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성을 위한 ━━/이스라엘자료

이스라엘 민족의 기원

Joyfule 2014. 6. 13. 13:46

 

 

이스라엘 민족의 기원

 

  

 13. 사라는 아브라함의 아내인가.누이인가
아브람은 이렇게 이집트 왕에게 아내 사래를 누이라고 속였는데, 이와 흡사한 이야기가 창세기 20장 1-18절(E사료층)과 26장 6-11절(J사료층)에도 나온다.
전자에서 아브라함이 그랄에서 아내 사라를 누이동생이라고 속였으며,후자에서는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이 마찬가지로 그랄에서 아내 리브가를 누이동생이라고 속이고 있다.


이 세가지 이야기는 아마 원래는 하나님의 사실이었는데 그것이 변형하여 현존하는 설화가 된 것인 듯하다.
1925년에서 31년에 걸쳐 언어학자인 동시에 고고학자로 유명한 E.키에라(1885-1933)가 지휘한 바그다드 아메리카, 오리엔트 연구소 및 하버드 대학의 학술 조사대에 의하여 티그리스강 동부의 구릉지대의 고도 누즈(바그다드 북쪽 약 240km )의 발굴 조사가 행하여지고,그 결과 그 땅에서 쐐기꼴 글자로 기록된 수천의 점토판 문서들이 출토되었다.


그후 이들 점토판 문서들의 해독과 연구에 의하여 족장 설화의 사회적 배경의 일단이 밝혀졌다. 이 문서들은 후르리인의 서기에 의하여 바빌로니아어로 쓰여진 것이며, 그중에는 본래의 후르리어도 자주 사용되어 있다. 문서들의 대부분은 기원전 15세기나 고바빌로니아 시대보다 조금 뒤에 쓰여진 것이며, 후르리인의 법률 문서가 많이 들어있으며, 그 내용은 족장 설화와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다.


누즈는 고앗카드시대에도 가슬이라고 해서 작지만 역사적으로 중요한 도시였으나, 기원전 2천년대 중엽에는 후르리인이 살았고 그 지방의 중심지였다.
후르리어는 카프카스어에 속하며 인종적으로는 아르메니노이드계라고 한다. 후르리인은 이미 기원전 3천년대 후반의 기록에 나오며,그리고 우르 제3왕조 시대의 기록에도 나온다. 그들은 기원전 3천년대 후반에 카프카스산맥의 남쪽,즉 아르메니아지방의 반 호수 부근에서 티그리스 강 동쪽으로 침입해서 점점 서쪽 시리아지방으로 이동하고, 다시 남하하여 가나안 지방으로도 진출하여 기원전 2천년대를 통해서 셈어족과 함께 고대 오리엔트에서 가장 세력을 떨쳤다.
그들의 문화나 관습의 대부분은 아무르인에게서 받은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그들은 독자의 왕국을 세우지 않았으나 힉소스 이후 가나안에 새로운 문화 요소를 만들어내고 흑적 이색의 선상 문양으로 나타낸 물새나 태양의 장식이 있는 토기에 의하여 그들의 존재가 입증되었다. 그들은 구약성서에는 <호리족>(창세기 14장 6절,기타)으로 전해지고 있다.
미탄니 왕국의 지배 아래 있던 후르리인의 법관습에 의하면 아내는 결혼과 동시에 남편의 누이가 되어 이중의 연분이 되는 일이 적지 않았다.이러한 이중의 연분에 의하여 아내의 지위가 사회적으로 높아지는 것이다. 이중의 연분은 혈연 관계가 있을 경우에 더욱 많았으며 좋은 집안의 여자라면 같은 취급을 받았다. 따라서 아브라함이나 이삭이 아내를 누이라고 한 것은 거짓이 아니라 아내가 좋은 집안의 여자이고 그 지위가 사회적으로도 존중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14. 사라진 도시국가 우르는 어디 있었는가
바그다드와 페르샤만 중간, 유프라테스강에서 서쪽으로 약 16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텔.엘=무카얄(역청이라는 뜻)이라고 하는 언덕이 있다.
1854년에 J.E.테일러에 의하여 이 이름없는 황폐한 언덕이 구약성서가 말하는 아브라함의 고향 칼디아 사람들의 우르라는 것이 처음으로 알려졌다. 우르의 유적은 1918년에 C.톰슨이나 H.R.H.홀 등에 의하여 소규모의 발굴 조사가 행하여지고,그후 1922년에서 34년 걸쳐 대영박물관과 펜실바니아 대학의 공동 출자로 L.울리 경의 지휘 아래 발굴조사가 행하여지고 그 성과가 많았다. 그 조사에 의하여 그곳이 슈메르의 도시 중에서도 대단히 중요한 도시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조사에 의하면, 우르의 도시 영역은 길이 1.2킬로 미터,너비가 800미터나 되는 다수 불규칙한 타원형의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성벽에는 방어 시설이 설치되고 드문드문 성문이 있었다.


우르에는 우바이드 기(B.C.4천년대)이후부터 사람이 거주하고 문화가 번창했던 흔적이 보인다.
채문 토기,원통 도장,진흙 토기(terracatta)등은 선사시대의 풍요했던 생활을 엿보게 한다.
그후에 우르는 대홍수에 의하여 유실되어 버렸다. 이 대홍수는 두께가 2.4미터나 되는 점토층이 덮여있는 것을 보아 알 수 있다. 이러한 대홍수는 바빌로니아 평원 일대를 덮친 격심한 것이었기 때문에 여러가지 홍수 전설을 낳았고 창세기의 노아의 홍수 설화는 그 영향을 받아 성립된 것이다.


우르 제1왕조(BC 26세기)는 슈메르의 패권을 잡고 있었으며<우르 왕릉군>은 당시의 높은 물질 문화의 번영을 말해주고 있다.
그후 같은 슈메르의 도시국가 라가슈에게 패배해서 당분간 외국의 지배를 받고 있다가 다시 우르 제3왕조(BC 21세기)가 번영을 되찾아 전바빌로니아를 지배하여, 그 문화를 엘람,시리아에 전하고 모든 왕은 성문 법전<우로난므법전><슈메르 법>등)을 제정했다. 이어서 바벨로니아 전역은 바빌론 제1왕조(BC 19세기-16세기)아래 통일되는데 우르는 자주 슈메르인의 반란의 중심지가 됐기 때문에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그후 신바빌로니아 시대에 우르는 재건되고 지그라드의 복구 공사등도 있었으나 페르샤 시대에 다시 쇠퇴하여 기원전 4세기 경에는 폐허가 되고 만다.
우르 제1왕조 및 제3왕조의 수도였던 우르는 이 도시의 수호신인 달의 신 난나르의 대신전을 중심으로 한 神域과 이 신역을 포함하는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그리고 그 성벽 바깥 쪽에 펼쳐지는 도시로 이루어져 있다. 이 성벽에 둘러싸인 도시는 우바이드 기의 취락의 유적 위에 몇번이나 다시 세워진 작은 언덕 위의 도시이다. 유프라테스강과 그 운하에 따라 성벽이 있고 그 내부에는 제방이 있다.


달의 신 난나르와 그 배우신 닌가르의 신전은 시가지보다도 한층 높은 기단 위에 있으며 흙벽돌의 거대한 담에 싸여 있었다. 신역에는 몇군데의 신전이 있고 각 신전에는 관청과 창고가 붙어있었다.
신전과 지그라드가 우르의 번영을 상징하고 있다.

 


15.우르의 대지하 고분군의 발견
우르의 도시지역 중앙 북쪽에는 신역이 있었다.
1927년에 우르 제1왕조나 제 2왕조 시대라고 추정되는 <우르의 왕묘군>이 발굴된 것은 신역의 동남쪽이다.
메스.카람.두그의 왕묘에서 황금제 그릇,투그,촛대,은제 띠,단검 등 막대한 부와 정교와 기술을 말해주는 많은 유품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아.바르.기 왕의 고분 현낸 문서를 근거로 창세기 23장34장 10,21절,42장 34절,이사야서 23장 8절 등을 비교 논증하고 있다. 아래에 그 골자를 추려 소개하자.


아브라함도 하타이트 왕의 비호 아래<우가르트 문서>에 보이는 <우라>에서 가나안으로 온 호상이었다고 주장하며, 창세기 23장 6절의 <영감님>을 70인역이 <왕>으로 번역하고 있음을 주목하고,이것을 프토레마이오스 시대<왕>이 아니라 호메로스에 나오는 의미의 <왕>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하는데,그것은 즉동부 지중해적인 의미의 <왕>이라고 해석한다.
다음으로 위에서 말한 창세기의 제 기록이나 아마르나 = 미케네 시대의 국제 환경을 더듬어 아브라함이 상업 활동을 했던 것을 밝혀지고 있다. 그리고 모든 우르 중에서 갈디아인의 우르라는 지명이 오직 한 군데 뿐이라고 할 수는 없고,아브라함이 태어난 고향인 우르는 갈디아의 우르가 아니라 <우가리트 문서>에 보이는 <우라>라고 하며, 그곳을 하란 근처에서 찾는다.
이상의 여러 점에서, 왕들의 서사시로서의 족장 설화는 틀림없이 왕실을 찬양하고 정당화하기 위해서 사용돼 온 것이라고 결론 짓는다. 즉 갈디아인의 우르는 바빌로니아 남부의 우르가 아니고, 크세노판이 언급하고 있는 아르메니아인의 이웃이라고 하는 북방 갈디안의 그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사야서 23장 13절의 갈디아인의 나라는 바빌로니아의 남부의 그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북방의 그것을 가리키는 것이며,Hald는 아르메니아/우랄어 것 같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