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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한양행의 유일한 박사

Joyfule 2008. 8. 1. 06:00

 유한양행의 유일한 박사 
- 항일 특수공작원과 참 기업인을 넘나든 유일한 - 
한 세기전에 불과 10세의 나이로 미국으로 건너 가 고학생에서 경영자로 성장하였고 
고국에 돌아 와 민족기업을 일으키고 항일투쟁을 위한 특수요원으로 변신하였다. 
그리고 다시 기업을 키워 사회에 환원하고 세상을 떠났다.
"이윤의 추구는 기업성장을 위한 필수 선행조건이지만 
기업가 개인의 부귀영화를 위한 수단이 될 수는 없다"는 
그의 말에서 남다른 기업관을 엿볼 수 있다.
1895년 1월 5일 평안남도 평양에서 유기연과 김기복 사이에 
6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유일한 박사는 
부친의 영향으로 10살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다. 
그는 고등학교 시절까지 "유일형"이었던 이름을 
조국을 잊지 않고 살겠다는 그의 의지대로 "유일한"으로 바꾸는 것을 시작으로 
대학 졸업반이던 1919년 우리 나라의 독립을 주장하는 
"한인 자유대회"가 필라델피아에서 열리자 "
한국국민의 목적과 열망 결의문"을 작성하여 발표하고  
그 결의문대로 실천하며 평생 조국을 사랑하면서 살았다.
1920년에 대학을 졸업한 유일한 박사는 
세계적인 전기회사인 제너럴 일렉트릭에 동양인 최초의 회계사로 취직 
동양 현지 총 책임자를 맡아 달라는 제의를 받는다. 
그러나 월급을 받으며 일생을 편안하게 살기 보다는 
민족에 봉사하는 기업을 경영하는 길을 택했다. 
1924년 승승장구하며 성공을 거듭하던 
숙주나물 통조림을 생산하는 회사와 재산을 정리하고 귀국한다.
"헐벗고 굶주리고 병든" 동포들의 문제를 단시일 내에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는 기업, 그 중에서도 제약회사를 키우는 일이라고 판단한 
유일한 박사는 1926년 12월에 자신의 이름에서
 "유한"을 따고 세계로 통한다는 의미를 가진 유한양행을 설립하게 된다.
그는 사업을 다각화하여 의약품 생산과 함께 위생용품, 농기구, 염료 등을 수입하여 
민중의 건강과 생활향상에 힘쓰고 우리나라의 특산품인 
화문석, 도자기, 죽제품 등을 미국에 수출하여 민족자본 형성에도 기여하였다. 
이는 당초 민족의 실력양성과 경제적 자립을 염두에 두고 
자신을 미국으로 유학 보냈던 부친의 뜻을 실현하는 길이었고 
동시에 선생이 품고 있던 민족적 대업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였다.
이후 1945년 1월 지천명의 나이라는 50세에 미군의 한국 침투작전인 
냅코 작전계획 (Napko Project  -  미육군 전략정보처(OSS)에 의해 수립된 계획으로  
반일 민족의식이 투철한 재미 한인들을 선발하여 
특수공작  훈련을 시킨 다음  한국과 일본에 침투시켜 
적 후방을 교란하는 작전)의 핵심요원으로 선발되어 
침투, 폭파, 통신, 낙하산 등 특수공작 교육을 받고 
제1조 조장으로 임명되어 "코드명 A"라는 암호명을 부여받기까지 한다.
그러나 이 작전은 일제의 항복으로 말미암아 안타깝게도 실행되지 못하였다. 
유일한은 후에 미 국무성의 비밀문서를 통해 그 실체가 밝혀지기 까지 
평생  한마디도 이 작전에 대해서 언급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  
광복후 미국에서 귀국한 유일한은 유한양행을 재정비하여 사장과 회장 
대한상공회의소 초대 회장으로 활동하며 국가경제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인간존중을 사업의 기본철학으로 가지고 있던 그는 
육영사업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일제시대부터 종업원들의 소양교육을 위해 많은 관심을 기울였던 그는 
1952년 전란 중에도 고려공과기술학교를 설립하여 교육비뿐만 아니라 
숙식까지 무상으로 제공하며 숙련된 지식 노동자의 양성을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1965년에는 오늘날의 유한공업고등학교를 설립하였고 
개인 소유주식을 각종 장학기금으로 출연하여 학교를 계속 지원하였다.
또한 유일한은 기업경영에 있어서도 선구자적인 업적을 많이 남겼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종업원지주제를 실현한 경영자다. 
그는 유한양행을 주식회사 체제로 전환, 
자신이 100% 소유하고 있던 주식의 52%를 사원들에게 양도하는 
파격적인 조건으로 종업원지주제를 도입하였다.
1969년 유일한은 기업경영의 일선에서 은퇴하게 되는데 
이때 자신과 아무런 혈연관계가 없는 조권순(趙權順) 전무에게 
사장직을 승계하여 전문경영인 체제를 도입한다. 
그에게 미국 변호사로 활동하던 유능한 아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족에게 경영권을 세습하지 않고 소유와 경영을 분리한 것이다. 
물론 소유도 자신이나 가족의 이름으로 한 것이 아니라 
자선재단과 종업원 그리고 국민의 이름으로 한 것이다. 
"기업의 소유주는 사회다. 
단지 그 관리를 개인이 할 뿐이다"라는 
그의 기업관을 스스로 실천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유일한은 정경유착을 하지 않았고 납세의 의무를 철저히 지킨 경영자였다. 
1950년대와 1960년대 많은 사업가들이 권력에 밀착해 이권을 따내고 부를 축적했지만
그는 역대 정권의 탄압과 유혹 속에서도 일절 정치자금을 내지 않았다.
그는 세금에 대해서도 철저했다. 
세금을 탈루하는 것이 상식으로 통할 때에도 유일한은 하지 않았다.
"기업이 세금을 많이 납부해야 정부가 국민을 위해 예산을 사용할 수 있다"는 
상식을 가진 그는 조금의 누락도 없이 세금을 납부했다. 
정치자금을 내지 않았다는 것이 빌미가 되어 혹독한 세무조사를 수없이 받았지만 
한치의 어김도 없이 납세의 의무를 지켰기에  
1968년 3개월에 걸친 세무조사 끝에 어떤 혐의도 발견되지 않아 
오히려 모범 납세자로 선정되어 정부로부터 국내 최초로 동탑산업훈장을 수상하기도 했다.
유일한은 기업인으로서만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도 우리에게 귀감이 되는 인물이다. 
그는 그 어려운 시절 미국으로 건너 가서 각고의 노력 끝에 기업가로서 몸을 일으켰으며 
사업가로서는 꿈꾸기 힘든 항일투쟁의 선봉에 섰고 나아가 나눔을 몸소 실천한 인물이다. 
그에게 기업은 목적이 아니라 나눔을 위한 수단이었다. 
그는 평생에 걸쳐 자신의 가치판단 기준은 국가, 교육, 기업, 가정의 순서라고 강조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모범적 실천이 아닐 수 없다.
유일한은 1971년 3월 11일 76세로 운명하였다. 
정부는 1971년에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1995년에는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