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의 왕정시대
김 수 복
(2) 다윗 통치시대(B.C.1010-790년)
1)다윗의 출현
사울의 실패가 커지면 커질수록 다윗의 성공은 더욱 찬란해졌다. <사무엘상> 31장의 전승은 다윗에게 왕으로의 길을 열어 주는 사울과 그의 아들들의 운명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사무엘과의 결별 이후(곧 왕위 실각 이후) 성서의 전승은 내내 다윗 편이었다.
한편, 사울의 영광과 곧이은 퇴락의 과정에 참여하고, 사울의 퇴락을 더욱 앞당긴 역할을 했던 다윗은 곧 유다의 왕으로 즉위하였다. 그리고 그 자신 이스라엘의 왕으로 인정받기 위한 터전을 넓혀갔다.
2) 다윗의 집권
유다의 백성들도 틀림없이 다윗을 환영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먼저 다윗은 그들과 같은 지파 사람으로서 여러 모로 마음을 써서 그들의 땅을 방위할 수 있었던 강력한 지도자고 또 그들과 불레셋인과의 관계를 조정한 지도자고 또한 그들과 불레셋인과의 관계를 조정할 수 있는 입장에 있었다. 그래서 백성의 동의를 얻어 왕으로 받들어지고 헤브론의 유서 깊은 성소에서 기름부음을 받았다.
다윗도 사울의 경우와 같이 왕으로 선출된 군사적 영웅이었는데, 그의 집권에는 몇 가지 새로운 특징들이 따랐다. 다윗은 많은 경우 그 명성을 그의 개인적인 군대 덕분에 얻은 역전의 노련한 무인으로서 이미 사유영지를 가진 봉건영주였고, 한 이방 강국의 봉신으로서 왕좌를 차지했던 것이다. 더구나 유다는 그를 환호하며 억지로 왕으로 추대하였을 때 다른 지파들에는 상관치 않고 독자적으로 행동했다.
이제는 더 이상 사울 가문에 남아서 그 왕권을 주장하는 자가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백성들이 헤브론에 있는 다윗에게로 모여들어, 장엄한 계약의식을 거행하고 환호하며 다윗을 전 이스라엘의 왕으로 추대하였다.
새 왕국은 옛 질서, 곧 사울에 비하여 크게 다른 특색을 보여주었다. 다윗은 단지 과거의 고전적인 관례를 따라 집권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세력기반은 결코 부족동맹체제는 아니었다. 더욱 자세히 서술하면, 남부에서 이미 다윗에 의해 통치되던 유다 왕국과 북부에서 에스바알에 의해 정통성을 주장하던 지역이 다윗을 중심으로 하는 군합국으로 통일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새로운 국가를 창건한 이 통일은 깨어지기 쉬운 다소의 약점도 안고 있었다. 사울 가문과 다윗의 경쟁은 두 지역을 더욱 소원하게 갈라놓았음에 틀림없다. 다윗은 확식히 이것을 의식하고서 그 분열의 간격을 넓히지 않으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아마 이러한 것 때문에 그는 에스바알에 대하여 적대적 행위를 하지 않았고 또한 자기가 사울이나 압네르, 그리고 에스바알의 죽음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밝혔을 것이다. 또한 그가 사울의 딸 미갈을 자신에게 돌려보낼 것을 요구한 이유도 그와 미갈과의 후손에 의해 사울 가문과의 소원과 갈들을 화합시켜 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겠지만 결국 이것도 헛된 희망이 되고 말았다. 이 문제는 다윗의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다른 불평들은 말할 것도 없이 사울 가문의 여전한 권리 주장과 지방적인 시샘은 불시를 안은 채 지속되었다. 이것은 이스라엘 왕정이 결코 해결할 수 없었던 고질적 난제였으며 나중에는 이스라엘 분열의 큰 원인이 되었다.
3) 통치권의 안정과 확장
<사무엘 하>7장의 나단의 예언에는 다윗 왕조의 안녕과 번영을 약소하는 야훼의 음성이 들린다. "내가 일찌거이 사울에게서 내 사랑을 거두었지만 그에게서도 그처럼 내 사랑을 거두지는 않으리라. 네 왕조, 네 나라는 내 앞에서 길이 뻗어나갈 것이며 네 왕위는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라." 이의 약속은 다음과 같은 다윗의 활약으로 이스라엘은 안정과 평화를 얻었다. 그러나 이것은 이스라엘 민중의 자발성과 권리를 일정하게 양보한 결과였다.
다윗은 사울보다 더 강력하였다. 다윗은 불레셋족을 두 번이나 성공적으로 격파하였고 그들을 본래의 지역에까지 추격하여 몰아냈다. 이 사건의 결과, 이스라엘과 유다가 불레셋족의 위협에서 해방되었을 뿐만 아니라, 바로 다윗의 세력 확장을 촉진하였다. 불레셋족이 굴복한 한에는, 그들이 다윗왕 개인에게 속한 봉신관계에 처함을 의미했다. 또한 가나안 땅 전체에 결정적인 세력 변화를 일으켰다.
그 다음 단계는 예루살렘을 정복하는 일이었다. 아마도 아 단계는 다윗이 품었던 새로운 개척들과 관계 되었던 것 같다. 팔레스티나 땅 전부를 그의 손아귀에 넣는 일이다. 양 이스라엘 국가들 사이에 있었던 도시국가 예루살렘이 적의 수중에 있는 한 전체 이스라엘을 통일적으로 다스리기에는 불가능한 것으로 보였다. 북과 남을 이어 주는 주요 간선도로가 예루살렘 때문에 매번 차단당했다. 다윗은 공격을 가했다. 용병들로 하여금 예루살렘에 밀고 들어가도록 하였던 것이다.
그는 또한 성벽을 강화하였고 페니키아 건축공들의 힘을 빌려 궁전을 세웠으며 그 장소를 '다윗의 도성'이라고 명명하여 자기의 관저로 삼았다. 그리하여 그는 나이 삼십에 왕위에 올라 사십년을 다스렸는데, 그것은 헤브론에서 7년 6개월 동안 유다를 다스렸고, 예루살렘에서는 33년 동안 이스라엘과 유다를 다스렸다(2사무 5:4-5).
4) 제국의 건설
"그뒤 다윗은 불레셋을 쳐서 굴복시키고, 모압을 쳐서 이기고, 하다데젤을, 에돔을 쳐 이기고,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야훼께서는 그에게 승리를 안겨주셨다"(2사무 8장 참조).
다윗은 이제 전체 팔레스티나뿐만 아니라 국경지역의 커다란 부분도 자기 수중에 넣어서 단기간에 대국을 성립하였다. 이렇게 급진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좋은 여건과 실로 그런 가능성마저 제공한 것은 그 당시의 시대환경이었다. 그 당시에는 계속하여 동, 서사이에 세력의 공백이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새 왕국 건설에 다윗이라는 정치, 군사적 천재의 개인적인 업적도 적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5) 국가제도
다윗이 세력을 확장시킨 결과는 의심할 나위 없이 하나의 대국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대국은 통일국가가 아니라 매우 복잡해진 구조와 종족들의 결합이었다. 다윗은 여러 왕국들을 자기의 인격 연합안에 합일시켰으며, 다른 지역들을 자신의 개인 소유로 하였다. 또다른 지역들은 속국들로 존재하였다. 그의 존속은 근본적으로 국가 건립자의 결합에 의한 개인적인 통치력의 연속성에 의존하였다. 그러므로 다윗은 왕위계승을 규정하고 그것을 백성들에게 당연히 받아들이도록 하는 데 진력하였다.
다윗은 국법으로 이스라엘 전체를 다스릴 수 있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다윗과 솔로몬이 인격연합을 통해서 2개의 국가가 하나의 왕국으로 통일되었다. 물론 그 국가들은 솔로몬이 죽었을 때 분단되었다. 다윗 왕조는 대국의 건설뿐만 아니라 국가 분열의 씨앗도 가지고 있었다.
6) 군사제도, 관료기구
다윗의 군인은 그에게 충성을 서약한 용병들이 핵심이었다. 600명으로 구성된 강력한 이타이(Itai)의 부대와 케레티와 펠레티(Kereti and Peleti)라고 불리는 호위병, 또한 다윗의 작은 영웅들이라고 불리는 30명의 작은 정예부대로 구성되었다.
다윗의 행정기구에 관해 전승은 아무것도 알려주는 바가 없으므로 다너지 추론한 따름이다. 당연히 다윗을 수장으로 하는 강력한 왕정이었으리라. 이스라엘 자체에서는 관료제도의 선례가 없었기 때문에 다윗은 그의 관료제도를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에집트의 의식을 모방하였다. 이것을 뒷받침하고 있는 성서의 기록에 보면 "각 지파에서 소집한 군대의 지휘관과 야전군 최고지휘관 요압, 그리고 외국인 용병부대의 지휘관, 왕실 전령관, 왕실 비서실장겸 국무장관, 2명의 제관장 사독과 에비아달 등이다"(2사무 9:15-18). 또 후대의 전승에 의하면 '강제노역'을 감독하고 관리하는 자도 고위 관리의 한 사람이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정복된 영지나 그밖의 다른 지방들에는 지방장관과 그보다 하위의 관리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수와 기능과 조직에 관해서는 전혀 알 수 없다.
궁중의 지출과 국가적이며 군사적인 지출에 대해 재정적인 수요와 생활양식은 주로 전리품과 봉신국가들의 정기적인 조세로 지급된 것 같다.
7) 다윗의 말년
다윗 왕국의 약점은 그의 복잡한 구조와 융합을 위한 불균등한 국가의 분배에 있었다. 그가 늙자 이러한 불균등과 복잡한 구조는 시정을 요구했고, 왕실 내부에서는 왕위계승권을 둘러싸고 암투가 벌어지기도 했다.
그 최초의 반란은 그의 아들 압살롬에 의해 꾸며졌다. 압살롬은 그의 누이인 다말이 이복동생인 암논에 의해 강제로 욕을 당하자 암논을 죽여버린다. 암논의 살해로 인해 그는 다윗의 분노를 샀고 모욕적인 조치를 당했다. 그들 부자의 관계는 분노와 원망으로 점점 소원해졌고 결국, 다윗에게 불만을 가졌던 유다인 지파들에 다가가 담판을 벌였다. 또한 압살롬은 와야할 순간이 왔다고 깨달은 순간에 자신을 헤브론에서 왕으로 기름붓게 하였다. 이 사건은 압살롬이 다윗의 야전군사령관 요압에 의해 굴욕적인 죽음을 당함으로써 일단 종결되었지만, 다윗은 왕위계승권을 둘러싼 지파간의 알력과 아들들 사이의 경쟁을 지켜보지 않으면 안되었다.
왕위계승에 있어 압살롬을 꺾은 뒤에는 두 사람의 유력한 후계자가 있었는데, 그들이 바로 솔로몬과 아도니야다. 왕위계승에 있어서는 군대가 중요하였다. 자연히 후계자들은 군대의 여러 부류들에 의해서 서로 지원을 받았다. 대개 친위대와 용병들은 솔로몬 편에 있었고 군사령과 요압은 아도니야를 지지했다. 결국 다윗의 지명이 솔로몬에게 내려져 왕위계승 문제는 일단락되었지만 아도니야가 거절된 이유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얼마든지 추론은 가능하다.
왕위계승은 명백히 궁중 음모에 의해서였을 것이다. 자기 세력의 존속과 화거대를 위해서는 왕권의 계승은 절대로 필요할 거서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 세력쪽에 있는 이를 왕위에 오르게 하기 위해 큰힘을 발휘했을 것이다.
드디어 결정의 시기는 왔고 거기에 아도니야의 쿠데타 시도는 그 결정에 구체적인 계기를 주었다. 결국 다윗이 친위대의 보호 아래 솔로몬을 키드론 골짜기에 있던 법궤의 장막 안에서 왕으로의 기름부음을 명함으로써 계승자는 명백해졌다. 그럼으로써 솔로몬의 통치는 시작되었지만 이스라엘은 하나의 크나큰 전통을 손실했다. 그것은 지도자 선택에 있어서 민중의 손으로 뽑아 거기에 환호하고 '야훼의 계심'을 믿었던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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