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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과 4.19

Joyfule 2020. 6. 1. 22:06




      이승만과 4.19 

    

건국 대통령 이승만은 86세의 고령으로 정치 일선에서의 은퇴를 고려하고 있었으나, 철저한 반공.반일주의자인 이승만이 재 집권하여 한.일 관계 문제를 매듭짖기를 원하던 각료들의 권유로 출마를 결심하고 치뤄진 선거가 제4대 정.부통령 선거로, 이 선거의 부정이 촉발되어 발발한 것이 이른바 4.19의거다.

 

제4대 정·부통령 선거는 자유당의 이승만과 민주당의 조병옥이 대통령 후보로, 부통령 후보는 자유당의 이기붕과 민주당의 장면의 대결이었다. 그러나 1960년 1월 29일 신병 치료차 미국으로 떠난 민주당 대통령 후보인 조병옥이 2월 15일 급서함으로써 이승만의 당선이 확실시되자, 선거의 초점은 고령인 이승만 대통령 유고시에 승계권을 갖는 부통령선거에 집중되어 당시 내무부 장관인 최인규와 치안국장인 이강학이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해 3.15 부정 선거를 총지휘 한 것이 4.19 의거로 이어진 것이다.

 

그동안 4.19의거는 국내적 요인인 자유당 정권의 재집권을 위한 3.15 선거 부정으로 촉발된 것으로만 알려져 있지만, 대외적으로는 한국이 일본의 영향력 하에 있기를 강력히 원하던 미국과 일본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져 일본에 대해 강경한 정책을 펼치던 이승만을 하야시키기 위한 미국과 일본의 개입이 있었고, 철저한 반공주의 정책을 견지한 자유당 정권으로 말미암아 지하에 잠적해 있던 남로당 잔당들의 불순한 개입이 혼재된 의거였다.

 

친북반역세력들은 이승만이 미국의 지원으로 대한민국을 건국했기 때문에 이승만은 미국의 앞잡이라고 왜곡 주장하고 있으나, 미국은 단 한번도 이승만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미국에서 해방을 맞은 이승만은 곧 귀국을 하려고 했으나 미 국무성은 이승만의 귀국을 허락하지 않아 두 달이 지나서야 고국 땅을 밟을 수 있었다. 한마디로 이승만은 미국의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으로 이승만 주도하의 건국과 이승만의 집권을 달가와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승만의 대일 강경책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혹자는 이승만의 대일 강경책을 맹목적 반일주의자라거나 늙은이의 옹고집이라고 혹평을 하지만 친일파에 대해 관용적 태도를 취하면서도 일본에 대해서는 거리를 유지하는 정책을 폈다. 이를 두고 친북반역세력들은 이승만이 친일파를 등용하여 건국을 했다하여 건국세력을 친일파로 매도하고 있으나 어불성설임은 이미 밝혀졌다.

 

이승만이 일본문제와 관련해 1948년부터 보여준 몇가지 발언을 보자.

 

그는 1949년 1월8일 대마도 반환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했는데 이는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에 대한 대응책의 성격이 강했다.

 

5월20일에는 대일배상요구를 반드시 관철해야 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면서도 10월28일 대일강화조약이 이뤄지기 전까지 임시통상협정을 체결할 용의가 있다는 언명을 했다. 이는 일본과의 급작스런 관계 단절로 생겨난 생필품 부족현상을 풀어보려는 시도였다.

 

1950년 2월14일부터 16일까지 이승만은 맥아더의 초청으로 일본을 방문하고 이 자리에서 아시아의 반공을 위해 한일간의 협조가 필요하다는 원론적인 입장을 개진하기도 하며 강온 양면책을 구사했던 것이다.

 

우리의 역량이 어느 정도 일본과 경쟁가능한 수준에 오를 때까지는 「가능한 한」 일본과 거리를 둔다는 것이 집권기간 동안 유지된 이승만의 일본관이었다고 할 수 있다.

 

동시에 식민지를 겪은 국민들에게 남아 있을지도 모르는 소위 「식민지 근성」이 뿌리뽑힐 때까지는 일본과의 외교 정상화는 어렵다는 원칙도 깔려 있었다.

 

미국은 이승만을 하야 시키기 위해 경무대 내에 CIA 프락치를 심어 놓아 경무대로들어가는 정보를 차단하여 경무대를 고립시키고, 왜곡된 정보를 제공하기도 하면서 3.15 부정 선거로 국내가 어수선하자 주한 미대사인 매카나기를 통해 영향력을 행사한 외에 미국 정부와 미국 언론 등을 통해 지지 성명을 발표하는 방법으로 간접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등 결국 4.19의 배후에는 미국과 일본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져 암묵적인 지지와 영향력이 작용했던 것이다.

 

그 단적인 예로 1960년 4월 25일에는 전국 27개 대학의 교수 300여명으로 구성된 교수단 시위가 있었고, 이들 교수단 시위대 핵심 인물인 성균관대 총장 이정주, 고려대 법대 학장 윤세창, 동국대 김영달 교수 등은 4.19 이전에 이미 美 국부무의 초청으로 미국을 방문했던 자들로, 이들이 교수 시위단의 핵심으로 활동했다는 사실로 보아 미국의 영향력이 작용됐다고 유추할 수 있다.

 

일본의 우메하라 교수는 한국 방문시 4.19 묘지를 방문하여 둘러본 후 4.19묘지의 웅장함과 건국 대통령 이승만의 묘소를 비교하며 외국과 손잡고 자기나라 대통령을 하야시킨 나라는 대한민국 밖에는 없다는 여운을 남기는 발언을 했다고 한다.

 

그 밖에도  4.19의거에 이승만 박사를 하야시키기 위한 모종의 암투가 작용했다는 증거로는 4.19 이후 일본 언론의 시사만평인 만화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고 한다. 그 만평은 [안도의 숨을 쉬는 일본] 이라는 제하의 만화로 나무 위에는 원숭이(일본)가 있고 아이젠하워가 회초리를 가지고 호랑이(이승만)를 때려잡는 만화라고 한다.

 

결국 이승만의 일본 경제에 대한 예속을 강력히 거부한 것이 정치적 하야를 가져오게 한 외적인 요인이 되었고, 여러가지 국내외적 요인이 작용하여 4.19사태를 맞아 무력진압을 막고 스스로 책임을 지고 하야를 함으로써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위한 일대 영단(英斷)을 내리게 된 것이다.

 

4월 23일 이승만 대통령이 4.19 부상 학생들을 찾아 서울대학병원 병실에 들어섰을때 부상 학생들은 대통령을 할아버지라고 부르며 손을 잡고 눈물을 흘려 병실이 온통 울음바다가 되었으며, 병원에서 돌아온 이승만은 침통한 음성으로 "내가 맞아야 할 총알을 우리 소중한 애들이 맞았어...., 이 바보같은 늙은것이 맞아야 할 그 총알을 말이야" 하며 비통해 했다고 한다.

 

그리고는 26일 국민이 원한다면 물러나겠다는 말을 남기고 하야 성명을 발표한 이승만은 5월 29일 건강을 위해 전지요양이 필요하다는 의사의 제안에, 하와이 동지회장인 최백렬씨의 이승만 대통령의 휴양에 필요한 경비를 부담해 드릴테니 하와이를 다녀가시라는 초청 전보를 받고 2주일 내지 한달 예정의 하와이 여정에 올랐으나 결국, 1964년 7월 19일 그토록 사랑하던 고국을 그리며 하와이에서 별세하여 7월 27일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이승만이 4.19 의거로 하야하고 하와이로 망명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는 극명한 역사 왜곡이다. 이제라도 우리는 왜곡되고 뒤틀린 건국대통령의 업적과 건국사를 새롭게 조명하고 알아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