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의 자유함 / 영의 자유함
자유함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영적 자유함과 세상에서 말하는 육적 자유함입니다.
이를 분별하지 못하면 자칫 멸망의 길로 들어설 수 있습니다.
육의 자유함
불교의 어떤 승려들을 보면 가끔 술 담배 즐겨하며 고기도 매우 좋아하고
마음에 뭔가가 있으면 됐지 겉으로 드러나는 게 뭐가 중요하냐고 합니다.
일명 파계승이라고도 부릅니다.
가끔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 등장하는데
그 모습이 일반인들이 보기에 왠지 멋져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불교에만 그런 사람이 있는 게 아니라,
교회 다니는 분들 중에도 위의 승려와 유사한 분들이 매우 많습니다.
마음으로 주님을 믿는 것이 중요하지
술 좀 먹고, 담배 좀 피고, 노래방 좀 가며, 성질 좀 부리면서 육적으로 살면 좀 어떠냐는 것입니다.
믿음이 중요하지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는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지키려는 마음이 거의 없습니다.
이를 성경적으로 표현하여 은혜 안에서 자유함이라고 강조합니다.
즉, 방종의 삶을 은혜 안의 자유함으로 그럴듯하게 포장했습니다.
이들은 파계승과 종교만 다를 뿐 그 속성은 아주 똑같습니다.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마태복음 12장 35절)
그런데 문제는... 과연 진정한 믿음이 있는 분들이 이방인과 다름없는 삶을 살겠습니까?
그 안에 세상 것이 아직 청소(회개)되지 않고 가득하기에 육적인 모습들이 그대로 밖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입술로만 믿음일 뿐, 거듭나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즉, 교회만 다닐 뿐, 아직 온전한 믿음이 아니라는 방증입니다.
과연, 거듭난 성도가 자유함이라며 술 먹고 담배 피우며 육의 본질이 거침없이 쏟아져 나오겠습니까?
거듭난 온전한 믿음이 아직 없기에 세상 것이 자신의 육을 통해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보혈 피로 다 죄가 해결되었기에 육적인 방종은 자유함 속에서 다 누려도 되는 것으로 오해합니다.
이는 믿음이 아닐 뿐만 아니라 거듭남이 없다는 증거이고
또한, 주님을 향한 애통한 마음과 가난한 심령이 없어서 세상에 미련을 못 버린 사람의 전형적인 모습일 뿐입니다.
육적으로는 자유함이지만, 영적으로는 방종이자 속박입니다.
이것을 영적 자유함이라 믿고 있다면 멸망만이 기다릴 뿐입니다.
영의 자유함
영의 자유함은 성령충만한 성도님들이 느낄 수 있는 자유함입니다.
이분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주님의 말씀을 지키지 위해 억지로 노력하는 자로 보입니다.
애써서 내 이웃을 위해 그들을 도와주는 것으로 보입니다.
기도도 열심히 하고, 성경도 열심히 보며 뭔가 지키려고 얽매여 보입니다.
선한 일을 찾아 하려고 의도적으로 티 내는 것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거룩하려고 애쓰는 게 왠지 어설퍼 보이기도 합니다.
마치, 바리새인들처럼 율법적으로 보이는 착시현상도 있습니다.
흔히 말하는 행위 믿음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분들의 이런 모습은 결코 행위 믿음이 아닙니다.
억지로 하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거듭났으므로 그 안의 성령님의 통치를 받기에 이런 모습이 나옵니다.
이런 분들에게 육의 자유함은 오히려 큰 고통으로 다가옵니다.
육의 자유함은 진정한 자유함이 아닌 방종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물과 기름은 절대 섞일 수 없는 구조로 되어있듯
거듭나 주님의 날개(은혜) 안으로 들어오면 육신의 것이 싫어집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갈라디아서 5장 17절)
주님의 뜻으로 가득하기에 그분의 말씀을 따르려는 본능이 작용합니다.
그분이 싫어하는 것은 보려고 하지도 않으며 근처에 가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듯 내 이웃을 매우 사랑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충성하듯 내 이웃의 어려움을 보면
그냥 있지 않고 항상 뭔가를 하려고 하는 마음이 불같이 솟아납니다.
이런 현상은 내 임의대로 하는 노력의 마음이 아니라,
내 안의 성령께서 그리 하도록 뜨거운 마음을 주시기에 그렇습니다.
이런 분들에게는... 주님의 말씀대로 사는 게 자유함입니다.
주님께서 인치심으로 각인된 양심대로 사는 게 자유함입니다.
주님의 뜻을 벗어나면 오히려 괴로워서 속박받는 마음을 느낍니다.
주님의 날개 아래 있을 때 그것은 속박이 아닌 자유함을 느낍니다.
주님과 동거하는 육의 장막에 술과 담배를 넣으면 영적으로 괴롭기에
먹으려는 것 자체를... 억지로가 아닌, 즐거움으로 거부합니다.
육신적인 것을 거부하는 것이 즐겁기에 자유함입니다.
성령으로 인한 양심의 법이 작용하기 때문에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큰 속박을 느끼기에 진정한 자유함이 없습니다.
하여, 주님의 뜻 안에서만이 참자유함이 되는 것입니다.
"너희가 내 말(성령)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요한복음 8장 31-32절)
마무리
육신의 법 아래 있는 사람들은 솜사탕 같은 가짜 복음 듣기를 즐겨합니다.
심령을 찌르는 십자가 복음은 영의 자유함이 없기 때문에 힘들어서 거부합니다.
그런데 진정 영이 깨어있는 사람이라면 솜사탕 같은 설교에 더욱 가슴 아프고 힘들어합니다.
오히려, 심령을 찌르는 진짜 십자가 복음을 접해야 기뻐하며 자유함을 느낍니다.
육신의 법 아래 있는 사람들은 육신의 요구대로 살아야 자유함을 느끼게 됩니다.
성령의 법 아래 있는 사람들은 성령의 요구대로 살아야 자유함을 느끼게 됩니다.
내 마음을 육신의 법이 지배하면 육신의 속성이 쏟아져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내 마음을 성령의 법이 지배하면 성령의 속성이 쏟아져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주전자에 독주가 들었으면 독주가 나오는 것은 당연합니다.
주전자에 보약이 들었으면 보약이 나오는 것은 당연합니다.
육신의 법(육신의 자유함) 아래 있는 사람들은 사망으로 향하지만,
성령의 법(영의 자유함) 아래 있는 사람들은 생명의 길로 향합니다.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로마서 8장 4-6절)
어느 분이 제게 알려준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교회에서 성지순례를 갔는데 버스 안에서 목사님들이 대중가요를 부르며 즐거워하더랍니다.
어떤 분은 이 모습을 지켜보며 주님께 용서를 구합니다.
목사님들에게 저런 모습을 거두어달라고 간절히 기도드렸답니다.
이 성도님은 성지순례였지만, 그 목사님들에게는 성지여행이었을 뿐입니다.
이 성도님은 귀국 후, 목사님에게 성지순례 가면서 대중가요는 좀 아닌 것이 아니냐고 조심스럽게 말씀드렸답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하시는 말씀은... 믿음 안에서 자유하라며 이 성도분을 타일렀다고 합니다.
이 목사님이 말하는 자유함의 출처가 어디입니까...
육의 자유함 곧 방종입니다.
거룩함이 없는 육의 방종을 자유함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성도분의 마음은 영의 자유함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 목사님 마음 안에는 세상 것이 가득하기에 그 상황에서 유행가가 쏟아진 것이고,
이 성도님의 마음 안에는 거룩함이 가득하기에 같은 상황에서도 기도가 나온 것입니다.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마태복음 12장 35절)
영의 자유함을 아는 분들은 어딜 가나 거룩한 주님의 향기가 솟아납니다.
왜냐하면... 그런 분들에게 자유함이란 거룩함 속에서의 영적 자유함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지금 어떤 자유함을 누리고 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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