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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이란 무엇인가

Joyfule 2016. 5. 4. 10:00

 

 

아래의 글은 "목회정보 2000" 사이트에서 가져온 글입니다.

이슬람이란 무엇인가

 

여러 이단파와 수피즘
이슬람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코란'이지만 마호멧이 죽은 후에는 그것만으로 교의상의 판단이 안 되는 경우가 많게 되어 그러한 때는 순나(마호멧의 언행)에 의해 보완되었다. 그리고 이 순나를 이상으로 삼는 사람들을 수니파라하여 이것이 이슬람교의 정통파로 지목되고, 이슬람교도의 대부분이 수니파로 이루어진다. 아라비아의 원시이슬람은 다른 여러 민족을 정복함에 따라 많은 종교와 사상에 부닥쳐, 이들을 받아들이거나 동화시키는 과정에서 몇 개의 이단적 유파가 생겼다. 페르시아만 연안의 뱃사람이나 장사군을 그 주력으로 하는 하리지파가 그 최초의 것으로, 7세기 중반부터 시작되었으나 현재는 오만, 동아프리카, 북아프리카 등에 약간 잔존할 뿐이다. 예언자 마호멕의 혈통은 딸 파티마와 제 4대 칼리프인 그의 조카 알리와의 사이에 태어난 하산과 후세인의 두 남아계층에 의하여 전해졌으며, 이 중에서 특히 후세인의 계열을 교주로 추대하는 시아피는 후에 이란의 종교사상을 받아들여 최초의 이단적 종파가 되었다.
 
마호멧은 '이슬람의 교리는 70개로 분열될 것이다'라고 예언하였다 하는데, 확실히 시아파는 많은 지파로 불열되어 극단파를 낳게 되고 그 가운데는 이미 이슬람교로는 간주할 수 없게 된 것까지 있다. 이와 같이 이단파는 상당한 수가 있으나 신도수는 전체의 10%에도 미달된다. 이슬람의 신비주의라고 일컫는 수피즘은 원래 원시 이슬람 사회 안에서 금욕고행을 주의로 삼는 일파를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후에 그리스 사상과 유대교, 그리스도교, 불교 등의 신비주의까지 받아들여 사상계의 일대조류로 발전하였다. 이 수피즘은 이슬람 신앙의 형식주의, 행위의 표면만을 보고 심판하는 이슬람법 등에 대한 반동으로 발전한 것이며, 이슬람교가 세계적 대종교로 발전한 것은 실은 이 수피즘의 힘입은바가 크다고 주장하는 자도 있다. 반면 이슬람 사상 속에는 그러한 사고방식을 배격하려는 자도 있다.
 
이슬람세계의 발전
 
1. 이슬람권의 확대
마호멧의 사후, 교단은 신도의 장로들 중에서 교통(敎統)의 후계자인 칼리프를 선출하였다. 그 후 아라비아 반도 밖으로 진출을 개시하여 633년에서 644년까지 시리아, 이라크, 북부메소포타이아, 아르메니아, 이란, 이집트 등을 정복하여 여러 곳에 기지도시(基地都市)를 건설하였다. 그 후에도 정복사업은 계속되어 우마이야조 시대에는 서쪽은 북아프리카의 대서양 연안까지, 다시 711년부터는 이베리아 (스페인)반도에 침입하였고, 동쪽은 중앙아시아와 인도 북서부까지 그 지배 하에 두었다. 피레네 산맥을 넘어 프랑스의 중추부까지 진출한 군은 732년 포아티에 북방의 싸움에서 패퇴하였으나, 동방에서는 751년 여름 탈라스강의 싸움에서 중국의 당나라 군을 괴멸시키고 중앙아시아의 지배권을 확보하였다.
 
아바스조의 초기 100년간은 칼리프정권의 전성기였으나 그 후 이베리아는 우마이야가의 일파에 의하여 독립하고, 이어서 모로코, 튀니스, 중앙아시아, 이란 동부, 이집트 등에도 독립정권이 출현하여 칼리프의 직할지는 점차 축소되었다. 10세기에 들어서자 921년 이후 볼가강중류의 불가르족이, 이어서 960년이래 텐산남북로의 투르크족이 다같이 대량으로 이슬람교를 받아 들였다. 그 때까지 아랍족, 이어서 이란인이 중심이었던 이슬람 세계는 이 무렵부터 투르크의 패권밑으로 옮겨지는 경향이 생겨, 10세기 말부터는 투르크계가즈나왕조의 마흐무드왕은 자주 인도에 침입하여 이 지방의 이슬람과가 확고한 기반에 놓여졌다. 한편 동아프리카에는 740년 무렵부터 이슬람교가 퍼지기 시작하여 1010년경에는 사하라 사막을 넘어 니제르 강변의 서수단 지방에 있는 흑인왕국에까지 이슬람의 물결이 미쳤다.
 
1071년 아르메니아의 만지케르트 싸움에서 셀주크, 투르크군은 비찬틴군을 격파하였다. 이때부터 서아시아의 이슬람과, 투르크화가 시작되었고, 그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난 것이 11세기 말에서 13세기 말까지 거의 2세기에 걸친 십자군운동이다. 한편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그리스도 교도의 역정복이 진행되어 1493년에는 무어인의 최후의 거점인 그라나다가 함락되어 아침내 이슬람은 북아프리카로 후퇴하게 되었다. 이와는 달리 셀주크조와 교체된 오스만조는 발칸 반도로 진출하여 1453년에는 콘스탄티노플을 공략 비잔틴제국을 멸망시켰다. 또 인도에 세력을 부식한 이슬람교도는 이 곳을 기지로 하여 말레이, 인도네시아, 필리핀 방면의 포교를 행하여 동남아시아의 이슬람화는 15세기에서 16세기 사이에 광범한 지역을 차지하게 되었다.
 
현재의 세력
현재의 이슬람교도수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세계 인구의 약 25%인 10억 전후라고 유엔통계조사국에서 밝힌 바 있다. 지역적으로는 북아프리카, 아라비아반도와 이란에 이른 소위 중동지역과 동부소련, 터키, 아프가니스단, 파키스탄서부, 중국, 인도에 이르는 동남아시아 지역에 주로 분포하고 있으며 기타 한국, 일본 등을 비롯한 세계 곳곳에 분포되어 있다. 예를 들면 남,북미지역과 유럽지역에도 오랜 이슬람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며 수백만의 무슬림들이 있다. 특히 독일과 프랑수 지역에서의 이슬람 문화, 역사, 종교학에 관한 연구는 그 역사도 오래거니와 또한 수준에 있어서도 높다.
 
한국에서의 전래와 현황
불교와 그리스도교 문화 속에서 살아온 한국민에게 생소한 이슬람교가 그 두터운 벽을 뚫고 한국에 전래된 것은 1955년이다. 이슬람교의 한국 전파는 1955년 9월, 6.25동란 때 유엔군으로 참전하였던 터키 부대의 압둘 라흐만 중군이맘(성직자)과 주베르코취 종군이맘에게 한국 포교를 위하여 지도와 협조를 요청한 고 김진규와 윤두영에 의하여 포교가 시작되었다. 서울시 동대문구 이문동에서 한국 이슬람교 협회를 발족, 초대회장 김진규, 부회장 겸 사무국장 윤두영과 신도 70여명으로 시작되었다. 초창기 10여년 간에 포교운영의 고난을 극복하고 65년 한국 이슬람교 중앙연합회로 재발족, 67년 3월 재단법인 한국 이슬람교로 인가되어 신도 7,500의 교세를 갖게 되었다.
 
76년5월 현재의 용산구 한남동에 중앙성원을 건립하고 (사우디 아라비아, 기타 6개국의 원조로) 80년 항도 부산에 제2 성원, 81년 경기도 광주에 제 3서원을 건립하였다. 또한 해외교포를 위하여 사우디 아라비아, 쿠웨이트, 인도네시아에 지회가 설립되어 국내의 신도수 약 32,000의 교세를 가지게 되었다. 80년 5월 최규하 대통령의 사우디 아라비아 방문시 고 칼리드왕과의 공동성명을 통해 한국 이슬람 대학교 설립 공사비 일체의 제공을 확약 받았으며 경기도 용인에 13만평의 대지를 확보하고 기공식을 가졌다. 한국 이슬람교는 70년대의 중동 붐을 타고 두드러지게 교세가 확장되어 근래에 매년 중동 각국에서 무슬림이 되어 귀국한 1,700여 명의 기능근로자 신도들을 핵으로 삼아 신도 배가 운동을 펴고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의 이슬람교는 한국인의 습성 및 기호와의 차이점을 비롯하여 예배의식의 용어 및 교리의 토착화 등 숱한 난제를 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