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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권 선교를 위한 이슬람교 교리의 이해

Joyfule 2016. 8. 12. 11:56

 

 이슬람권 선교를 위한 이슬람교 교리의 이해

 

 

1. 이슬람교의 종교적 특성

  아마도 이 부분만큼 체계적인 이해가 불충분한 분야도 많지 않을 것이다.
아니, 더 있는 그대로 말한다면 이슬람 측의 ‘초점 흐리기’ 전략으로 반드시 알려져야 할 부분조차 감추어져 있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우선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운명적 관계부터 살펴보아야 한다.
이스마엘과 이삭이 배다른 형제로 결국 서로 멀리 떨어져 각자의 자손을 낳아 민족을 각각 일으키는 데에서부터 출발하는 수천 년의 서사시를 이해하기 바란다. 성경의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마다 아브라함의 시대가 몇 천 년 전 이야기인지 다양한 해석이 존재하지만 통상적으로 받아들여지는 B.C. 2166년 출생설이나 B.C. 19세기 설을 받아들인다면 이스라엘 민족과 아랍 민족간의 갈등은 4천년이 넘은 구원(舊怨)이 농축된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관계 위에서 예수그리스도 사후, 선교적 열정이 퇴색된 6세기에 나타난 이슬람교는
반 기독교-반 유대 정서를 강하게 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또 한 가지 이슬람을 반포한 무함마드는 당시 낙타를 타고 상거래를 하던 약대상인(Caravan) 등 여러 떠돌이들을 어린 시절 따라다니면서 이단의 시각이 가미된 잘못된 기독교 교리를 배우고는 하였다. 그 중 대표적인 예가 성삼위일체를 부인하고 삼위일체의 삼위가 알라, 예수 그리고 마리암(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모세의 누이 미리암의 이름을 혼동한 것으로 해석하는 학자가 많다)이라는 주장을 이슬람교에서 가르친다. 큰 차이점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알라(Allah)'라는 이슬람교의 유일신 이름 역시 무함마드가 최초로 거론한 호칭이 아니다.
당시 아라비아 반도 내에서 상당한 규모와 영향력을 이미 갖추고 무함마드가 속했던 쿠알라이쉬 민족신의 이름이 바로 알라였다. 달의 신으로 추앙받던 알라의 이름을 무함마드가 유대인들이 말하는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으로 달리 부른 것이라고 보는 학자도 있다. 왜냐하면 알려진 대로 무함마드의 아버지 압둘라(Abdullah) 는 아랍어로 종을 뜻하는 압드(Abd-)에 알라신의 이름을 붙여 ‘알라를 섬기는 종’이라는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2.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교리적 차이
  흔히 알려진 바와 달리 이슬람교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이싸 알 마시(Isa Al-massi)라고 불리우며 훌륭한 선지자라고 일컬어진다.
다만 그리스도, 즉 우리를 죄에서 구하신 구세주로서 예수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 자리에 유일한 선지자라고 하는 무함마드가 역할을 대신한다. 때문에 무슬림들은 기독교인들을 상대로 “우리들은 당신들의 예수를 인정하는데 왜 당신은 선지자 무함마드를 인정하지 않는가?” 라는 교묘한 논리로 도전해오고는 한다. 이슬람의 전략을 이해하지 못하면 언뜻 혼동을 느낄 법도 한 접근방법이다.
  
단적인 예로 예수 그리스도의 그리스도 되심을 부정하기 위해 이슬람교 이맘(Imam, 교법사라는 뜻으로 기독교의 목사와 유사한 존재)들과 이슬람 학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크게 두 가지 주장으로 부정하고 반박한다. 첫째, 기절설(奇節說)을 주장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다 쏟고 운명하신 것이 아니라 기절했다가 십자가에서 내려진 후 깨어났다는 것이다. 두 번째, 변조설(變造說)을 주장한다.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예수께서 자신 대신 희생해 줄 자원자를 제자 중에서 물색했고 가룟 유다가 자청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얼굴을 바꾸어 변조, 대신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황당무계한 주장이다.

이러한 주장을 통해 기독교의 정통교리를 부정하는 이슬람교의 주장을 우리는 반드시 이해해야 한다.
그들의 가지고 있는 논리의 허와 실조차 깊이 파악하지 못한다면 드러내놓고 대한민국을 이슬람화하겠다고 공개컨퍼런스까지 열어가며 신비와 평화의 종교로만 다가오는 그들의 실체를 파악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3. 꾸란(Qu'ran)의 몇 가지 특징
다른 종교의 경전을 거론하기에 앞서 가장 먼저 전제되어야 하는 부분은 객관적 사실의 정확한 이해이다.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함부로 경전의 내용을 논하면 십중팔구 반론에 직면하거나 비난을 받기 쉽다.
따라서 모두가, 이슬람교 측에서도 인정하는 꾸란의 몇 가지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문학적 아름다움의 특성
꾸란의 구절을 보면 모든 구절 말미에 “이는 알라의 말씀이니라” 라는 표현이 거의 빠지지 않는다.
이 구절은 하나의 노래소리처럼 모든 구절의 음률을 살려주는 기능을 하며 꾸란의 내용이 알라의 계시임을 확인시켜주는 대구(對句)의 역할을 한다. 또한 문어체 아랍어, 지난 1300년가량 변함없이 이어져 내려오는 흔들림 없는 아랍어로 씌여진 꾸란만 정통 꾸란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슬람의 주장대로라면 지난 1300년간 알라의 계시는 조금도 변함없이 지금도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는 시처럼 읊어진 내용을 그대로 담고 있기에 이슬람교에서는 꾸란의 문학적 아름다움이 극에 달한 것이라고 자랑하는 이유가 된다.

        (2) 통사적, 서사적 흐름의 모호성
이처럼 문학적으로 아름다운 표현으로 이루어진 꾸란은 한 편으로는 통사적이나 서사적인 흐름과 묘사가 다소 모호하다.
기독교의 성경은 통사적이고 서사적인 흐름이 한 눈에 파악되고 앞뒤가 정확하게 일치하는 일정한 흐름이 쉽게 눈에 들어온다. 그러나 문학적 아름다움과 알라의 계시를 나열하였다는 꾸란을 읽어보면 시간의 흐름이나 사건의 서사적 흐름은 거의 나타나 있지 않다. 꾸란에서 그나마 어느 정도 기승전결을 갖추고 있는 내용은 성경 구약의 창세기에도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37장-50장) 요셉의 이야기 정도뿐이다. 그 외의 모든 내용은 통사적으로나 서사적으로 흐름을 파악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이에 따라 이슬람 이맘들은 꾸란의 초월적 묘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3) 개연성의 부족
꾸란의 또 하나의 특징은 개연성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일단 성경과만 비교해도 인명과 지명이 거의 나타나 있지 않다. 인명은 성경에서도 자주 거론되는 사람들에 한해 등장하고 있으며 지명은 실명으로는 거의 나타나 있지 않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주 활동무대였던 지중해 연안 이스라엘 인근의 지명과 신약 시대의 선교지들의 지명이 정확하게 나타나 있지 않은 점으로 미루어보아 꾸란은 구체적인 상황과 사건을 기재한다기 보다 원론적인 종교적 성찰의 기록이라고 분석할 수 있다. 물론 이슬람교 측에서는 이것이야말로 꾸란의 정통성을 나타내는 절대적 알라의 계시라고 주장하지만 설득력이 약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인명과 지명조차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지 않으니 사건의 개연성과 같은 논리적인 구조가 치밀하기를 요구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모든 기록을 알라의 절대적인 권위로 해석하기 때문에 이러한 의문, 당연히 제기 가능한 의문조차도 알라의 절대성을 부정하는 행위로 받아들인다.
  
4. 매우 독특한 교리(Doctrine)적 특성 두 가지
위에서 간략하게 살펴본대로 이슬람교의 경전인 꾸란은 통사적, 서사적 흐름이 모호하고 개연성이 다소 빈약하며 논리적 구조가 허술하다고 살펴보았다. 거기에 한 가지 더 매우 중요하고 독특한 교리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나시크(Nasikh, 진보) 교리’와 ‘만수크(Mansukh, 취소) 교리’의 두 가지 예를 들 수 있다.

꾸란은 앞부분과 뒷부분에서 상당한 구절의 논리적 충돌을 살펴볼 수 있다.
앞부분에서는 유대교와 기독교와의 공존과 상호이해를 강조하다가 뒷부분에서는 유대교와 기독교 등 이슬람을 부정하는 타종교를 탄압할 것을 강력히 강조한다. 이렇게 한 경전 속에서 앞부분과 뒷부분이 상충될 때 바로 진보교리라는 ‘나시크’, 나중에 온 계시가 앞에 온 계시보다 진보되었으므로 선택해야 한다는 교리로 설명된다. 또한 아예 다른 내용 두 가지가 상충되면 뒤에 왔거나 더 힘있게 묘사된 교리가 앞에 왔거나 덜 구체적인 교리를 취소시키고 그 자리를 메운다는 취소교리 ‘만수크’ 로 설명된다.

이러한 특성은 지금도 꾸란 경전해석의 여러 가지 이론을 낳고 있으며 이슬람교의 교파와 이맘들 사이에서도 상당한 격차의 해석상 차이를 가질 수밖에 없는 근본 이유가 되고 있다. 만약 한 종교의 경전을 일관성 있는 절대자의 계시로 받아들인다면 성경과 꾸란은 자세히 비교할 필요도 없다. 이것은 이슬람교에서도 일정 부분 인정하는 기독교의 구체적인 힘이라고 보면 크게 틀리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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