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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 회장 호텔방서 사라진 뒤...

Joyfule 2014. 3. 4. 00:12

 

이건희 회장 호텔방서 사라진 뒤...

 

드라이버 들고 일본 VTR 직접 분해한 이 회장
“삼성 보다 부품이 20%나 적은데도 비싸게 팔린다”며 질타

자택 지하실에 작업실 두고 삼성·경쟁사 제품 분석
각종 제품개발에도 파격적인 아이디어 직접 내놔

1993년 신경영 선언이 촉발되기 직전, 임원들과 함께 미국 출장에 오른 이건희 회장은 호텔에 짐을 풀자마자 사라진다. 임원들은 공식적인 일정을 앞두고 현지를 둘러보며 나름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어딘가를 다녀온 이 회장은 호텔방에 들어가 몇 시간 동안 두문분출했다. 그리고는 마침내 호텔방 문이 열리고 임원들을 불러들였다.

그들 눈 앞에는 삼성전자의 VTR과 일본 경쟁사의 VTR이 분해돼 있었다. 인근 전자제품 판매장에 가서 두 제품을 사온 뒤 드라이버를 들고 직접 분해하며 차이점을 살펴본 것이다. 삼성전자 제품의 부품 수는 경쟁사보다 많았고, 내부의 선은 더 복잡했다. 국내 최고라는 자부심에 차 있던 임원들은 ‘쇼크’를 먹었다. 이 회장이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일본 제품의 부품수가 삼성 것보다 20% 가량 적은데도 비싸게 팔립니다. 부품 수를 줄여야 합니다.”

2011년 선진제품 비교전시회에 참관한 이건희 회장이 권오현 DS사업총괄사장으로부터 반도체 신기술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이 회장은 지난 1993년 신경영을 선언하면서 제품과 기술력의 차이를 한 눈에 살펴보게 한다는 차원에서 선진제품 비교전시회를 정례화했다./삼성그룹 제공
2011년 선진제품 비교전시회에 참관한 이건희 회장이 권오현 DS사업총괄사장으로부터 반도체 신기술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이 회장은 지난 1993년 신경영을 선언하면서 제품과 기술력의 차이를 한 눈에 살펴보게 한다는 차원에서 선진제품 비교전시회를 정례화했다./삼성그룹 제공
일본 유학시절 취미는 새 전자제품의 분해 조립

이 회장은 전자제품 생산에서 기술의 중요성과 효율성, 생산성 등을 항상 강조했다. 오랜 시간 동안 쌓아온 엔지니어적인 기질과 습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일본 유학 시절 새로 나온 전자제품을 사다가 뜯어보는 게 취미였다. 미국 유학 때는 자동차를 직접 분해, 조립할 정도로 엔지니어적인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이후 삼성 경영에 본격적으로 참여하면서는 아예 자택 지하에 작업실을 차렸다. 삼성전자가 개발하는 신제품은 모두 이 작업실을 거쳤다. 그는 삼성의 신제품과 경쟁사 제품을 분해·조립해보면서 비교·분석했다. 반도체 사업을 시작하면서는 일본 기술자들과 직접 기술 협의를 할 정도로 기술에 밝았다. 삼성의 반도체 신화를 이끈 진대제·황창규 전 사장과도 스스럼없이 토론을 할 정도였다.

반도체 기술에서 이 회장의 엔지니어적인 판단이 주효했던 사건이 있었다. 1980년대 반도체 업계는 2가지 서로 다른 방식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회로를 위로 쌓아 올리는 ‘스택’이란 방식과 회로를 아래로 파 내려가면서 구축하는 ‘트랜치’라는 방식이다. 직접 양산에 들어가기 전에는 어떤 방식이 우세한지 가름하기 힘들 정도로 두 가지 기술 모두 각각의 장점을 지닌 상황이었다. 그러던 1987년 선진기업들을 추격하던 삼성은 기로에 서게 된다. 4메가 D램의 칩을 스택으로 만들 것이냐 아니면 트렌치로 할 것이냐? 어느 누구도 선뜻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 그 순간 이 회장이 명확한 결단을 내린다.
“단순하게 생각합시다. 지하로 파는 것보다 위로 쌓는 게 쉽지 않겠나?”
이후 삼성은 경쟁사를 앞서게 되고, 반도체 기술을 주도할 수 있었다.

이건희 회장이 직접 제품 개발에 관여한 ‘SCH-X430’단말기. '이건희폰’으로 불린다./조선일보DB
이건희 회장이 직접 제품 개발에 관여한 ‘SCH-X430’단말기. '이건희폰’으로 불린다./조선일보DB
파격 발상으로 글로벌 업계 흐름을 주도

엔지니어 감각을 지닌 이 회장은 각종 제품 개발에서도 직접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1983년 모토로라가 ‘다이나택’을 효시로 휴대폰 시장을 열어가자 세계 각국 전자기업들은 모토로라를 뒤쫓기 시작했다. 삼성도 1987년 휴대폰 생산에 뛰어들었고, 1989년에 ‘SH-100’을 출시하면서 본격적으로 휴대폰 시대를 열어갔다. 모토로라가 처음 휴대폰을 내놓은 이후 그때까지 휴대폰의 통화(SEND), 종료(END) 버튼은 일괄적으로 숫자 키 아래에 있었다. 삼성에서 처음 개발한 휴대폰 역시 이런 관행을 따랐다.

제품을 살펴보던 이 회장이 삼성전자 경영진에게 이와 같이 얘기했다.
“가장 많이 쓰는 키가 SEND와 END 키인데, 이게 아래쪽에 있으면 한 손으로 전화를 받거나 끊기가 불편하다. 두 키를 제일 위쪽으로 올리는 것이 좋겠다. 그리고 많이 사용하는 만큼 눈에 잘 띄어야 한다. 키 글자 색깔도 숫자 키와는 다른 색깔을 넣는 것이 좋겠다.”
모두가 모토로라의 다이나택이 만들어놓은 관행을 따라가기 급급하던 당시에 이러한 지시는 파격에 가까웠다. 그러나 SEND, END 키가 위로 올라간 삼성 휴대폰에 대한 소비자들의 반응이 뜨거웠다. 이후로 모든 휴대폰에서 SEND, END 키는 위로 옮겨졌다. 1000만대 이상 팔리면서 대히트를 쳤던 ‘이건희폰’ 등 그의 엔지니어적인 감각은 삼성 제품 곳곳에 스며들었다.

이외에도 ‘숨어있던 1인치를 찾아라’로 유명한 ‘명품 플러스원 TV’도 이 회장의 지시에 의해 탄생한 것이다. 1996년 당시 TV의 표준화면 규격은 4:3이었다. 그러나 방송국에서 송출하는 화면 규격은 이보다 가로가 조금 더 긴 12.8:9였다. 이건희 회장은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던 이 점을 지적했다. 방송국에서 송출하는 영상을 모두 담을 수 있는 새로운 규격의 TV를 만들라는 지시였다. 그 결과 숨겨진 1인치가 더 늘어난 ‘명품 플러스원 TV’가 등장하면서 삼성전자 TV는 새롭게 주목 받게 됐다.

이 회장은 CES(소비자 가전 전시회) 같은 전자제품 박람회에도 곧잘 참석하곤 했다. 의례적으로 잠깐 들리는 게 아니라 2~3시간 정도 전체적인 산업의 트렌드와 경쟁사 제품 등을 꼼꼼히 살펴봤다. 동행한 사장단과 기술의 흐름에 대해 의견을 나누기도 한다. 이른바 ‘비교전시경영’ 역시 이 회장의 끝없는 도전의식의 결과다. 이 회장은 1993년 이후 해마다 해외 선진 제품과 삼성 제품을 비교하고 분석해, 모자라는 점을 보완하는 비교전시회를 정례화했다.

2차전지 사업을 신수종 사업으로 육성

이 회장의 기술에 대한 안목은 거시적인 차원에서 미래 기술의 방향을 가늠하고 삼성의 신수종 사업을 선정하는데도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인프라의 중심축도 지금까지는 도로, 항만, 철도와 같은 물적 이동수단인 교통 인프라가 담당했지만 정보사회에서는 정보, 지식, 문화를 대량으로 신속히 옮길 수 있는 통신 인프라로 바뀌게 될 것이다. 국가 경쟁력과 나라 살림의 버팀목이라 할 수 있는 기간 산업의 관점도 앞으로는 중화학 중심의 중후장대 산업에서 정보통신 산업, 신지식 산업으로 옮겨가게 될 것이다.”

미래 기간산업이 정보통신 산업 위주로 재편될 것을 예견한 이 회장은 새로운 사업을 펼치기 위한 기회를 노렸다. 그러던 1999년 일본 출장에 나선 이 회장은 2차 전지의 사업 전망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됐다. 그리고 삼성SDI에 “전지는 장래 삼성을 먹여 살릴 신수종 사업이므로 즉시 추진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를 필두로 2차 전지 사업에 내려진 지시는 구체적이었다.
“2차 전지는 휴대폰 박형/경량화의 핵심부품으로 연구개발을 집중화해야 한다. 특히 폴리머 전지를 적극개발하고, 세계적 수준의 고성능 전지 개발을 위해 자원을 최우선으로 투입해야 하며, 이를 위해 우수 기술을 보유한 인력을 적극 영입해야 한다.”

이 회장은 이후 “반도체는 두뇌, 디스플레이는 눈, 배터리는 심장에 해당한다. 배터리 사업은 그만큼 중요하다. 배터리 사업을 업그레이드시킬 대안을 마련했는가?”라며 당시 김순택 삼성SDI 사장을 질책하며 배터리 사업을 강하게 밀어붙였다. 그 결과 삼성SDI는 세계에서 가장 얇은 초박형 초고밀도 리튬이온전지 개발에 성공했고, 세계 최고 용량인 2200mh 원형 전지 양산에 들어갔다.
삼성SDI 울산사업장의 전기차용 배터리 생산라인에서 이 회사 직원들이 제품의 이상 유무를 확인하고 있다./삼성SDI 제공
삼성SDI 울산사업장의 전기차용 배터리 생산라인에서 이 회사 직원들이 제품의 이상 유무를 확인하고 있다./삼성SDI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