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꾸란(Qu'ran)의 몇 가지 특징
다른 종교의 경전을 거론하기에 앞서 가장 먼저 전제되어야 하는 부분은 객관적 사실의 정확한 이해이다.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함부로 경전의 내용을 논하면 십중팔구 반론에 직면하거나 비난을 받기 쉽다. 따라서 모두가, 이슬람교 측에서도 인정하는 꾸란의 몇 가지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문학적 아름다움의 특성
꾸란의 구절을 보면 모든 구절 말미에 “이는 알라의 말씀이니라” 라는 표현이 거의 빠지지 않는다. 이 구절은 하나의 노래소리처럼 모든 구절의 음률을 살려주는 기능을 하며 꾸란의 내용이 알라의 계시임을 확인시켜주는 대구(對句)의 역할을 한다. 또한 문어체 아랍어, 지난 1300년가량 변함없이 이어져 내려오는 흔들림 없는 아랍어로 씌여진 꾸란만 정통 꾸란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슬람의 주장대로라면 지난 1300년간 알라의 계시는 조금도 변함없이 지금도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는 시처럼 읊어진 내용을 그대로 담고 있기에 이슬람교에서는 꾸란의 문학적 아름다움이 극에 달한 것이라고 자랑하는 이유가 된다.
(2) 통사적, 서사적 흐름의 모호성
이처럼 문학적으로 아름다운 표현으로 이루어진 꾸란은 한 편으로는 통사적이나 서사적인 흐름과 묘사가 다소 모호하다. 기독교의 성경은 통사적이고 서사적인 흐름이 한 눈에 파악되고 앞뒤가 정확하게 일치하는 일정한 흐름이 쉽게 눈에 들어온다. 그러나 문학적 아름다움과 알라의 계시를 나열하였다는 꾸란을 읽어보면 시간의 흐름이나 사건의 서사적 흐름은 거의 나타나 있지 않다. 꾸란에서 그나마 어느 정도 기승전결을 갖추고 있는 내용은 성경 구약의 창세기에도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37장-50장) 요셉의 이야기 정도뿐이다. 그 외의 모든 내용은 통사적으로나 서사적으로 흐름을 파악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이에 따라 이슬람 이맘들은 꾸란의 초월적 묘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3) 개연성의 부족
꾸란의 또 하나의 특징은 개연성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일단 성경과만 비교해도 인명과 지명이 거의 나타나 있지 않다. 인명은 성경에서도 자주 거론되는 사람들에 한해 등장하고 있으며 지명은 실명으로는 거의 나타나 있지 않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주 활동무대였던 지중해 연안 이스라엘 인근의 지명과 신약 시대의 선교지들의 지명이 정확하게 나타나 있지 않은 점으로 미루어보아 꾸란은 구체적인 상황과 사건을 기재한다기 보다 원론적인 종교적 성찰의 기록이라고 분석할 수 있다. 물론 이슬람교 측에서는 이것이야말로 꾸란의 정통성을 나타내는 절대적 알라의 계시라고 주장하지만 설득력이 약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인명과 지명조차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지 않으니 사건의 개연성과 같은 논리적인 구조가 치밀하기를 요구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모든 기록을 알라의 절대적인 권위로 해석하기 때문에 이러한 의문, 당연히 제기 가능한 의문조차도 알라의 절대성을 부정하는 행위로 받아들인다.
4. 매우 독특한 교리(Doctrine)적 특성 두 가지
위에서 간략하게 살펴본대로 이슬람교의 경전인 꾸란은 통사적, 서사적 흐름이 모호하고 개연성이 다소 빈약하며 논리적 구조가 허술하다고 살펴보았다. 거기에 한 가지 더 매우 중요하고 독특한 교리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나시크(Nasikh, 진보) 교리’와 ‘만수크(Mansukh, 취소) 교리’의 두 가지 예를 들 수 있다.
꾸란은 앞부분과 뒷부분에서 상당한 구절의 논리적 충돌을 살펴볼 수 있다. 앞부분에서는 유대교와 기독교와의 공존과 상호이해를 강조하다가 뒷부분에서는 유대교와 기독교 등 이슬람을 부정하는 타종교를 탄압할 것을 강력히 강조한다. 이렇게 한 경전 속에서 앞부분과 뒷부분이 상충될 때 바로 진보교리라는 ‘나시크’, 나중에 온 계시가 앞에 온 계시보다 진보되었으므로 선택해야 한다는 교리로 설명된다. 또한 아예 다른 내용 두 가지가 상충되면 뒤에 왔거나 더 힘있게 묘사된 교리가 앞에 왔거나 덜 구체적인 교리를 취소시키고 그 자리를 메운다는 취소교리 ‘만수크’ 로 설명된다.
이러한 특성은 지금도 꾸란 경전해석의 여러 가지 이론을 낳고 있으며 이슬람교의 교파와 이맘들 사이에서도 상당한 격차의 해석상 차이를 가질 수밖에 없는 근본 이유가 되고 있다. 만약 한 종교의 경전을 일관성 있는 절대자의 계시로 받아들인다면 성경과 꾸란은 자세히 비교할 필요도 없다. 이것은 이슬람교에서도 일정 부분 인정하는 기독교의 구체적인 힘이라고 보면 크게 틀리지 않다.
중동선교회 김도흔 총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