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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들이 예수를 부정하는 스물여섯 가지 이유

Joyfule 2014. 10. 14. 09:00

 

 

 

 유대인들이 예수를 부정하는 스물여섯 가지 이유

 

13. 메시아 예언을 예수에 맞췄다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를 유대교 성경 구절과 기사들을 수집해서 새롭게 고안해낸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들은 기독교 성경기자와 편집자들이 유대교 성경과 예수 그리스도를 짜 맞추기 위해 다음과 같은 방식을 사용했다고 지적한다.


......첫째, 메시아 예언들을 조작, 예수에게 적용했다. “그를 나사렛인이라 칭하리라”는 마태복음의 구절은 유대교 성경에 기록된 메시아에 대한 구절을 왜곡한 것이다. 유대교 성경에는 ‘나사렛’이라는 동네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둘째, 비메시아 예언들이 메시아 예언으로 둔갑됐다. 셋째, 유대교 성경 구절이 기독교 성경 문맥으로 변화됐다. 넷째, 유대교 성경 구절들이 오역되었고 단어와 문구들이 조작되고 시제들이 바뀌었다. 다섯째, 예수에 대해 잘못 해석했거나 부적절하게 적용되었다. 예수가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함으로써 스가랴서의 예언 중 한 가지가 성취됐다지만 분명한 것은 수많은 다른 사람들 또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했다는 점이다.


예수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났다는 것은 이사야서 7장 14절에 대한 대표적인 오역 사례이다. 성경에는 그 같은 메시아 예언이 없다. 기독교 성경의 번역자들이 히브리어 단어 ‘알마’(alma)가 ‘젊은 여인’을 뜻함에도 불구하고 ‘동정녀’로 오역한 것이다. 설사 이 단어가 동정녀를 뜻한다 해도 여전히 기독론을 뒷받침하지 못한다. 언어학적으로 잉태시에 그녀가 동정녀였음을 뜻하지 않으며 ‘아이를 낳은 처녀’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 구절은 단순히 그녀가 (결혼하여) 통상적으로 아이를 가진 처녀(실제로 그 시대의 모든 유대 여인들처럼)였음을 의미한다.


이사야서 7장의 문맥은 유다 왕 아하스가 남왕국(유다)의 위협 결과에 대해 이사야에게 예언을 구하는 것이다. 북왕국(이스라엘)은 멸망했고 아하스 왕은 그의 왕국도 다메섹과 사마리아 왕들에 의해 같은 운명을 맞이할 것을 두려워했었다.


이사야서는 이사야와 왕이 알고 있는 ‘한 여인’이 아닌 ‘그 젊은 여인’의 해산이 임박했음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이사야 8장은 이 예언의 주체가 되는 ‘젊은 여인’이 이사야의 아내임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 임마누엘이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뜻이다. 즉, 신이 다메섹과 사마리아의 위협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실 것인가라는 아하스 왕의 질문에 대한 이사야의 답변인 셈이다......


기독교의 반론 : 창세기 3장 15절의 여자의 후손이 가깝게는 하와의 후손이며 먼 미래를 위한 예언으로는 예수의 오심에 대한 예언이다. 마찬가지로 이사야 7장 14절은 유대인들이 해석하는 대로 그 당시의 역사적 상황 속에서 이뤄진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중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가까운 미래에 대한 예언과 먼 미래에 대한 예언인 것이다. 먼 미래에 대한 예언으로 해석할 때는 시제와 상황을 미래적 관점에서 해석하고 설명하는 것이 당연하다. 왜냐하면 역사적인 사실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예언의 말씀을 통해 나타내고자 하는 신의 뜻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 뜻을 이루는 해석으로 구약과 신약을 연결지어야 한다. 따라서 이 본문은 오역이 아니며 잘못 적용된 것도 아니다. 예수가 오심에 대한 관점에서 올바르게 해석된 것이다.

 

14. 기적 많이 기록한 성서를 의심

유대교 지도자들은 기독교 성경이 유대인과 이방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아라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 기록됐다고 지적한다. 특히 예수의 표적과 이적을 많이 기록하고 있다고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본다.


유대교인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특별한 능력으로 표적과 기사와 이적들을 행했다고 해서 그가 메시아 기준을 충족시키는 것은 아니다. 특별한 기적을 보여주었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메시아가 아니기 때문이다.


토라(모세 오경)는 신이 유대 백성들의 신앙을 시험하기 위해 보내실 선지자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 이와 연관 지어서 보면 기독교의 예수 신성화는 큰 문제다. 토라는 특별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 많이 일어나서 다른 신을 믿으라고 권고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특별한 일이나 사건을 만들었다고 신이 아니다. 특히 유대교 성경이 가르치는 메시아는 더욱 더 아니다. 신명기가 이를 잘 웅변해주고 있다.

“너희 중에 선지자나 꿈꾸는 자가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네게 보이고 네게 말하기를 네가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우리가 좇아 섬기자 하며 이적과 기사가 그 말대로 이룰지라도 너는 그 선지자나 꿈꾸는 자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 이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여부를 알려 하신 너희를 시험하심이니라…”(신 13:2∼6)

예수는 기독교인들에게 표적과 이적을 행한 선지자로 취급됐다. 특히 예수는 ‘신의 아들’로서 완전한 사람인 동시에 완전한 신으로 믿어졌다. 예수에 관한 이 두 가지 설명은 기독교의 삼위일체론에 따른 한 신을 의미하는 것으로, 신명기가 가르치는 ‘유대 백성들이 모르던 신들’이다.


신명기의 경고는 예수에게 적용될 수 있다. 하나님은 악에서 벗어나라고 강력하게 경고했다. 이 때문에 예수가 행한 모든 것을 버리고 기독교의 신인 예수로부터 벗어나야만 한다. 예수는 신이 아닌 실패한 선지자요 랍비였다.


기독교의 반론 : 신약성경이 예수가 메시아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한 사람들의 고안품이라는 유대교의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 베드로후서 1장 21절은 “모든 예언은 하나님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에 의하여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증거한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은 사람의 뜻으로 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으로 된 것이다.


그리고 이사와 기적과 표적을 행하는 예수를 다른 무리가 행하는 것과 비교하면 안된다. 모든 사람이 운전을 한다고 운전을 하는 모든 사람이 직업적인 운전기사인가? 아니다. 분명 전문적으로 운전하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다. 예수가 행한 기적을 다른 사람들이 행하고 다른 사람들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했다고 해서 모두 메시아는 아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잉태된 예수가 나귀를 탄 것이지 예수가 나귀를 탔기 때문에 메시아가 된 것이 아니다. 무엇이 먼저인지 분명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15. 직무 성취 전에 죽었다

유대인들은 메시아는 그의 직무를 성취하기 전에는 결코 죽지 않는다고 믿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6가지의 메시아 기준에 부합하지 못하고 죽었기 때문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기독교가 비유대교적인 사상을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유대인들의 논리는 다음과 같다.

기독교인들이 이사야서 53장과 다니엘서 9장을 들어 예수를 메시아로 추앙하지만 이는 비합리적인 논리다. 기독교의 삼위일체론에 따르면 예수는 신의 아들이자 신이다. 그렇다면 죽을 수 없다. 만일 예수가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죽어야 했다면 유대인들이 더욱 더 예수의 죽음과 관련해 비난을 받아서는 안된다. 하지만 역사를 보면 기독교는 유대교를 핍박해왔다.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에 따른다면 예수는 유대인들의 예언을 성취하기 위해 반드시 죽은지 사흘만에 부활해야 했다(마 16:21, 막 8;31, 눅 18:33). 그러나 제자들은 엉뚱한 반응을 보였다(눅 18:34).


예수가 고난을 받고 죽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뒤 베드로의 반응을 보라. “베드로가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 하리로다”(마 16:22) 베드로는 이렇게 대답해야 했다. “송축하리로다! 당신은 죽은 지 3일만에 살아나기로 예언된 다윗의 자손 메시아임에 틀림없나이다.”


또 복음서를 보면 예수는 죽음을 원치 않았다(마 26:38∼39). “가라사대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막 14:36) 예수는 자신의 죽음이 자신의 뜻이 아니라고 했다. 만일 예수가 삼위일체의 한 위격이라면 그의 뜻과 하나님의 뜻이 다를 수 있겠는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라는 예수의 마지막 말은 버림 받은 한 인간의 고백에 불과하다.


선지자 에스겔은 각 사람이 자기의 죄에 대해 책임이 있다고 강조했다(겔 18:19∼21). 이 같은 예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었을 때 신이 모세의 대속 제안을 거절한 것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여호와께로 다시 나아가 여쭙되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했나이다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으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 주옵소서”(출 32:32)


기독교의 반론 : 예수는 신이 자신에게 맡긴 영혼 구원을 위해 이 세상에 왔음을 성경을 통해 분명히 제시했다. 십자가에서 부르짖었던 기도는 인간이자 하나님의 고민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즉 죄인들을 사랑하고 용서할 뿐 아니라 인간의 몸을 입은 자로 우리의 고민과 번뇌를 모두 체험했다. 사람은 자신의 능력으로 구원에 이를 수 없다. 이 때문에 예수는 자신을 못 박은 사람들의 무지를 용서해달라고 기도했다. 고통의 현장에서도 아버지의 뜻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십자가 밑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의 옷을 차지하려고 제비 뽑은 일 등은 구약 예언의 완성이다.


16. 예수로는 인간 죄 속죄 못해 주장

유대인들은 피흘림의 제사는 우발적 범죄에 한해 적용될 뿐 고의적 범죄에는 기도와 회개, 자선 등을 통해 속죄받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역대하 6장 36∼39절과 호세아 14장 2절 등을 들어 이같이 주장하고 하나님께서 피흘림 없이 죄를 사하여 주신 사례가 적지 않았다고 강조한다. 요나 이야기, 금송아지 사건, 다윗 왕과 밧세바 이야기 등도 하나님이 피흘림의 제사 없이 죄를 용서해주셨다는 것이다.


실제로 가난한 자는 죄를 속하기 위해 고운 가루를 가져올 수 있었다(레 5:11∼13). 또 유대인의 율법에는 특정한 짐승들의 피만을 제단에 쏟을 수 있고 인간의 피는 드려질 수 없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즉 하나님 외에는 구원자가 없기 때문에 예수의 피는 죄를 속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네가 애굽 땅에서 나옴으로부터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 나밖에 네가 다른 신을 알지 말 것이라 나 외에는 구원자가 없느니라”(호 13:4)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는 나의 증인,나의 종으로 택함을 입었나니 이는 너희로 나를 알고 믿으며 내가 그인 줄 깨닫게 하려 함이라 나의 전에 지음을 받은 신이 없었느니라 나의 후에도 없으리라 나 곧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구원자가 없느니라”(사 43:10∼13)


유대인의 율법에 따르면 고의적 범죄로 상해나 손실을 입혔다면 우선 피해자에게 보상해주어야 한다. 때로는 매우 중요한 금전적 보응이 따르기도 한다. 피해자에게 보상한 뒤 고의적 범죄를 속하기 위해 기도와 회개, 자선활동을 했다. 유대교는 인간 제물을 금한다. 만일 예수가 성전의 희생 제물을 대신해 인간의 죄를 위해 죽었다면 그는 실제로 성전에서 행해졌던 희생 제물만을 대신할 수 있을 뿐이다. 이 때문에 유대인들은 백번 양보한다고 해도 예수의 죽음은 오로지 우발적인 죄만을 속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기독교의 반론 : 유대인들은 피흘림 없이 죄 사함이 없다는 히브리서 성경 구절을 문제로 부각시키며 사람을 제물로 드리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한다. 죄를 고의적인 죄와 우발적인 죄를 구별, 어떤 죄는 피를 흘려야하고 어떤 죄는 피를 흘리지 않아도 된다고 주장하는데 이것은 큰 오류다.


예수는 죄를 구별해 설명하거나 특정한 죄사함에 대해 말한 적이 없다. 신을 떠난 사람은 고의적인 죄나 우발적인 죄를 넘어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모르는 죄를 범한 것이다. 즉 하나님을 떠난 죄를 지은 사람은 하나님을 믿으려 해도 믿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야 예수가 자신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것을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요한1서 5장 16절은 사망에 이르는 죄와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가 있다고 가르친다. 예수를 믿지 않는 죄는 사망에 이르는 죄이며 그 외의 죄는 사망에 이르는 죄가 아니다. 그렇다고 죄를 지어도 되는가? 아니다. 바울의 가르침을 보면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한다고 했다. 은혜가 더하다고 은혜 아래 있다고 죄를 지을 수 있느냐고 바울은 질문하며 그럴 수 없다고 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죄를 멀리하고 떠나야 한다. 죄가 고의냐, 우발적이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예수는 분명히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