 그는 가르친다. 힐톤은 능동적 삶은 세상의 의무를 감당하기 위하여 필요하고 또한 가치가 있는 것이지만 명상의 삶보다는 열등하다고 가르친다. 두 번째 종류의 삶인 명상의 삶은 최고의명상의 단계에 들어가기 위하여 세상의 사역을 중단하고 명상에 모든 노력을 쏟아 넣는 삶을 말한다. 명상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독거할수도 있고 공동체 안에서 이런 삶을 살수도 있다고 힐톤은 가르친다. 그러나 외적으로 명상의 삶을 산다고해서 반드시 명상에 깊이 들어가는 것은 아니라고 그는 경고한다. 참 명상의 삶을 사는 신자에게 내려오는 은사는 크다고 힐톤은 가르친다. 먼저 능동적 삶에서 얻을수 있는 사랑의 은사가 그에게 내려온다. 두 번째로 그에게는 세상의 모든 일들을 포기할 때 주어지는 특별한 은사
가 주어진다. 세 번째로 그에게는 영광의 빛인 원광이 주어진다.
세 번째 단계의 삶인 혼합된 삶은 단순하지만 매우 중요한 삶이다. 이것은 명상의 삶을 누리기를 원하는 신자가 꼭 실질적인 사역을 감당해야만 할 때 살 수 있는 삶이다. 이 삶은 능동적 삶이 반이고 명상의 삶이 반인 삶이 아니다. 이 삶은 능동적 삶과 낮은단계의 명상의 삶이 연결되어져서 살아가는 삶이다. 이런 삶은 최고의 능동적 삶이라고 힐톤은 가르친다. 힐톤이 가르치는 혼합된 삶은 성경이 가르치는 마리아의 삶과 마르다의 삶을 신자의 삶에서 균형을 이루어 보고자 하는 노력이라고 볼수 있다. 힐톤은 영성신학의 전통을 따라서 신자의 영성의 단계를 정결, 계몽(조명), 연합의 세단계로 나눈다. 그리고 그는 명상을 세 종류로 나눈다. 아마 힐톤도 현대 목회자들과 같이 three-point 설교를 좋아했었던 것같다. 첫 번째 종류의 명상은 지식에 의한 명상이라고 힐톤은 가르친다. 두 번째 종류의 명상은 감성에 의한 명상이다. 그리고 세 번째 종류의 명상은 지식과 사랑에 의한 명상이다.
세 번째 종류의 명상에서 신자는 그의 영의 눈이 열리면서 그에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안다는 감정이 들어온다고 힐톤은 가르친다. 바로 이것이 신비로운 체험의 내용이라고 그는 말한다. 그는 이런 체험을 갖기 위하여 신자가 거쳐야 하는 명상의 과정을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당신의 생각을 예수에게 고정하라. 그리고 어떤 것이라도 이렇게 당신의 집중한 마음을 흩어놓지 못하게 하라. 당신이 배운 것을 기억하라. 당신은 아무 것도 아니다. 당신은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다. 세상물질을 잃어버리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예수님의 사랑말고는 아무 것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을 향한 여정을 지속하라. 명상의 훈련을 계속하라." 힐톤은 신자가 명상의 깊은 곳에 들어가면 그는 어두움 속에 들어가게 되고 바로 거기에서 예수님을 보게 된다고 가르친다. 그는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신자가 하나님의 사랑을 찾기 위해서는 어두움을 거쳐야 한다. 이것은 참 밤이다. 어두움이 세상의 모든 것과 모든 일들을 가리우는 것과 같이 예수님만을 생각하는 신자는 세상에 대한 모든 생각과 사랑을 저버린 어두움 속에 들어가게 된다. 신자는 여기서 그의 지성과 마음이 세상의 모든 것들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느낀다. 바로 이것이 신자가 어두움안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어두움은 빛나는 어두움이다. 이 어두움이 더 어두워 질수록 예수님은 더 가까이 있는 것이다. 만약 당신이 여기서 예수님을 볼 수 있을 것 같으면 주님을 영적으로 바라보라." 이렇게 힐톤은 신자가 세상의 사랑에서 완전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기 위해서는 어두운 밤을 거쳐야 한다고 가르친다.
또한 힐톤은 신자의 예수님의 사랑에 대한 열렬한 갈망은 이런 어두움을 만들어 낸다고 가르친다. 그는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이런 어두움이 고통을 가져오던지 평안을 가져오던지, 예수님은 이런 어두움 속에서 사랑이고 빛이다. 주님은 빛과 사랑을 보이지 않으시면서 영혼으로하여금 빛을 갈망하고 소원하는 번민을 하게 하시면서 영혼 속에 역사 하신다. 이런 상태를 밤과 어두움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영혼은 세상의 거짓 빛으로 부터 가리워져 있으면서 하나님의 사랑의 참빛을 아직 완전하게 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럴 때 어두움 속에 거하는 것을배워라. 당신이 어두움에 적응되어갈 때 평안을 찾고 참 빛을 보게 될 것이다." 힐톤의 하나님을 만나는 신비로운 체험을 빛과 어두움으로 나타낸 역설적인 표현은 역사적으로 많은 영성신학자들이 이런 신비한 체험을 빛이나 어두움으로 표현한 것을 종합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힐톤의 영성신학에서 창의적인 것은 없다. 그는 광신적이고 극적으로 치우치는 잘못된 영성을 피하고 실질적으로 삶의 균형을 이루는 영성을 이루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 그러므로 그가 추구하였던 영성은 실질적인 영성이라고 부를수 있다. 힐톤의 영성의 기본적인 요소를 겸손과 사랑에 둔 것은 다시 한번 상기할 만하다. 그러므로 그는 능력 위주의 영성보다는 성품 위주의 영성을 가르쳤다.
그러나 이것은 영성에서 능력이 제외된다는 것은 아니다. 이 의미는 참 영성은 반드시 겸손과 사랑을 나타내는 성품의 변화를 포함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배운 많은 영성신학자들이 성품 위주의 영성을 가르쳤다. 또 한 가지 우리가 힐톤의 영성신학을 통하여 배울수 있는 것은 우리의 신앙의 삶속에서 균형잡힌 마리아와 마르다의 삶을 이루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타고난 성품에 따라서 마리아나 마르다쪽으로 기울어진다. 필자 자신은 단연 마리아 쪽으로 기울어진다.
필자는 사람을 만나고, 도와주고, 봉사하는 것보다는 책보고 생각하고 명상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필자는 항상 사랑이 부족하다는 것에 갈등을 하고 있다. 아마 목회자들 중에는 마르다쪽으로 치우쳐서 갈등하는 분 들도 있을 것이다. 너무 사랑의 봉사에 치우쳐서 책보고 명상하고 기도하는 시간이 충분하지 못하여 갈등하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신자중에 마리아의 삶과 마르다의 삶의 완전한 균형을 이룬 무한한 복받은 신자들도 있을 수 있겠지마는 대부분의 신자들에게는 이것은 예수님이 다시 오실때까지는 해결될 수 없는 삶의 갈등일 것이다. 필자도 갈등속에서 균형을 이루어보고자 노력하겠지만, 한편으로는 교회 안에 마르다의 삶을 사는 신자들이 있다는 것에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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