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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한의 토지개혁을 어떻게 볼 것인가?

Joyfule 2020. 4. 21. 01:41



남북한의 토지개혁을 어떻게 볼 것인가?


월간조선 
 북한은 1946년 3월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에 의해 무상몰수 무상분배 방식의 토지개혁을 단행했다. 땅을 거저 받게 된 북한 농민들은 “33세의 김일성이 어버이처럼 보였다”고 감격해 했다고 한다. 그러나 북한식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본질을 들여다보면 문제가 달라진다. 농민들에게 분배된 토지는 “매매치 못하며 소작 주지 못하며 저당하지 못하며 상속도 못한다”고 규정되어 있었다. 이런 식의 토지 분배는 지주들의 토지를 국가가 빼앗은 다음 농민들에게 소작을 준 것이나 다름없는 형태였다. 수확량의 3할에 해당하는 현물세는 국가에 내는 소작료나 다름없으니 북한 농민들은 지주 대신 국가의 소작인으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박갑동(朴甲東) 씨(남로당 지하총책 출신으로 6․25 때 월북했다가 일본으로 망명)의 증언에 의하면 북한의 무상몰수, 무상분배 방식의 토지개혁은 지주 자리를 국가권력이 대체한 것에 불과했기 때문에 실질적인 국유화나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토지개혁 전문가인 김성호(金聖昊)씨(전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수석연구원)도 “남한 학자들은 남한의 농지개혁이 유상이었다는 이유에서 북한측 개혁보다 못한 것처럼 여겨왔지만 실은 북한의 토지개혁은 농민에게 소작권만을 주었기 때문에 무상이었다”고 평했다.
 
  반면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듬해인 1949년 4월 국회에서 농지개혁법이 통과됐다. 그러나 토착 지주들이 중심이 된 여당인 한민당은 자신들의 재산인 농지 처분을 막기 위해 입법 지연전술을 구사했다. 그 결과 1949년 6월21일 농지개혁법이 공포되고도 이 법의 시행령은 1950년 3월 23일, 시행규칙은 4월 28일, 농지분배 점수제 규정은 6월23일 공포됐다(이틀 후 6ㆍ25 발발).
 
  이승만 대통령은 선진국인 미국에서 엘리트 교육을 받은 당대의 최고 지식인으로서 왕조시대에서 식민지 시대를 체험한 신생 대한민국이 근대국가로 변모하기 위해서는 수천 년 뿌리를 이어온 지주-소작 제도의 타파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 따라서 토지개혁은 만난을 무릅쓰고 수행해야 할 국가적 과제로 인식하고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를 위해 공산당 출신의 조봉암(曺奉岩)을 농림부장관을 발탁해 농지개혁 임무를 맡겼다.
 
  한민당이 지연전술로 나오자 이승만 대통령은 1950년 4월 농림부에 ‘농지개혁 지침’을 내려 보내 “비록 입법이 되지 않아 추진 상 곤란이 없지 않으나 만난을 배제하고 단행하라”고 엄명을 내렸다. 당시 문서를 보면 시행령 공포 하루 전인 1950년 3월 24일 이미 농지분배 절차가 완료되어 4월 10일부터 분배 통지서가 발급됐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관련법규가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서 대통령 결단으로 밀어붙인 일종의 월권행위이자 초법적 행위였다.
 
  이승만 대통령의 결단으로 관련법규도 없이 진행된 토지개혁으로 인해 전 농지의 92% 이상이 자작화됐다. 이는 성공작이라 평가되는 일본과 대만의 개혁 실적을 능가하는 결과라는 평을 듣는다. 농민들은 “이승만 대통령 덕분에 쌀밥을 먹을 수 있게 됐다”며 칭송했지만 땅을 잃은 지주층은 몰락하고 영남을 무대로 한 자본가층이 탄생하는 계기가 됐다.
 
  이로써 한국은 수천 년 이어오던 지주-소작인 간의 갈등을 해소함으로써 진정한 근대국가로 변모했고, 모든 사람들이 같은 출발선에서 출발함으로써 균등한 분배, 반상(班常)의 계급질서 붕괴 등을 통해 국민들에게 “하면 된다”(Can do spirit)는 정신을 심어주는 계기가 됐다. 산업화, 근대화 과정을 거치면서 토지개혁에 실패했거나 아예 토지개혁조차 시도하지 못한 필리핀이나 중남미 국가들이 극심한 분배의 불균형에 시달린 반면 토지개혁에 성공한 한국, 일본, 대만이 건실한 발전을 통해 탄탄한 중산층이 형성되고, 균등한 분배에 성공한 것을 보면 우리의 토지개혁이 얼마나 성공작이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이 지주정당인 한민당의 반대를 무릅쓰고 밀어붙여 6·25 남침전쟁 직전에 거의 마무리했던 농지개혁은 공산화의 예방이란 효과를 남겼다. 6·25 새벽의 기습으로 남한의 대부분을 점령한 북한 인민군이 지주들의 토지를 몰수하여 소작농들에게 나누어주었더라면 농민들의 지지를 얻었을 것이며, 국군과 유엔군의 반격 때 많은 농민들은 자기 것이 된 농토를 지키기 위해서 인민군 편에 섰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승만이 전쟁 직전에 농지개혁을 끝냈기 때문에 인민군이 해줄 것이 없었다. 오히려 많은 농민들은 자기 몫이 된 땅을 지키기 위해 공산 침략군에 저항하고 반대했다.
 
  이런 농지개혁이 되지 않았던 파키스탄과 필리핀에서는 지주 출신 정치인과 군인들이 기득권 세력의 파수꾼이 되어 국민들의 욕구와 복지를 희생시키는 수구(守舊) 세력의 첨병 역할을 했다. 박정희 같은 가난한 농민 및 서민 출신이 장교단을 형성하고 있어 군대가 개혁적인 성격을 띠고 있던 한국과는 반대로 이 두 나라 장교들은 일부 상류층의 기득권을 수호하는 반(反)개혁 세력의 주구(走狗) 역할을 했다.
 
  이 두 나라는 민주주의 체제를 간판으로 내걸었으나 그것도 지주 출신 정치인들끼리의 민주주의, 게임화한 민주주의에 불과했다. 정치인들은 당파와 지역, 그리고 집안 이익의 대리인이지 국가 전체를 대표하는 엘리트는 되지 못했다. 대다수 서민들은 기득권층이 벌이는 권력투쟁의 구경꾼이거나 피해자였고 국가가 방치한 높은 문맹률은 이들의 정치참여를 더욱 제한했다.
 
  반면 서민층에 뿌리를 둔 한국군의 장교단은 당파, 지역 의 이해관계를 뛰어넘고 국가와 국민의 전체이익을 기준으로 정책을 펴는 국가 엘리트로 변신했다. 이것이 한국과 필리핀의 차이를 만들었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 토지개혁의 대가도 만만치 않았다. 일제시대라는 공백기를 거치면서 축적된 민족자본이라고는 토지자본이 유일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토지개혁으로 토지를 수용 당한 지주계급은 그 대가로 지가증권(地價證券)을 받았으나, 지가증권은 6․25 전시(戰時) 인플레로, 피난지에서의 생활자금으로 소진되면서 토지자본의 산업자본화라는 성과를 거두지 못한 것이다.
 
  때문에 한국의 산업화는 극심한 자본 부족 현상으로 인해 6․25 전후(戰後) 복구기엔 미국 원조자금에, 근대화 시기에는 외자(外資)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한계가 출발부터 노정되어 있었다. 축적된 민족자본이 없으니 외국에서 돈을 빌려다 공장을 지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기업가들이 외국에서 돈을 빌리려 해도 신용 문제로 돈을 빌릴 수 없게 되자 정부의 지불보증으로 외자를 조달했으니, 도입된 외자의 분배와 집행에 정부가 개입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