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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종교와 문화

Joyfule 2014. 3. 2. 08:49

 

 


 이스라엘 종교와 문화

 

시오니즘을 배경으로 세계의 유태인들이 팔레스타인에 모여들면서 1948년 만든 국가로 수도는 예루살렘이다. 이러한 설립 배경으로 주변 아랍국가와 끊임없이 분쟁하고 있다. 이스라엘이란 국가 명칭은 헤브라이어로 '하느님이 지배하신다' 는 뜻이다.


이스라엘은 지리적으로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의 교차로에 있는 남북으로 좁고 긴 작은 나라로서, 동경 34도 48분에서 35도 36분과 북위 29도 33분에서 33도 10분에 위치하며, 북쪽으로 레바논, 동북쪽에는 시리아, 동쪽에 요르단, 남서쪽에 이집트, 그리고 서쪽에는 지중해가 접해 있다.


이스라엘의 면적은 골란고원을 포함했을 경우 약 21,946제곱킬로미터로 우리나라 남한 면적의 약 4.5분의 1에 해당하며 최북단에 위치한 해발 2,224m의 헤르몬산에서 남부의 네게브 및 아라바사막을 거쳐 최남단 홍해까지 약 450Km이고, 폭은 가장 넓은 곳이 약 130Km다.


 

- 수도 : 예루살렘(Jerusalem)
- 인구 : 625만 8000명
- 면적 : 2만 425㎢
- 주요 민족 : 유태인 77.8%, 아랍계 이스라엘인 17.5%


이스라엘 본토인이고 나머지는 세계각국에서 모여든 종교적 문화적으로 서로 다른 사람들이다.


인종적으로는 유대인이 약500만 명으로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그 외 약 100만명은 대부분이 아랍인들이다. 따라서 종교적으로는 유대교인이 가장 많고 회교,기독교,드루즈교도와 바하이교도등 소수 민족들이 함께 살고 있다.
- 주요 언어 : 이스라엘의 언어는 히브리어와 아랍어가 공식 언어지만 1948년 영국의 신탁통치 기간이 있었기 때문에, 그 영향으로 영어가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모든 도로와 공공장소의 표지를 히브리어,아랍어,영어를 함께 표기하고 있다.
- 기후 : 온대성 기후와 열대성 기후로 뚜렷하게 교체되는 계절 현상을 보여준다.  1년중 4월에서 10월 사이엔 덥고 건조한 긴 여름이 계속되며, 11월에서 이듬해 3월까지의 겨울은 온난하고 다습하다.


한편 예루살렘, 사페드 등의 고원지대는 더욱 건조하고 서늘한 기후를 보이며, 겨울에도 간간이 내리는 비사이사이에 밝은 태양이 비치는 것을 볼 수 있다.
- 종교 :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여 모든 종교 공동체가 법에 따라 신앙생활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사회의 다수를 점하고 있는 유태인은 거의 유태교 신자이며, 아랍계 이스라엘인들은 주로 이슬람교를 믿고 있다(일부 기독교 신자).  기독교, 드루즈교 등 소수 종교 신자들도 발견할 수 있다.


유태교, 기독교, 이슬람교 등 종교의 안식일(휴일)이 다를 뿐만 아니라, 일정한 구역에서 자신들의 계율에 따라 독특한 종교생활을 영위하고 있으므로 다양한 생활양식을 볼 수 있다.


유태교는 토요일, 이슬람교는 금요일이 각각 안식일(휴일)이다.  예루살렘은 종교적으로 큰 의미를 지니고 있는 바 유태교, 이슬람교, 기독교의 공동 성지로서 많은 종교인들의 경배의 대상이다.
- 이스라엘속의 기독교 현황 : 이스라엘 기독교 조직들의 역사는 나사렛 예수의 짧은 활동에서 출발한다. 그의 죽음 이후에 예루살렘과 그 주변으로 "사도교회 (Apostolic)" 가 형성되었고, 로마인들에 의해서 알리에 카피톨리나라 고 불리기 이전 까지는 "유대 기독교인(Judeo-Christian)" 들이 주된 구성원들이었다.


그러다가 알리에 카피톨리나로 개명되면서 "이방 인 기독교인" 들로 그 구성원이 바뀌었다. 그리고 초기 교회 공의회 가 있기 이전 까지는 분열되지 않은 하나의 교회로 존속되어 왔다.
그 후에 교회들이 분열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슬람의 세력에 의해 서 동방의 교회들이 정복 당한 이후에도 "성지들" 은 공동으로 관할 되어왔다.  이러한 현상이 십자군 시대의 도래와 함께 변화되었다.


라틴 서방교회가 최고 권한을 누리던 이 시기부터 "장구한 증오와 논쟁의 역사" 가 시작되었다.  동방교회와 서방교회 사이의 증오와 논쟁의 역사는 마멜룩크 시대와 오토만 터키시대까지 계속되어왔다. 그러다가 1852년 "현상유지(Status Quo)" 정책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400 만 이상의 인구가 오늘날 이스라엘에 살고 있다.  그 가운데 기독교인들은 2.3퍼센트를 점유한다.  1983년 실시된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체인구 4,065,000명 가운데 94,170 명이 기독교 인구였다.  이것은 1972년도에 실시된 인구조사 시기에 비하여 30.6 퍼센 트가 증가되어진 결과이다.


이러한 자료들은 1967년 점령 이래로 인구조사가 실시된 적이 없었던 유다, 사마리아 그리고 가자 지역은 포함되지 않은 것이다.  그렇지만 대략 이 지역에 산재해 있는 기독교 인구를 3 만여명으 로 추산한다.


이러한 경우에 이스라엘 땅에 사는 기독교 인구는 +/- 125,000 명이다.  그렇더라고 각 교파별 분포가 어떤지에 대한 정확한 자료가 없다.  각 교파별 분포는 최대한 어림짐작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기독교 조직들은 크게 네 그룹으로 나눌수 있다. 정통파(Orthodox), 단성론자들(Monophysite), 카톨릭(라틴과 연합체들 ; Latin과 Uniate), 마지막으로 개신교들(Protestant)이다.  이러한 교회 조직들이 약 20여개의 고대로부터 자생한 토착교회들이 있고 30여개 이상의 개신교회들이 있다.


아르메니안 교회와 같이 특정 국가를 중심으로한 교회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의 교회들이 아랍어를 사용하며, 이러한 교회들은 일반적으로 비쟌틴 시대로부터 계속되 어온 기독교 조직들이다.


 

- 정통교회(The Orthodox Church)
① 그리스 정교회
그리스 정교회 파크리아크는 예루살렘의 모교회라는 인식을 갖고 있다.  451년 칼케돈 회의에서 예루살렘 교회의 감독직이 인정되었다.  동방교회들 가운데서는 유일하게 일곱차례의 교회 공의회를 인정하는 조직이다.


그러나 정치적, 문화적 이유 등으로 1054년 로마 교회와 분열되었고, 지난 1964년 교황 바울 VI세와 파트리아크 아 테나고라스가 예루살렘에서 만났었지만 오늘날까지 이러한 상황은 계속되고 있다.  1099년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나서, 이미 피난 생활을 하던 예루살렘의 정통교회 파트리아크는 콘스탄티노플로 망명을 가게 되었다.  예루살렘에 다시 정착하게된 것은 1845년이다.
1662년 이래로 정통교회는 "성묘교회 협회(The Confraternity of the Holy Sepulchre)" 의 주도권을 장악하려는데 관심을 기울여 왔다.  그래서 정통교회의 위상을 확고히 하고 교회를 그리스식으로 보존하려고 노력해왔다.  교구 사제들은 대부분 아랍어를 구사하는 사람들이고 사제들의 결혼은 허용된다.


예루살렘과 갈릴리와 점령지역을 합하여 교세는 약 40,000여명으로 추산된다.  이와는 다른 두 개의 정교회가 더 있다.  하나는 러시아 정교회이고, 다른 하나는 루마니아 정교회이다.  이들 교회들은 그리스 정교회와 연합되어 있고 독립하려는 노력을 하지는 않는다.


② 러시아 정교회
예루살렘에서의 러시아 정교회의 활동은 1858년에 시작되었다.  그러나 러시아 정교회 교인들의 성지순례는 이미 키에브(Kiev)의 개종 이후인 11세기에 시작되었었다.  이러한 성지순례는 지난 900 여년간 계속되어 왔으며, 19세기에 접어들어서는 매년 수 많은 순례 자들이 줄을 이어 오다가, 제 1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에 줄어들었 다가 러시아 혁명으로 중단되었다.
1949년 이후에 이스라엘 지역에 있었던 러시아 정교회의 소유 재산들이 모스크바 파트리아크의 직계인 "러시아 정교회(Russian Orthodox Mission)" 소유가 되었고, 요르단 지역에 있었던 재산들은 피난 생활을 하는 러시아 정교회를 지칭하는 "러시아 성직자회 (Russian Ecclesiatical Mission)" 소유가 되었다.  이 두 정교회들은 각각 대수도원장(archimandrite)들이 관장하고 있다.


③ 루마니아 정교회(Romaian Orthodox)
루마니아 정교회는 1935년에 설립되었다. 역시 대수도원장이 관 할하며 소규모 조직체로 예루살렘에 존재한다.


- 단성론 교회들(Monophysite)
단성론 교회들 또는 반 칼케돈 교회들은 동방교회들이었다.  아르메니아, 이집트, 에디오피아, 시리아에 있었던 교회들은 칼케돈 공의회의 결정, 즉 '그리스도의 한 인성 안에 두 본성이 연합되어 있다' 는 그리스도의 신인양성론을 거부하였다.  결과적으로 반 칼케 돈 교회들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중심으로한 단성론 교리를 갖고 있다.


① 아르메니아 정교회
아르메니아 정교회는 아르메니아 국가의 개종이 있었던 301년부 터 시작되었다.  이 나라는 최초로 국가가 기독교를 받아들인 나라이다.  아르메니아 교회가 예루살렘에 자리잡기 시작한 것은 5세기 부터이다.  1311년 아르메니아 파트리아크가 예루살렘에 생겨났다.


19세기 동안과 제 1차 세계 대전 이후에 대량 학살이 자행되는 동안 아나톨리아 지역의 아르메니아 교인들의 대량 이민으로 인하여 이스라엘 지역의 아르메니아 교인들이 늘어났다.  특히 1915년 터키의 학살 시기 이후로 많은 증가가 있었다.  오늘날 예루살렘과 하이파 그리고 욥바와 베들레헴 지역에 약 2,000명 가량이 살고 있다.


② 콥틱(이집트) 정교회
이 교회의 설립은 4세기 무렵 유대광야 지역에서 꽃 피웠던 광야 수도원 운동과 함께 시작되었다.  마멜룩크 시대(1250-1517)에는 가장 번영하였었다.  13세기 이후로는 알렉산드리아의 콥틱 파트리 아크를 대신해서 예루살렘에 대주교(archbishop)가 정착하였다.  예루살렘과 베들레헴, 나사렛 지역에 약 1,000여명의 교세를 갖고 있다.


③ 에디오피아 정교회
적어도 중세 시대 이후로부터 에디오피아 정교회가 예루살렘에 설립되어 있었다.  초기 교회 역사가들은 에디오피아의 성지순례자 들이 이미 4세기부터 있었다고 기록한다.  그러나 이러한 기록은 은유적인 표현 일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지난 몇 세기 동안 에 에디오피아 교회는 성지 소유권에 관한 상당한 권한을 누리고 있었다.  그러나 터키 시대, 특히 "현상유지(Status Quo) 정책" 을 앞두고 거의 대부분을 상실하였다.


오늘날 이스라엘에 있는 에디오피아 정교회는 아주 작다.  대주교 가 이끌며 소수의 수사들과 수녀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오늘 날까지 에디오피아의 순례자들의 성지순례는 계속되고 있으며 1985년 종려주일 행사에는 400여명이 참석하기도 하였다.


④ 시리아 정교회
시리아 정교회는 안디옥 교회를 계승한 교회이다.  이 교회는 중 동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들 가운데 하나이다.  이 교회의 전통 가운데 하나는 지금까지도 시리아어를 예배 의식과 기도서에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 언어는 서부 아람어에 해당된다.  그들의 파트리아크는 다마스커스에 체류한다.


793년 이후로 시리아 정교회 감독이 예루살렘에 있었으며 1471년 정착하였다.  오늘날에는 대수도원장이 관할하며 예루살렘에 7세기경에 세워진 성 마가 수도원에 거류하고있다.  교세는 약 1,000여명으로 추산되고 거의 대부분 예루살렘과 베들레헴에 살고 있다.


- 라틴 카톨릭교회와 연합체들(The Latin and Uniate Churches)
① 라틴 교회; 카톨릭 교회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의 관계가 어떠했던지 간에 성지에 서방교회를 세우려는 노력이 십자군 시대 이전까지는 없었다.  그러나 1099 년부터 1291년까지 라틴 파트리아크가 예루살렘에 머무는 동안 관계의 변화가 생겼다.


개신교회들의 활동이 증가하던 무렵에 이에 대응하기 위하여 라틴 파트리아크가 1847년에 다시 예루살렘에 자리를 잡았다. 이때까지만 해도 14세기 이후로 성지 재산들을 보호 관리하는 단체로 지정되었던 프란치스코 신부회가 지역 교회들에 대한 책임을지고 있던 형편이었다.


오늘날 예루살렘의 라틴 교회는 파트리아크가 수장이다.  그리고 그는 세 명의 교구장(vicar)을 거느린다(나사렛, 암만, 사이프러스). 이스라엘과 점령 지역에 대략 25,000 가량의 교세를 두고 있다.


② 마론 교회(Maronite)
시리아에서 기원한 교회이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그들의 본향인 레바논에 살고 있다.  마론 교회가 카톨릭 교회와 통합한 것은 1182 년이다.  그리고 이 교회만이 동방교회들 가운데서 유일하게 전체가 카톨릭을 따르는 교회이다.


이스라엘에는 약 6,000여명의 교세를 갖고 있다.  거의 대부분은 갈릴리 지역에 산다.  마론 교회가 예루 살렘에 파크리아크 위상의 교구장을 둔것은 1895년이다.


③ 그리스 카톨릭 교회(Greek Catholic;Melkite)
1724년 이후에 형성된 교회이다.  안디옥의 그리스 정교회에서 갈려 나왔다.  갈릴리에 1752년 감독구가 만들어졌다.  20년 후에는 예 루살렘에 감독구가 만들어졌다.


현재는 갈릴리 지역에 38,000 정도와 예루살렘 지역에 3,300 정도가 있다.  멜카이트(Melkite)라는 용어는 4세기부터 쓰여진 용어이다.  이것은 그 지역의 교인들 가운데 칼케돈 회의의 결정을 받아들인 사람들을 지칭한 용어다.  이들은 콘스탄티노플에 대한 로마의 "황제권" 을 받아들인 사람들이다.


④ 시리아 카톨릭 교회
단성론 교회인 시리아 정교회에서 갈라져 나와서 카톨릭 교회와 연합한 교회이다.  1663년 이후로 로마 교회와 연합하고 있다.  1890 년 이후로 베이루트를 근거지로 파트리아크가 관할한다.


파트리아크 위상의 대주교가 예루살렘에 있으며 베들레헴 지역을 포함하여 약 350여명의 교세를 갖는다.  1985년에는 예루살렘에 새로운 교회 를 건축하였는데 교회의 이름을 시리아와 인도의 전도자로 알려져 있는 도마의 이름을 따라서 성 토마스 교회라고 명명하였다.


⑤ 아르메니아 카톨릭 교회
1741년 아르메니아 정교회로부터 갈라져 나왔다.  남부 아나톨리 아 지역에 있는 시실리아가 아르메니아의 영역이었기는 하지만, 이 곳에 있던 이들이 십자군 시대 이후로 로마와 함께 연합하였었다.  아르메니아 카톨릭 파트리아크는 베이루트에 주재한다.  왜냐하면, 오토만 정부가 콘스탄티노플에 주재하는 것을 금지하였기 때문이다.  파트리아크 위상의 대주교 관구가 1842년 예루살렘에 형성되었다.


아르메니아 카톨릭 교세는 약하다. 총 600을 넘지 않으며 예루 살렘, 베다니, 라말라, 하이파와 가자 지역에 분산되어 있다.  로마와 연합하기는 하였지만 아르메니아 정교회와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이들은 아르메니아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서 상호 협력이 잘 이루어지고 있다.


⑥ 콥틱 카톨릭 교회
1741년 이후로 로마 교회와 연합하였으지만, 1955년에 이르러서 야 알렉산드리아의 콥틱 카톨릭 파트리아크가 예루살렘의 대주교를 임명하였다. 전체 숫자는 35명 정도이다.


⑦ 갈데아 카톨릭 교회(Chaldean Catholic)
고대 네스토리아 교리를 따르는 교회이다.  1551년 교회가 재정비 되었으며 파트리아크는 바그다드에 주재한다.  이스라엘에는 몇몇 가족들이 살고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갈대아 카톨릭 교 회는 합법적으로 인정받는 조직으로 등록되어있다.  1903년 이후로 비록 예루살렘에 거주하지는 않지만 파트리아크 위상의 대주교가 이 조직을 대표한다.


- 개신교 교회들
중동지역의 개신교 교회들은 19세기에 들어서서 시작되었다.  서양 선교사들이 "성지 재발견" 에 관심을 기울이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이들 선교사들의 초기 선교전략은 다수의 회교도인들과 소수의 유대인들을 복음화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성과는 그리스 문화가 지배적이었던 그리스 정교회 교인들에게서 나타났다.  당시 비쟌틴 시대 이후로 그리스 성격이 강했던 교회에 대한 지역민들의 반감이 있었는데 이들에 대한 개신교회화 현상이 있었다.


① 앵글리칸 교회
영국-러시아 동맹 체제는 1841년 예루살렘에 첫 개신교 감독을 임명하게 되었다.  1886년 동맹체제는 끝나고, 그 이후로 앵글리칸 독립체제로 유지되어 왔다.  1976년 이후로 선교의 토착화 정책이 추진되었고, 예루살렘에 첫 번째 아랍 감독이 선출되었다.  개신교회 가운데 가장 큰 조직으로 알려져 있으며 2,000여명의 교세로 추정 된다.


② 루터 교회
1886년 영국-러시아 동맹체제가 끝나고 러시아 정교회가 성지에 대한 관심을 증가 시킬 무렵 독일 교회 선교사들의 성지에 대한 선 교 활동이 증가 되었다.  그러나 제 1, 2차 세계 대전과 함께 종지 부를 찍게 되었다.


1939년 영국에 의해서 압류되었던 독일 루터 교회의 재산을 독 일과 맺은 전후 보상금 조약의 일환으로 1951년 이스라엘 정부가 매입하였다.  독일 루터 교회는 오늘날 아랍 감독이 관할한다.  대략 1,000여명의 교세를 갖고 있다.  1982년 노르웨이 선교 협회는 하이파와 욥바 두 지역에 관할 구 역을 확대하고 지역민들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다.


③ 침례 교회
1911년 나사렛에서 시작되었다. 지금은 갈릴리 지역에 6개가 있고 하이파, 텔아비브-욥바,예루살렘, 베들레헴, 라말라, 가자에 교 회들이 있다.  600여명의 교세로 추정되며 주로 아랍인들이다.


④ 스코틀랜드 장로 교회
1840년에 갈릴리 지역에서 처음 선교활동을 시작하였다.  그 이후 100여년 동안 주로 교육과 의료 선교활동에 주력하였다.  오늘날은 작지만 전문화된 공동체가 순례자들과 방문자들을 위하여 예루살렘 과 티베리야에 교회와 호스피스를 운영한다.  욥바에서는 학교를 운영한다.


⑤ 기타 조직들
최근에는 세 개의 협동 농장 체제를 갖춘 정착촌들이 설립되었다.  크파르 하밥티즘(Kfar Ha Baptism)은 페타크 티그바 북쪽에 위치한다.  1955년에 설립되었으며 농사일 뿐만 아니라 캠프 시설과 수련회 시설을 제공한다.  네스 아밈(Nes Amim)은 나하리아 부근에 위치한다.  1963년에 네델란드 개신교회에 의해서 설립되었다.  이곳은 유대교 이해를 위해 기독교 프로모션 조직으로 출발하였다.


그리고 예루살렘 서쪽에 야드 하슈모나(yad Hashmonah)는 1971년에 설립되었다.  이곳은 핀란드에서 찾아오는 순례자들과 여행자들의 숙박시설로 출발했다.  이 밖에도 다양한 개신교 단체들이 예루살렘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들의 구성원들은 매우 적다.  이와 함께 "메시아닉 유대인 공동체들" 을 꼽을 수 있다.


종교의 자유
이스라엘 국가의 기본적인 종교 정책은 1948년 독립선언문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선지자들을 통해서 알려진 것처럼 자유, 정의, 평화에 기초를 둔다.  이스라엘은 완전한 사회적 평등과 정치적 권리를 모든 국민들에게 확고히 해 주며, 이것은 종교와 성별과 인종의 차별을 두지 않는다.  이스라엘은 종교와 양심과 언론과 교육과 문화의 자유를 보장한다...."  이 선언문이 비록 국가 헌장도 아니고 현행법도 아니지만, 그 국가의 비젼과 신념을 대변한다.  이러한 원리에 입각하여 법들이 제정되었다.


각각의 종교 조직들은 자유롭게 신앙 생활을 할 수 있고, 그들의 절기와 예배일을 지킬 수 있으며, 한 주간의 휴일을 누릴 수 있다.  이스라엘 국가가 인정한 조직들("Recognized" Communities) 유대교, 이슬람교, 드루즈와 함께 특정 기독교 조직들은 이스라엘 정부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역사적 이유 때문에 오토만 시대로 부터 이러한 조직들은 결혼과 이혼과 같은 사적인 사안들에 대하여 법률적 자율권을 누린다.  현재로서는 이러한 인정을 받고있는 조직들은 그리스 정교회, 그리스 카톨릭 교회, 라틴 카톨릭 교회, 아르메니아 정교회, 시리아 카톨릭 교회, 갈데아 카톨릭 교회, 마론 교회, 시리아 정교회, 아르메니아 카톨릭 교회와 1970년 이후로는 앵글리칸 교회가 포함되어 있다.


성지들
유대교에 있어서 이스라엘 땅 전체가 성지이다.  그러나 많은 장소들과 건물들이 다른 종교의 성지들로 관리되고 있다.  이러한 장 소에 대한 자유로운 통행과 자유로운 신앙생활이 보장되어 있다.


성지보호법(Protection of Holy Places Law, 1967)에 의하면. " 성지들은 보호를 받는다.  어떤 형태의 폭력이나 신성한 장소로 알려진 곳에 그 회원들이 자유롭게 드나들고 이를 방해하는 어떤 형태의 폭력으로부터 보호받을 권리가 있다".


- 기 타
정결음식법 :
이스라엘 순례 중에 겪는 곤란한 점 중에 하나가 원칙적으로는 한국에서 가져간 음식을 그 곳 호텔에서 먹을 수 없다는 점이다.  이는 유대교의 독특한 정결 음식법 때문인데, 거의 모든 호텔은 이를 준수한다.  다만 호텔에 따라 이를 엄격히 지키는 곳이 있고, 손님의 편의를 보아 눈감아 주는 데가 있다.


랍비들 중에는 호텔이나 식당이 규정대로 정결 음식법을 잘 준수하는가를 조사하러 다니는 직업을 가진 랍비들이 있다(이 법을 지키지 않을 경우에는 정결 음식법을 지키는 유대인들이 절대 그 호텔이나 식당을 이용하지 않는다).


히브리어로 정결 음식법을 '카셔루트'(being kosher), 그리고 그 규정에 적합한 정결한 음식을 '카셰르'(kosher)라 하는데, 그 성서적 근거는 신명기 14장 3절에서 21절(레위기 11장에도 나옴)이다.


원칙에 따르면 짐승의 경우 굽이 갈라지고 되새김질을 하는 것만 먹을 수 있고, 물고기의 경우에는 지느러미와 비늘이 있는 것만을 먹을 수 있다.  날짐승의 경우에는 먹지 못하는 새 이름들이 구체적으로 밝혀져 있으며 날기도 하고 기어 다니기도 하는 것은 먹지 못한다.


정결음식법의 큰 특징 중의 하나는 돼지고기를 아주 금기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아랍 사람들도 전반적으로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다).  유대인들은 돼지 (히브리어로 '하지르')라는 말조차 입에 담기를 꺼려해서 '흰고기' 라고 돌려서 부른다.



또 다른 특징은 육류와 유제품을 함께 먹지 않는 것이다(규정상 적어도 6시간 정도의 간격을 둔다).  이 규정의 성서적 근거는 신명기 14장 21절의 후반부로서 "너는 염소 새끼를 그 어미의 젖에 삶지 말지니라" 는 말씀이다.  글자 그대로 이해하면 "아무리 짐승이지만 어떻게 새끼를 그 어미의 젖에 삶아 먹을 수 있느냐? 그건 너무 잔인한 일이다" 라는 인도주의적인 말씀이다.


비슷한 내용의 율법이 레위기 22장 28절에 있는데 "암소나 암양을 무론하고 어미와 새끼를 동일에 잡지 말지니라." 라는 말씀이다.  아무리 짐승이지만 같은 날에 2대를 죽이지는 말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신명기의 말씀을 아주 확대해서 이해하고 있다.


즉 염소새끼는 육류 전체를, 그 어미 젖은 유제품 전체를, 삶지 말라는 것은 먹지 말라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는 염소 새끼를 그 어미의 젖에 삶지 말지니라." 가 "너는 육류와 유제품을 함께 먹지 말지니라." 로 된 것이다.


그리하여 유대인들의 아침 식사는 '우유가 들어 있는 식사' 이고, 저녁 식사는 육류를 먹는 '고기가 들어 있는 식사' 이다.  식사 내용만 다를 뿐 아니라 사용하는 그릇도 다르며, 엄격한 유대교인들은 개수대와 찬장, 행주까지도 따로 사용한다.  조리와 설거지, 보관을 엄격히 구분하는 것이다.


정결 음식법의 기원에 대해서는 아직 만족할 만한 설명이 없다.  일반적으로 유대인이 아닌 학자들은 건강상의 이유를 든다.  성서가 이야기하는 정한 음식, 물고기들이 건강에 좋은 것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유대학자들은 다른 뚜렷한 대안을 제시하지는 못하면서 이런 설명에는 반대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 정결 음식법을 육체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 영혼과 관련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각은 이미 성서시대부터 있었다.  바벨론에 잡혀간 유대인들은 부정한 음식을 먹는 것은 영혼을 더럽히는 일로 생각했다(겔 4:13, 14).


이스라엘에 사는 유대인들의 경우에는 정결 음식법을 지키는데 별 어려움이 없다.  왜냐하면 시중의 모든 음식들이 (과자류를 포함하여) 모두 코셔(Kosher) 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밖에 사는 유대인들의 경우에는 당연히 어려움을 겪게 되는데, 그런 상황 속에서도 정결 음식법을 지키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한다.


예를 들면 새로운 스낵류가 나오면 그 스낵을 조사하여 돼지기름으로 튀긴 경우 그것을 먹지 말라고 널리 광고한다.  그러나 모든 이스라엘의 유대인들이 정결 음식법을 지키는 것은 아니다.  세속적 성향의 유대인들은 이를 무시하며 돼지고기를 먹는 이들도 꽤 있다.


- 토지소유
이스라엘 토지 소유의 개념은 시대적 변천 과정을 지나면서 형성되었던 요인이 있기 때문에 시 대적 변천 과정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시대적 변천 과정은 세 단계로 구분할 수 있는데 첫째는 오토만 터어키 시대, 둘째는 영국의 위임 통치 시대,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이스라엘의 독립 이후의 시대로 나누어 살펴 볼 수 있다.


1. 오토만 터키 시대
(1) 1858년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토지의 개인적 소유 개념이 없었다. 누구든지 원하는 사람이 적당한 토지를 이용하여 관리하거나 경작지로 활용하였기 때문에 소유 개념이 명확하지 않았다.


(2) 1858년 이후 1858년 처음으로 토지 등록법(tabu law)이 제정되었다.  이 토지 등록법에 따라 부분적으로 사 적인 토지들이 소유주의명의로 등록되었다.  하지만 토지 등록을 하면 세금을 내야하는 점을 우려하여 대다수의 토지들은 개인의 명의로 등록되기 보다는 어떤 경우에는 집단적으로, 예를 들면, 마을 이름으로 또는 지역 대표의 명의로 등록을 하거나 아예 등록을 기피하였다.


이러한 현 상들을 통제하기 위하여 뒤이어 제정된 토지 등록법(mahlullaw)에 의하여 미등록 토지에 대한 국유화 조치가 취해졌다.  즉 땅 임자가 밝혀지지 않거나 등록을 기피한 토지들은 국가 소유지 개념으로서의 토지 소유 개념이 생겨났다고 할 수 있다.


(3) 유대인들의 토지 구입 터키 통치 후반기에 유대인들은 터키 정부와 아랍 토후들로부터 토지를 구입하였다. 먼저 유대 인들의 거룩한 도시 네 곳 주변 지역들이 1855년에 구입되었다.


예루살렘, 헤브론, 싸페드, 티베 리야가 그 도시들이다.  이어서 욥바와 모짜(1859)지역들이 유대인들에 의하여 구입되었다.  이렇게 하여 1882년 무렵부터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기직전까지 418,000 두남이 유대인들의 소유지가 되었다.


2. 영국의 위임통치 시대
영국의 위임통치 시대의 토지 정책은 터키 시대의 정책과 커다란 차이가 없이 계속 이어졌다. 영국의 위임통치 시대가 끝나고 국제 연합의 팔레스타인 분할계획안이 통과 되었을 당시의 유대인 소유지역은 1,820,000두남으로 확대되어 있었고 이 소유지역들은 각각 JNF명의로 800,000 두 남,PJCA가 450,000 두남, 그리고 나머지 개인들이 관리하는 지역들이 570,000 두남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3. 이스라엘 통치시대
1949년 독립전쟁을 끝내고 이스라엘이 차지한 이스라엘 총 면적은 20,700,000 두남이었다.  이 가운데 425,000 두남은 호수와 바다 면적이고 나머지 20,275,000 두남이 이스라엘 땅 면적이다.


토지 면적의 구성을 살펴보면 영국 위임 통치가 끝나면서 영국으로부터 물려받은 14,500,000 두 남과 독립전쟁이후에 아랍 사람들이 피난 가면서 남겨 두고간 주인 결손토지가 3,175,000 두남이었는데 국가 소유지로 흡수되었고, 그 이외에 JNF가 800,000 두남 PJCA가 450,000두남, 유대인들 의 개인 명의로 된 소유지가 510,000 두남으로 단체나 개인에 의한 소유지로 구성 되어졌다.


이스라엘 정부는 1950년, 1951년 토지 개혁법을 제정하여 토지 관리를 전담하는 부서를 신설하였다.  그리하여 국유지 관리부, 주인결손토지 관리부로 구성된 토지 관리부를 설치하는 한편, 독일 사람들에 의하여 소유되었었던 토지를 관리하는 부서를 별도로 신설하였다.


1960년에 개정된 토지법에 의하면, 국유지와 JNF소유지의 땅은 매매 할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다.  물론 법으로 제정하는 특례사항을 마련하여 예외 규정을 만들어 놓기는 했지만, 원칙적으로 국유지에 대한 토지 매매 행위가 엄격히 통제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PJCA토지가 국가로 환수되거나 매입되는 과정을 거쳐 1868년 당시 이스라엘 총 면적의 92퍼센트가 국유지로 알려졌다. 이 가운데 국가 소유 면적은 16,200,000 나머지는 이슬람과 기독교회들의 종교 재산으로 관리되는 면적이 150,000 두남이고, 아랍사람들과 유대인들의 개인적토지인 사유지 면적은 1,385,000 두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