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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왕정시대

Joyfule 2013. 11. 16. 11:39

 

 

이스라엘의 왕정시대

 김 수 복

 

  (3) 솔로몬 왕정시대(B.C.961-922년)


  1) 솔로몬의 통치

  다윗의 죽음 이후 솔로몬이 취한 첫번째 조치는 통치권의 안정이었다.
아도니야를 중심으로 한 정적들은 아직 기회를 노리고 있었고 욕심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늘상 새로운 시도를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시도는 늙은 다윗의 후궁이었던 수넴 여인 아비삭을 아내로 삼고 싶다고 아도니야가 청하던 날 좌절되었다. 솔로몬은 그의 정적을 제거해야 하는 시기가 왔음을 느꼈다. 곧 그는 아도니야를 죽이게 했으며 아도니야를 지지했던 요압도 브나야를 시켜 똑같이 죽였다. 또한 사울의 후손이며 압살롬의 반란에 개입했던 시므이도 제거했다. 왕국은 솔로몬의 손으로 인해 굳건히 자리가 잡혀갔고 그것은 솔로몬이 국내정치의 정적은 외국의 원수들보다 더 엄하게 다스림으로써 가능했다.

 

  2) 외교정책
  이스라엘 왕조의 최고 절정기를 누렸던 솔로몬은 아버지인 다윗왕과는 달리 이방국들과의 관계를 침략으로 굴복시키지는 않았다. 그에게는 또다른 방법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300명의 아내와 700명의 첩을 거느리는 규방을 소유한 것과 같이 현명치 못한 요소가 분명히 있었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솔로몬만이 할 수 있었던 외교적 동맹관계의 결과였다.

 

  솔로몬은 더 이상 최대의 넓이에 매달랐던 다윗의 치세를 따르지는 않았다. 그는 밖으로는 이방인들과, 안으로는 자신의 봉신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이스라엘로 하여금 평온 속에 그 잠재적 가능성을 발전시킬 수 있게 할 참이었다. 그는 슬기로운 동맹정책을 통해 이 목적을 성취하려고 했다.

 

  솔로몬은 외교정잭의 중점을 무역과 상업에 두었다. 그는 아라비아로 가는 주요 통로를 장악했고 이스라엘로 하여금 메소포타미아에서 에집트로 가는 길에 걸터않아 있게 했다. 이것을 뒷받침해 주었던 것이 띠로와의 동맹이었다. 이 동맹으로 서로 이로운 교역을 이루어지게 되었는데, 띠로에는 밀과 올리브유를 수출하고 레바논으로부터는 솔로몬의 건설사업에 필요한 목재를 수입했다. 이것으로 봐서 수출표본 상품들을 가지고 솔로몬을 방문하 '세바의 여왕'이야기는 충분히 있을 법한 이야기인 것 같다.

 

  3) 교역과 경제적 번영
  이스라엘 왕들 가운데 위대한 외교가일 뿐만 아니라, 위대한 상인이었던 솔로몬은 그 자신이 무역 및 공업의 독접과 왕실 재산에서 얻은 수입으로 부유해져 굉장한 부호가 되었다. 나라 전체의 생활수준도 역시 급격히 상승하였다. 거기에 따라 도시가 발전했고 또 새로운 도시들이 많이 건설되었다.

 

  경제적인 향상은 항상 새로운 사회적 계층과 변동을 수반했다. 비록 무역이 왕실 독점이었지만 가난했던 팔레스티나로서는 비교적 커다란 재부가 그 나라로 들어옴으로써 점차로 풍요해졌다. 무역을 담당했던 상인들과 도시들은 지위가 향상되었으며, 토지와 부동산들을 소유하게 된 대지주가 생겨났다.

 점차로 부유해진 주요 도시들은 그들의 부로 가난하여진 이스라엘 사람들로부터 얻은 광대한 땅에 커다란 가축 사육장을 만들어 갔다. 이러한 현상은 급격히 번져갔으며 마침내 축복받은 팔레스티나 농부들과 목축업자들은 자유로운 백성의 신분에서 토지와 가축과 자유를 잃어버린 초라한 소작인들과 목동들로 변해버렸다. 점차로 여러 도시들에서는 무산자 계층이 늘어갔다. 이것은 결국 부유층과 가난한 도시빈민, 예루살렘 사람들과 지방 주민들 사이의 불행한 대립으로 나타났다. 그같은 대립은 수백년 동안 지속되었다.

 

  4) 건축사업
  솔로몬은 또한 위대한 건축가였다. 페티키아에서 수입한 목재로 그는 방대한 성전 짓기를 좋아했는데 그것은 대단히 사치스럽고 복합적인 건물이었으며, 주거지로서가 아니라 국가관청으로 사용되었다. 훨씬 규모는 작으나 정치와 종교적으로 의의를 가진 것은 그가 예루살렘에 세운 '야훼께 바친 신전'이었다. 예루살렘은 다윗왕 이후 종교적 중심지며 동시에 정치적 중심지였다.

  성전 부근에는 복잡한 다른 궁전 건물들이 있었다. 이 건물들 가운데에는 바로 솔로몬의 궁도 있었는데 - 그것은 건축하는 데만 무려 13년이 걸린 굉장히 호화로운 궁이었다 - 굵고 육중한 송백나무 기둥들이 떠받치고 있었기 때문에 '수풀궁'이라 불리었다.

 

  5) 교육제도
  "솔로몬의 지혜는 동방의 어떤 사람도 따를 수 없었고 지혜있다는 에집
트의 누구도 따를 수 없었다"(1열왕 4:30).


  솔로몬의 지혜가 특별히 유명했다면 이것은 원칙적으로 의심할 필요는 없겠으나, 그 당시에는 일종의 학문으로서 소위 지혜론을 중요하게 생까하던 결과일 것이다. 동시에 그것은 그 자신의 개인적인 것만 아니라, 예루살렘이나 궁중에는 지혜를 가르치는 장소가 있었다고 생각된다.

 

  솔로몬이 국가행정을 확대시키자마자, 그것을 지원해 주는 관리로 일할 수 있는 그러한 계층이 필요했다. 그 당시 외교적이며 경제적인 활동과 관련해 솔로몬 시대에는 정신적, 문화적인 류가 성행하였다. 따라서 솔로몬은 그의 교육정책과 문화정책을 담당하는 학교가 필요하였으며 이전에는 이스라엘 밖에서만 존재하였던 학교가 예루살렘에 세워졌다. 그 학교에서는 에집트의 문화에 대한 지식과 히브리어와 친속성이 있던 나라들의 언어에 대한 지식, 법률지식들도 가르쳤다. 교육은 연령적으로 10세나 혹은 12세에 시작되었으며, 8년 또는 10년 동안의 과정을 가르쳤다.

 

  6) 솔로몬 왕정의 특색과 위기
  이스라엘에는 왕정이 존재하지 않았던 시대를 상기 할 수 있는 사람들, 또 왕정이 생기게 된 경위를 직접 목격했던 사람들이 아직 생존하고 있었다. 따라서 왕정은 거기에 대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문제거리로 말썽이 되었다. 특히 북부 사람들은 옛 체제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지는 않았지만 왕조 계승의 원칙을 받아들이기는 거절했다.

더구나 다윗 가문이 영구히 통치한다는 주장은 생각만 해도 기분나빳다. 따라서 그런 주장들은 배격했다. 그들 중에는 특히 솔로몬의 전제정치에 격노한 사람들이 많았고, 이방종교를 마구잡이로 끌어들여 이스라엘에 악신이 들끓게 만든 점을 비난하였다. 또한 부유해짐이 일부 계층에만 한정되어 확장되어 가고, 그 부를 뽐내게 되었을 때 그들은 솔로몬을 왕으로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모든 악의 표양으로 보았다. 그래서 그들은 국가를 지탱하고 있는 왕정을 축복받은 제도로 여기기는커녕 견딜 수 없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거기서부터 전승은 솔로몬 치하의 내부적인 위기를 끄러낸다. 그 첫번째 것은 이스라엘인 대부분으로부터 원성을 산 부역노동과 관련하여, 감독관으로 임명되었던 여로보암의 반란을 들고 있다. 그러나 그는 성공하지 못했고 솔로몬의 형벌을 피하여 에집트로 도망해야만 했으나 그것은 멀지 않은 훗날 돌발적인 악천후를 예고하는 번갯불과도 같았다. 왜냐하면 솔로몬이 통치를 하는 동안 내내 불신의 근본원인들은 제거되지 않았고, 오히려 더 커져 그의 사후에 계승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복합적인 이유로 그의 후계자는 계속해서 도전을 받았고, 훗날 여러보암이 북왕국의 왕으로 추대됨과 동시에 이스라엘의 분열은 점차 가속화되었다.

  솔로몬의 상비군, 그의 건축계획들, 그의 정치적 체제, 그의 아내들, 이 모든 것들은 정말 값비싼 것이었다. 부산한 무역, 성고억인 상업적 모험, 그러나 그 결과에 따른 대가는 결코 만족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솔로몬이 어떤 지혜를 가지고 무슨 일을 했는지 그 나머지 역사는 솔로몬왕의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솔로몬은 예루사렘에서 사십 년간 온 이스라엘을 다스렸다. 솔로몬이 세상을 떠나, 그의 선왕 다윗의 성에 안장되자 그의 아들 르호보암이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1열왕 11:41-43).
  그러나 그가 죽자 곧 반란과 분열의 씨앗이 싹틀 준비를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