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관 자료 ━━/추천도서

유영익 "왜 나쁜 점만 부각시키나..좋은 점 연구 외면하는 한국학계"

Joyfule 2020. 4. 21. 01:42



유영익 "왜 나쁜 점만 부각시키나..좋은 점 연구 외면하는 한국학계"

용미(用美)의 카리스마 이승만, 영어-국제법-세계사등 실력으로 美 휘어잡다

제12회 이승만 포럼, '이승만의 업적' 평가와 비판
“이승만의 잘한 점과 못한 점을 공정하게 인식해야”


“이승만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공정하지 못했다. 많은 역사학자들은 그의 나쁜 면만 부각시켰다”

유영익 교수(한동대 T.H. Elema 석좌교수)는 ‘이승만 대통령의 업적’에 대해 “적어도 잘한 점은 7이고, 못한 점은 3”이라고 평가하며 이같이 말했다. 그는 10여 만 장에 달하는 이승만의 일기와 편지, 메모 등을 정리하고 분석했다.

한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 역사를 가르쳤던 유 교수는 “이승만처럼 탁월한 인물은 보지 못했다. 우리가 그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그가 남긴 글이나 업적을 감히 이해할만한 수준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했다.

그는 ‘한인대표자대회(The First Korean Congress)’를 일례로 소개했다. 이승만 건국대통령은 서재필과 함께 1919년 4월 14∼16일간 필라델피아에서 한인대표자대회를 소집하여 독립방략을 논의하고 한국인의 독립의지를 세계여론에 호소하였다. 특히 회의 마지막 날에는 필라델피아 시내를 가두행진하고 대한민국 만세를 하고 헤어졌다.

유 교수는 “한인대표자대회는 독립운동 역사상 가장 중요한 집회였다. 이 때 참여한 사람들은 대한민국 건국을 위해 앞장섰던 인물들이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무시받고 있다”고 말했다.

 

 

 

이같이 부정적인 평가가 만연한 이유를 유 교수는 역사학계의 문제로 바라봤다. 유 교수에 따르면 존 테일러가 리처드 알렌이라는 가명으로 쓴 <한국의 이승만>이란 책은 쓴 이승만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많이 인용했던 책이다. 테일러는 이승만을 “국민들로부터 선물로 받은 권력에 의해 타락한 애국자”라 평하기도 했다.

유 교수는 “실상 존 테일러는 책을 썼을 때 나이가 23살 밖에 안됐었다. 또 이 책은 그의 처녀작이었는데 주로 미국의 여러 신문들을 바탕으로 썼을 뿐이다. 게다가 떳떳하지 않아 ‘알렌’이란 가명까지 쓰며 쓴 책이다. 한국의 역사학자들은 이 책을 왜 금과옥조처럼 여기는지 모르겠다”고 설명했다. 이어 “이후 이승만에 대해 부정적으로 쓴 책은 거의 이 책에서 힌트를 얻어 내용이 모두 엇비슷하다”고 말했다.

특히 1930년 태생인 존 테일러는 6.25 전쟁 당시 미8군 사령관으로 한국에 근무하면서 1953년 5월 4일과 6월 8일에 이 전 대통령 제거 계획을 입안했던 ‘맥스웰 테일러’ 대장의 아들이었다.

하지만 테일러 장군의 선임인 美 제8군사령관 밴플리트(James A. Van Fleet)는 “이승만을 위대한 한국의 애국자·강력한 지도자·강철 같은 사나이·카리스마적인 성격의 소유자”, “자기 체중만큼의 다이아몬드에 해당하는 가치를 지닌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유 교수는 “벤 플리트는 이승만과 가장 오래 사귄 사람이다. 그의 말은 과장이 아닐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도 유 교수는 “이 전 대통령은 12년간의 장기집권을 통해 허다한 과오(過午)와 실정(失政)을 저질렀다”며 구체적인 사례들을 언급하기도 했다.

“건국 초기 친일파 문제를 시의적절하게 처리하지 않아 후환을 남겼고, 6.25전쟁 발발 직후 영부인과 함께 수도를 남몰래 탈출하면서 그릇된 전황으로 서울 시민을 안심시켜 그들의 피난 기회를 박탈했으며, 예고없는 국군의 한강 인도교 폭파, 거창 양민 학살사건, 국민방위군사건, ‘사사오입’이란 억지논리로 장기집권 획책, 3.15 부정선거, 정경유착과 부정부패” 등은 국가 최고 통치권자로서 묵과할 수 없는 책임이라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참가자들의 원성이 터져나왔다. 한 참가자는 “왜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느냐”며 항의하기도 했다. 하지만 유 교수는 “이승만을 존경한다면 그의 잘한 점과 못한 점을 더 공정하게 인식해야한다”고 주문했다.

유 교수는 또 “이승만이 남북분단이나 6.25전쟁 발발 등 중대한 역사적 사건에 대해 책임이 있다고 하는데 절대 그렇지 않다”며 “잘한 점이 못한 점보다 훨씬 더 많다. 그 전란 속에서 정말 엄청나게 중요한 일들을 해냈다”고 강조했다.

 

 

 

“이승만의 잘한 점과 못한 점을 공정하게 인식해야”

 

◇ 정치 분야 = 이 전 대통령은 자유민주주의 원칙에 입각해 대한민국을 건국했다. 특히 동아시아에서 유일하게 미국식 대통령 중심제 통치체제를 확립했다. 유 교수는 “우리나라가 빠르게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지금까지도 유지되고 있는 ‘대통령제’ 때문이다”라고 설명했다.

유 교수에 따르면 이 전 대통령은 권위주의적 통치 내지 ‘문민독재’를 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언론의 자유를 허용하고, 국회의원 선거 실시와 의회제도의 존속, 양당제도의 발달 조장, 지방자치제 실시 등 적어도 형식상 민주주의의 외피를 유지하고 한국 국민의 민주주의적 자치능력을 향상시키는데 이바지했다.

유 교수는 “이승만은 한국은 10년 동안 거의 전제적인 집권적 통치를 해야한다고 했다. 필라델피아 회의 때 이승만은 150여명의 석박사들과 이 결의안을 적극적으로 통과시켰다. 국민들이 한번도 민주적인 선거를 해본적도 없고, 교육을 받은적도 없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 외교 분야 = 이 전 대통령의 업적은 대한민국 수립후 유엔과 미국을 위시한 30여 개 국가로부터 승인을 획득함으로써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확립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1952년 ‘대한민국 인접 해양의 주권에 대한 대통령 선언’을 일방적으로 선포해 독도를 포함한 한반도 해역의 어족 및 해저자원을 보호하는데 기여했다.

또 1953년 10월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해 한국이 미국의 동맹국으로서 여러 분야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성취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 그동안 우리나라는 많은 조약을 맺었지만, 대부분이 외국 압력에 굴복해 일방적으로 맺은 계약이었다.

하지만 유 교수는  "이 조약만큼은 ‘대한민국’이 주장한 최초의 조약이며 지난 60년간 한반도와 주변지역의 안정을 도모한 가장 중요한 조약이었다"고 강조했다.

 

◇ 군사 분야 = 19세기 역사를 살펴보면, 우리나라는 왕궁을 수비하는 군대조차도 왕비를 보호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명성황후가 무참히 죽임을 당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 전 대통령은 6.25전쟁 발발 직후 대미외교를 통해 미군의 참전을 유도하고, 유엔군과 국군의 긴밀한 공조체제를 통해 북한 침략군과 중공군을 격퇴하는데 성공했다.

그 결과 전쟁 발발 이전 10만 명에 불과했던 한국군 규모를 1954년 65만명 이상으로 대폭 증원하면서 질 역시 획기적으로 향상시켰다. 유 교수는 "이 전 대통령은 대한민국을 한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질높은 상비군을 보유한 동아시아의 ‘군사대국’으로 만들었다"고 평가했다.

 

◇ 경제 분야 = 이 전 대통령은 해방 후의 만성적인 인플레이션을 극복하고 미국으로부터 20억 달러 이상의 무상원조를 받아내 전후 경제복구에 성공하고, 수입대체산업을 육성해 공업화의 단초를 열었다.

뿐만 아니라 6.25전쟁 발발 이전에 농지개혁을 개시해 총 소작지 면적의 40%에 달하는 58.5만 정보의 땅을 유상 매입, 유상분배의 원칙에 따라 소작농들에게 분배해 자작지의 비율이 92.4%에 달하게 했다.

농지개혁은 경제적 효과 뿐만 아니라 지주제를 붕괴시키면서 전통사회의 지배계급인 양반의 몰락을 초래했다. 유 교수는 "양반제도가 없어진 것은 바로 이때"라고 설명했다.

 

◇ 교육 분야 = 이 전 대통령은 6년제 의무교육제도를 도입, 실시해 1959년까지 전국 학령 아동의 취학률을 95.3%로 높이고 성인 위주의 문맹퇴치운동을 전개해 해방 당시 80%에 달했던 문맹율을 22%로 낮추는데 성공했다. 유 교수는 "민주시민사회의 토대가 마련된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라고 설명했다.

이 외에도 중·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대폭 증설하고  해외유학을 장려해 과학기술의 발달과 경제개발에 필요한 고급인재를 양산했다. 해방전에 400여명이 유학하고 있었는데 이승만 12년 동안 2만여명이 유학했다. 유 교수는 “유학생들은 박정희 시대 때 산업 역군이 돼 경제발전이 기여했다”고 평가했다.

 

◇ 사회 분야 = 남녀에게 동등한 교육 및 취업기회를 보장해 한국 사회의 평등화에 기여했다. 전통문화의 계승 및 보존조치 강구와 기독교 교세 확장에 기여하는 등 문화·종교분야의 발전에도 기여했다. 유 교수는 “심한 차별대우를 받았던 한국여성들은 이승만 대통령 집권기간에 눈부신 각광을 받았다”고 강조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업적, “잘한 점은 7, 못한 점은 3”

유 교수는 “이승만 대통령 집권기간에 대한민국이 근대적 국가로서 갖추어야 할 기본적 요건을 구비했기에 1961년 이후 대한민국이 세계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비약적인 경제 및 문화 발전을 성취할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유 교수는 특히 “이승만은 야당하고 싸우고 미국하고 싸워 ‘고집’을 부려 해낸 업적”이라며 “그가 없었으면 대한민국이 지금처럼 성장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어 “1948∼1960년 통치기간중 이승만의 업적은 적어도 ‘잘한 점 7, 못한 점 3’으로 평가해야 한다”고 밝혔다.

북한이나 남한의 공산세력들이 이승만을 '미국 앞잡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전적으로 정치공세에 불과하다는 점을 강조한 유교수는 "이승만은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秦始皇), 터키의 전국자 아타튀르크(Kemal Ataturk),
이스라엘의 모세등 세기적인 카리스마적 지도자의 업적들에 비견된다."고 강조했다.

"미국 상류층보다 탁월한 영어실력, 국제법과 세계사에 통달한 글로벌 지도력, 누구보다 앞선 통찰력과 외교력을 갖춘 이승만, 그래서 미국 지도자들을 감동시켰고 강대국의 힘을 대한민국 건국과 호국에 적절히 활용할 줄 아는 용미(用美)의 달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