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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레카의 [논술의 신]을 읽으면,

Joyfule 2006. 11. 15. 08:38

유레카의 [논술의 신]을 읽으면, 조성오의 [철학에세이]가 생각난다.




곧, 대입 논술 “반짝 철”이 돌아온다. 유레카의 [논술의 신]은 정말로 잘 만들었다. 저자의 정서엔 동의 못해도 출판교육산업으로는 만점을 줄만 하다. 386 세대(좌파)라면 당연히 대학교 입학하여 훌륭한 교양인이 되기 위해서, 유레카의 [논술의 신]을 읽으라고 권할 것이다. 유레카의 [논술의 신]과 그 아류작들에 대항할 80년대의 위풍당당한 모습은 조성오의 [철학에세이]일 것이다.


[철학에세이]는 80년대 후반 운동에서 90년대 초중반 사이의 사회 운동의 갖가지 이슈들을, ‘변증법의 3대 법칙’으로 녹여 붙여버리는 ‘수필’을 이용한 시도이다. 유레카는 ‘수필’에서 한 걸음 나가서 ‘야자까기 이야기’를 집어 넣었다.


[논술의 신]은 질서 정연한 목차에 ‘사회 교양’을 운동권적 프레임으로 집어넣는 배열에서, <이것만 보면 전체를 섭렵할 수 있다>는 불특정 대중 상대 교육 산업의 훌륭한 기본을 달성했다. 또, 기출 문제 모음집으로 각 대학 별로 지루하게 달린 책들이 아니라, 기출 문제들을 교양 서술 다음에 배치하는 모습은 논술 시험을 앞둔 고등학생들에게 상당한 매력을 줄 것이라고 본다.


다수의 논술 교재는 문장 훈련에 많은 분량를 수록한다. 그러나, [논술의 신]은 고등학교 [국어 상권]의 문장 훈련 파트를 믿은 듯, 과감하게 문장 훈련이란 기초 부분을 제외한다. ([논술의 신]의 정반대편에 있는 논술 책은 한겨레신문 한효석씨의 논술 책이다. 문장 훈련을 95% 이상 생각한다.)


조성오의 [철학에세이]를 읽은 대학생들은 그 프레임 틀에서만 사유했다. 마찬가지로, 논술 시험을 준비하는 고등학생들은 아무래도 출판교육산업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출중한 포맷에 도취되어 접하고서, 대학생활 내내 ‘좌파의 프레임’에서만 사유를 하게 될 것임은 불을 보듯 뻔하다.


우익 시민을 길러내기 위해서 사유 프레임을 어릴 때부터 우익 시민으로 길러주는 바로서의 움직임에 대하여, 우익은 너무나 능력이 부족하다. [논술의 신]이 중앙일보사(랜덤 하우스 중앙)이 지원하는 것을 봐서, 우익의 반대 시도의 움직임도 넉넉히 출구가 열렸을 법하다.


조선일보와 趙甲濟기자 중심의 우익 논객들에 대하여 [유레카]를 공격할 자격조차 없는 수준이 절대다수임을 인정한다. 조지 레이커프의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에서 공화당원의 사유의 틀(프레임)에 빨려 가지 말도록, 한 박자 쉬었다고 민주당원 식으로 해석해서 이야기하라는 조언에 대하여, 조선일보와 趙甲濟기자 중심의 논객은 [유레카] 중심의 논리 틀을 그대로 쓰면서 그들이 써달라고 요구하는 측면으로서 하는 것을 보았다. [유레카]를 자세히 읽어보면, 우익은 ‘자유’이고 좌익은 ‘평등’이라는 말은 철저하게 계급주의적으로 ‘가진자의 자유’와 ‘민중의 평등욕구’로 구분되어 있다는 사실을 볼 수 있다. 당연히, 우익은 반쪽짜리이고 좌익은 ‘자유와 평등’을 다 사용하는 상황으로 인식된다. 이것을 절대로 깨지지 않도록 곧이 곧대로 써먹는자 누구인가? 趙甲濟기자 주변의 인물들에 비판하는 대부분은 이러한 데에 걸린다. 좌익이 절대적으로 유리한 좌익의 틀 고스란히 들어다가 방향만 다르게 쓰면, 좌익이 괴로워 한다? 레이커프의 논리처럼 그 틀 자체를 파괴하는 다른 의미로 쓰며 그러한 틀을 쓰지 말아야 되는 것이다.


좌익은 [철학에세이]와 업그레이드 형태의 유레카 [논술의 신]을 만드는 데, 우익은 우익 사유를 우익 내부에서도 너무 소외되게 해 버린다. 유레카의 [논술의 신]을 비판할 자격은 우익에 없다. 어차피, 논술 시험을 출제하면 대학교 저학년 교양 수준으로서 가장 외곽의 질문을 묻게 된다.


‘권력’을 소유물로 바라보고서 일본영웅의 기개만 있다면 만사가 해결된다는 저능한 사고가 계속되는 한, 좌파들의 ‘권력’을 대중과 교섭하는 연결네트워크 권력으로 보는 바에 ‘보쌈’당할 수밖에 없다. 몇 물 가다 못해 완전히 낡아 버린 사유틀(틀렸다기 보다, 요즘가요 풍에서 서태지 노래 같은 의미)에 대한 병적인 고집은 문제가 너무 많다.


좌파를 허락하고서도 얼마든지 자유민주주의가 강화된다는 좌파의 사유가 허구가 된 것은, 사실 국민 대부분은 일제 말에도 일제 지배력에 저항의지 자체도 갖지 못한 ‘먹고 살기에 바쁜’ 대중주의 차원이기 때문에, 좌파만의 일방독주로 끝이 났다. 우파의 대중들이 정치적 결속력이 없이 군중에 휘둘려서 열린당 주도 매스미디어가 농간 치면, 한나라당 원칙파를 패대기 친 역사는 많다. 우익은 제 아무리 강경파도 주변에서 옹호 아군을 정치 교육으로 만들 수 없다면, 한나라당 당 내 원칙파의 입지는 갈수록 줄어들 수밖에 없다.


조성오의 [철학에세이]는 당시 고등학교를 마친 수준이면 누구나 이해하는 차원이다. 유레카 [논술의 신]은 고등학생 누구나 이해할 수준이며, 향후 벌어지는 [한겨레] 관련 모든 주제들을 읽을 교양 훈련의 배양으로 족하다. 우익에겐 그러한 차원의 우익의 모든 이슈로 연결되는 고등학생 교육 시도가 가능할까? 빅 3 노인 논객들 주변에선 그러한 일은 불가능할 것이다. [조선일보]나 보수 언론의 미래의 독자를 교육시키기 보다는 노인들만 엮어서 무덤으로 갈 생각을 하며, 젊은층을 따돌릴 것이 분명하다. 


유레카의 [논술의 신]은 잘 팔릴 것이다. 조선일보 신진상 기자의 [논술이 뭐길래]를 사줬지만, 도대체 왜 샀는가 싶을만큼, 내용 논지에서도 한나라당의 보수중심이 아니고 보수 원론 아젠다도 아니고 내용 편집에서도 ‘이마를 탁 칠만한’ 뭔가가 떠오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