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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와 이슬람 그리고 각 파

Joyfule 2016. 8. 13. 09:42

 

  그리스도교와 이슬람 그리고 각 파

 

 

그리스도교와 이슬람

 

쿠란은 동정녀 출산을 인정힌다. 예수는 무함마드 이전 시대의 마지막 예언자이자 인류의 병을 고치는 치유자였고, 신성한 지위를 탐하지 않는 사랑과 가난과 겸손의 사표였다고 여긴다. 마리아는 지상에 살았던 가장 위대한 네 여인 중의 하나로 믿는다. 그러나 십자가에서의 죽음은 쿠란은 인정하지 않는다. 원죄의 개념이 없으므로 대속의 필요성이 인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초기 교회의 예수 본성에 대한 문제는 이슬람의 교리 발전에도 영향을 미쳤다. 하느님의 말씀으로서 창조된 것이 아니라 태어났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예수의 호칭 로고스는 쿠란에 대해서 영향을 미쳤다. 즉 쿠란을 창조되지 않은 하느님의 말씀으로 간주한 것이다. 그러므로 현상학적으로는 쿠란은 그리스도교의 그리스도와 같은 지위를 차지한다. 즉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은 '말씀이 책이 되었다'는 것과 상통한다. 이것을 강조하기 위해 무함마드를 움미(이교도들에게 보내진 예언자 라는 의미의 용어인데, 문맹이라는 의미로 해석)라는 칭호로 부르기도 한다. 이는 외부적 지식으로 때묻지 않음을 강조한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쿠란에 대한 존경이 무함마드의 지위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점이다.

 

하와리즈파(하라자-떠나다,이탈하다-에서 유래)

 

알리에 대항했던 집단이다. 알리가 하느님에게 의존하지 않고 인간의 술책을 받아들였다는 점에 반발했다. 행위가 없으면 신앙도 없다는 입장 고집하는 윤리지상주의자들로 선행에 의해 신앙이 커질 수 있음을 주장했다. 중죄를 범한 사람은 무슬림이 아니라고까지 주장했다.

 

순니파(순나와 자마아의 백성들, 신자들의 무리)

 

중도적 입장을 취하는 집단으로 주로 무르지아파(판단을 유예한 사람들)에 의해 견지되었다. 이 집단은 신앙심에 대한 판단은 하느님에게 맡겨야 한다고 믿었으며, 신앙은 행위를 통해 증감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상태의 문제라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중죄인이라 할지라도 불신자가 아니며, 따라서 지옥에서 영원한 형벌을 받지는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무타질라파 the Mutalzilites

 

무타질라파는 히즈라 1세기 경 하와리즈파와 무르지아파 사이에서 생성했다. 이 집단은 헬레니즘의 철학적 요소를 도입하여 정의와 인간의 이성을 사용하여 이슬람을 해석했다. 압드 알 자바르 Abd al-Jabbar(936-2035)에 의해 체계화되었는데, 중죄인의 문제와 관련해서는 중도적 입장을 취했다. 즉 중죄인은 신자도 불신자도 아니라는 것이다. 신학적 문제에서는 이성에 호소했지만, 윤리적 문제에 있어서는 카다리야파(결정하다, 카다르에서 유래)와 입장을 같이 했다. 즉 인간의 자유의지와 책임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주된 관심사는 이란으로부터 들어온 이원론적 영향 막아내는 것이었다. 특히 마니교의 침투에 저항했다. 이러한 이원론에 맞서기 위해 하느님의 유일성(타우히드) 믿음을 공식화했다. 타우히드는 하느님과 피조물 사이에는 어떤 유사성도 절대 불가함을 의미한다. 쿠란의 신인동형적 용어(예 : 하느님의 얼굴) 등은 비유적으로 해석했다.

이들은 하느님의 정의(아들)를 강조했다. 즉 "하느님은 정의롭게 행위할 수 밖에 없다. 인간에게 선을 악으로 되갚으시지 않는다. 동물조차도 이 세상에서 당한 부당함을 다른 세상에서 보상받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정의는 인간의 이성을 기준으로 했으므로 인간은 자유로운 반면, 하느님은 자신의 정의에 발목이 잡혀 자유롭지 못하다는 신학적 위험에 직면했다.

무타질라파는 움마야드 칼리프 시기 시리아, 이라크에서 출현했다. 이들은 그리이스,유대교,기독교,조로아스터교의 사상에 친숙했던 무슬림들이다. 신앙을 옹호하기 위한 합리적 논증 kalam을 수행했다. 쿠란에 나오는 알라의 "약속과 위협"에 직면했을 때 인간은 알라의 도덕적 요구에 대해서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다는 측면을 강조했다.

무타질라파는 이성을 인정했기 때문에 쿠란에 근거한 신학적 교리도 이성의 시험 거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이스 철학의 영향을 받아, 어떤 교리도 이성적 논리에 적합하지 않으면 진리일 수 없다고 확신했다. 이성은 알라의 정의에 대한 통일성을 주장하게 하며, 알라는 인자하고 정의롭고 자비로와야 한다는 내적 필연성 보여준다. 그러나 쿠란이 영원하고 창조되지 않았다는 점는 부인

했다. 무타질라파는 따뜻한 인격적 신앙을 지적 사변으로 대체했다고 평가됨

그후 무타질라파는 정치적 이유로 압바스조 칼리프 al-Mamum의 지원을 받았다. 827년 알-마뭄은 쿠란의 영원성 주장하는 이들을 이단으로 규정되었다. 특히 아흐마드 이븐 한발이 박해받았다. 그러나 20년 뒤 새로운 칼리프는 오히려 무타질라파를 이단으로 규정했다.

이성적 해석방법으로 쿠란의 신인동형론을 비판했고, 알라의 시도나 특성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것은 알라의 통일성을 해치는 것이라고 여겼다. 그리고 천국과 지옥에 대한 쿠란의 묘사도 비유적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합리적 설명방식의 중요성을 강조한 결과였다.

무타질라파는 10세기에 종말을 맞이했다. 그러나 시아파를 통해 이들의 사상 이어지고, 진보주의자들은 무타질라파의 입장을지지했다. 이들의 쇠퇴는 보수적인 순나의 옹호자들이 무타질라파 논박을 위해 합리주의적 방법을 채택했을 때 이루어졌다. 이븐 한발의 강력한 전통주의의 가르침과 아샤리를 정점으로 한 새로운 신학이론의 발전이 있었다. 아샤리는 '논리적 원칙' ilm al-kalam에 근거한 이성적 논쟁 방식은 많은 법학자들에 의해 수용되면서 확산되었다. 무타질라파는 쉬아 신학의 형성에 공헌한 반면, 순니 세계에서는 영향력이 소멸했다.

 

알-아샤리 al-Ashari의 사상

 

아불 알-하산 알-아샤리 Abul al-Hasan al-Ashari는 히즈라 후 250년 경 바그다드에서 출생했다. 그는 샤피 학파의 영향을 받기도 했고, 무타질라파의 가르침 배우며 옹호하다 40세 경 갑자기 이들과 결별했다. 그의 사상적 의의는 신학과 법학의 접목이지만, 이슬람권 전역에서 보편적으로 수용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알라의 일곱가지 신적 속성을 주장했다. 그것은 모든 삶, 모든 지식, 힘, 의지, 듣고, 보고 말하는 것은 알라의 행위라는 것이었다. 이를 인간 스스로는 할 수 없다. 인간의 모든 일의 원인은 알라이기 때문이다.

한편 그는 전통 교리에 논리적 근거를 제공했다. 내면과 외면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의 직접적 원인이 알라이기 때문에 인간으로 하여금 쿠란에 명시되어 있는대로 알라를 생각하에 결정한 것도 알라이다. 쿠란의 천국,지옥 표현도 실재에 대한 기술이라고 주장했다. 즉 천국을 믿는 사람은 실제로 옥좌에 있는 알라의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그는 "어떻게 해서 그럴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지 말고"bi-la kayf 그저 믿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알라의 모습을 피조물의 모습과 비유되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쿠란의 말은 영원하나 그 글자들은 인간이 만든 것이며 일시적인 것이다. 알라는 선과 악에 모든 책임이 있다는 관념에 대해서는 심각히 여기지 않았다. 인간의 행위는 미리 예정되어 있지만 자유롭게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는 의식을 가지고 행동하기 때문에 죄나 정의를 얻으며, 그리하여 좋건 나쁘건 미리 예정된 행위를 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그의 사상 중 하나는 '획득이론'이다. 인간의 행동은 비록 신의 뜻으로 창조된 것이지만, 그 책임은 인간이 획득한다는 주장이다.

알-아샤리는 이븐 한발의 신학이론에 토대하여 순니 교의를 확립했다. 첬제, 자구나 음성으로 표현되는 경직된 꾸란 해석에서 벗어나 그것이 담고 있는 신의 속성과 영혼의 말씀으로 꾸란을 해석했다. 이는 이성보다는 신앙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둘째, 인간의 자유의지와 숙명론과 관련하여 획득이론을 제시했다. 이는 定命 사상 개념이다. 그 외에도 중재를 위한 신학의 전형을 제시했고, 하느님은 인간적 사고의 범주를 통해서는 이해될 수 없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샤리파의 견해에 따라 신앙의 강령은 점차 딱딱해졌고, 신학적 용어도 스콜라식으로 세련되어 갔다. 이런 입장에 대해 한발리 학파와 샤피이 학파 일부가 반대했고, 말리키 학파는 신학적 논쟁을 경원시했으며, 알 모라비 왕조는 신학의 가르침을 금지하기도 했다.

 

알-마투리디 Al-Maturidi(944 사망)

 

알-마투리디는 인간의 죄는 알라의 뜻에 의해 생기지만 알라는 이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알라는 불신앙을 창조하였고, 그것을 '불특정적'으로 의도했다. 그러나 알라는 인간에게 불신앙을 명령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이교도로 하여금 신앙을 갖도록 명했지만 자기 마음대로 결정하지는 않았다. 그는 또한 인간의 자유의지는 물론 자유의지가 신의 전능과 정의와 관련되어 있는지에 대한 의문 을 제기했다. 인간의 행위가 신의 권능에서 비롯되지만, 인간의 죄악조차도 신의 즐거움이나 사랑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니라고 가르쳤다. 쿠란의 비창조설을 주장하기도 했는데, 인간의 발음은 창조된 것이지만 그 안의 내용은 창조되지 않은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것이었다. 그의 사상은 하나피 학파를 중심으로 수용되었고, 셀주크조 세력의 서진과 함께 크게 확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