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의 왕정시대
김 수 복
3. 왕국 분열시대(북왕국과 남왕국)
(1) 정치적 종교적 분열
솔로몬의 아들이며 왕위계승자인 르호보암이 국민에게 정부에 대한 의무의 짐을 덜어주기를 거절했을때 왕국의 북부가 갈라져 나갔고, 르호보암 자신도 이를 어찌할 수 없었다. 그때 솔로몬의 죽음 이후, 전에 왕에게 반란을 일으키고 나서 안전을 찾기 위해 도망하였던 여로보암이 에집트에서 귀국하였다.
백성들은 선왕에 대한 거부와 르호보암에 대한 거부가 관련성을 가졌던 그러한 이유 때문에 망명생활에서 귀국한 여로보암을 주목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그에게 왕권을 맡김으로써 북이스라엘이 다윗왕가를 확실히 거절했음을 보여주었다. 또하나의 좋지 않은 상황들이 계속하여 있었다. 바로 아시리아의 세력이 위협을 주는 커다란 적수로 등장했다. 그와 함께 르호보암은 새로운 세계적인 사건에 직면하여 무방비 상태였다.
사람들은 점차 다윗 왕가의 르호보암을 비난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모든 사악의 근원은 예루살렘이 조상들의 신앙에서부터 떠난 것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요셉이 야곱으로부터 받았던 고대의 약속들을 자랑하였다. 이제 솔로몬 시대에 있었던 치명적인 과오로 -- 이방신들을 받아들임으로써 생겨난 종교적 혼탁 -- 종교의 순수성 또한 사라졌던 것이다.
이러한 분열은 작은 전쟁들을 끊임없이 치르게 만들었으며 이스라엘이 멸망하기까지 200년간 계속되었다.
(2) 북왕조(아합에서 예후까지)
북왕조 이스라엘은 생산성이 풍부한 평원과 띠로와 시돈과 같은 가까운 시장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보다 인구가 많았으며 더욱 번창하였다. 북이스라엘은 그후 계속된 내정에서, 정력적이고 정치적인 안목을 가졌던 통치자들의 지휘 아래 공고하게 되었으며, 밖으로는 유다를 근본적으로 능가할 수 있었다.
특히 오므리 왕조는 내정적으로는 자기 국가의 단합을 촉구하였으며, 민족간에는 이스라엘과 가나안의 평화적인 공존을 추구하였고, 종교적으로는 바알과 야훼의 공존을 추구하였다. 이와 같은 내정과 종교정책은 자연히 다시금 외정에도 좋은 결과를 주었다. 시리아와 아시리아를 극복하는 것이 당면문제였던 이스라엘은 우선 유다와 동맹을 맺는데 성공하였고, 정치적으로는 페니키아와 가까워지는 데 성공하였다. 아합은 페니키아의 여인 이세벨과 결혼했는데, 그녀는 페니키아 지방에 있는 시돈의 에드바알왕의 딸이었다. 부유하고 근동에서의 세력권을 갖고 있었던 이 결혼은 여러 가지로 유익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는 새로운 교역의 관계가 맺어졌다.
그 외에 이스라엘은 점차로 강하게 다가오는 다마스커스의 아람인들을 대항하여 동맹자를 갖게 되었다 이스라엘은 그들과의 대결에 있어서 일정한 양보를 통해 해결하였다. 이스라엘의 모압에 대한 통치권을 회복하였고 유다 왕 여호사밧의 통치시대에 에돔은 다시 유다 지방이 되었으며, 이것도 유다와 이스라엘의 성공적인 제휴의 결실이었을 것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여러가지 압박에도 불구하고 오므리 왕조의 정책이 완전히 실패한 것이 아님에도 오므리 왕조는 백성에게서 소외되었다. 정부에 대한 불만이 계속해서 퍼져나갔다. 이러한 사실은 백성의 특정한 계층뿐만 아니라 수도와 군대의 권위있는 지도자들에게도 파급되고 있었다.
왕비 이세벨은 이스라엘에 바알신을 섬기기를 강요하였는데 나중에 탄압도 곁들어져 야훼 종교신앙의 전통이 무섭게 흔들리었다. 각 지파 세력들은 이에 반하여 결집되기 시작했고, 곧 혁명의 분위기로 바뀌어갔다.
그러나 예후의 혁명이 오므리 왕조를 피로 물들여 버렸을 때 오랫동안 무서운 전쟁이 벌어졌던 라못과 길르앗은 다시 이스라엘 지배하에 들어왔다.
(3) 예후(B.C.842 815) 왕조시대
예후는 종국에 왕권을 잡고 아합의 모든 혈족들을 죽인 후 야훼 종교로 회복시켰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다시 아합의 치세에 있었던 만큼 강력해 질 수가 없었다. 예후는 아시라아에 조공을 바침으로써 아람 족속으로부터 보호를 구걸했다. 당연히 띠로와의 동맹결합은 파괴되었다. 따라서 유다와의 동맹도 즉시 중단되었다. 유다의 왕 아하지야는 요람의 아들이며 여호사밧의 손자인데, 그의 어머니는 아합과 이세벨의 딸인 아달리야로서 아합의 전통을 받았다.
상당히 평온한 시대가 거의 800년에서 750년에 이르는 두 세대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이스라엘에서는 예후 왕조의 여호아스와 여로보암 2세가 통치하였다. 여호아스는 아람족에게 빼앗겼던 요르단강 동쪽의 도성들을 되찾을 수 있었고, 그의 아들 여로보암은 이스라엘의 국경지대들을 회복하여 국토를 안전하게 할 수가 있었다. 유다도 이시대에 번영하여 새로운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4) 북와조의 멸망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갈라져서 서로 대결하고 자기의 세력형성에 몰두하여 스스로 쇠약해져 가는 결과가 여러 가지 면에서 나타났다.
미천한 백성의 신세는 터무니없이 고달팠고, 국가는 그런 고통을 완화시키기 위해 별로 애쓰지 않았음이 분명했다. 예언자 아모스가 알려 주듯이, 이스라엘 사회의 두드러진 병폐는 극심한 부정부패와 극단적인 빈부의 차이였다. 체제 자체가 가혹했지만 가난한 자들의 구제책은 전혀 없었다. 그리하여 재산을 강탈당하고 토지에서 쫓겨나는 가난한 자들의 수가 날로 늘어갔다. 이스라엘 사회의 사회적 분해는 여로보암 2세에 들어서 급격히 심화되었다.
사회적 분해는 종교적 부패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큰 신당들은 예배자들이 모여들어 분잡했고 또 아낌없는 물량지급도 받았지만, 순수한 고유의 야훼 신앙은 이미 유지되지 않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이 시대에 부패한 사회에 야훼의 정의를 지킬 칼날을 예고하는 예언자 아모스와 호세아가 역사의 무대에 등장함은 의미심장하다.
(5) 남부왕조(히즈키야, 요시야)
유다 왕국은 조만간에 독립된 실체로서 B.C.587년까지 지탱하였다. 이스라엘의 몰락 때에 유다는 아시라아와 동맹하였고, 아시라아인들은 유다를 그들 제국의 작은 부분국가라고 생각하였다.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수년이 지난 후 히즈키야왕 아래서 유다인들은 아시리아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다. 유다는 재기하는 에집트인들에 의해 격려되고 아시리아 제국 아래서 일어나고 있는 반란에 힘을 얻었으며, 아시리아인들이 고양시키고 있는 종교적 영향에 도피하기를 예언자들에게 고무되었다.
B.C.612년 아시라아의 수도 니느웨가 바빌론 사람들과 메데인들에게 함락당하였을 때 유다인들은 환희에 차 있었다. 그러나 605년 아시라아와 에집트에 대한 승리가 유다인들에게 자유를 가져다 준 것은 아니었다. 반대로 예루살렘은 바빌론 사람들에게 탈취되었고, B.C.597년과 B.C.587년의 반란은 그들의 폭력적인 억압을 받았다. 두 번에 걸쳐 많은 상부계층의 유다인들이 바빌론으로 붙잡혀 갔다. B.C.587년 마지막 시드키야왕은 그의 아들들의 처형을 지켜보지 않으면 안되었고, 그 역시 소경이 되어 바빌론에 포로로 보내졌다. 이 유명한 바빌론 유배의 치욕을 당한 예루살렘은 파괴되고 노략질로 분탕질당하여, 왕궁과 신전과 성벽은 폐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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