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성을 위한 ━━/에세이

지난 것들은 아름답다(1) - 다듬이 소리 - 김동삼

Joyfule 2012. 9. 24. 09:08

  지난 것들은 아름답다(1) - 다듬이 소리 - 김동삼


아버지께서는 늘 한복을 즐겨 입으신다. 2년 전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후 며느리와 함께 생활하시게 되었을 때, 홀시아버지가 며느리한테 천대 받으실까 노심초사한 누님들은 한복보다 개량한복이 편하니 개량한복을 입으시라고 서너벌을 사다 주셨다.

처음에는 “그래 편타!”하시며 잘 입으시더니 시간이 흐르면서 아예 쳐다 보지도 않으신다. 예전부터 그 옷에 익숙해져 일까 자꾸 허전하다고 하신다. 어머니의 한땀 한땀 손수 바느질한 따스한 손길이 담긴 옷 이기에 그렇게 느끼셨으리라.

내가 어린 시절, 어머니께서는 시부모와 친정아버지까지 모시며 살았는데 그 분들의 바지저고리와 두루마기며 평상으로 입으시던 한복들을 세탁하면, 풀을 먹이고 다듬이 질로 손질하여 드리는 것이 일상이었다. 다듬이의 면상은 언제 만져보아도 내 얼굴보다 매끈했고, 작은 덩치에도 이불 홑청 두서너 채는 끌어 안는 넉넉함이 있었고, 그와 죽이 맞는 한 쌍의 방망이는 사랑과 기다림과 한을 간직한 채 잡는 이의 감정에 따라 저마다 다른 음질로 밤의 적막을 흔들곤 했다.

멀리 도랑 건너 집에서 들리는 나직한 다듬이 소리는 이따금 부는 바람에 끊어 질 듯 이어지며 귀를 곤두 세우게 했는데, 개짓는 소리와도 어울려 귀에 익은 협주곡으로 들려왔기 때문이리라. 저녁상 물린 뒤 눈이 가불가불 할 때 들리던 다듬이 소리는 더할 나위 없는 자장가가 되기도 했고...... 옷을 손질 할때는 풀 먹인 옷감들을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둘이서 잡고 당겨 구김을 펴고, 눈 어림으로 적당히 접은 옷감들을 다시 보자기에 싸서 밟아펴고, 다듬이 위에 얹어 방망이 질을 하는 것이 순서인데, 한 밤 여닫이문에 비친 그런 정
겨운 그림자는 아직도 내 가슴에 한 폭의 동양화로 각인되어 있다.

다듬이 방망이 질은 처음에는 느리고 가볍게 나중에는 빠르고 힘차게, 또는 빨래의 질에 따라 강하게 약하게 “토닥! 토닥!” 리듬을 탔고, 그 소리는 방망이질을 하는 아낙의 심정에 따라 때로는 정겨웁게, 때로는 쓸쓸하게 듣는 이의 가슴에 와 닿았다.

다듬이 소리. 참으로 오랜만에 입에 올려보는 소리이다. 그 소리에는 친정을 그리는 며느리의 그리움도 배어있고, 멀리 출타한 지아비를 기다리는 마음도 배어있으며, 무엇보다도 웃 어른 공경의 정성이 담겨있는 소리기에 더욱 정감이 가는지도 모르겠다.

어린 시절 늦은 하교길, 집으로 향하는 시오리 길은 신작로라고는 하지만 해가 떨어지면 트럭 한 대 다니지 않는 길이었다. 시내에서 집까지의 길가에는 누구가 목매달아 죽었다는 성황당 무시무시한 숲을 두 개나 지나야 했고, 흰 소복에 머리를 풀어 헤친 처녀귀신이 나타난다는 쌍고개 모퉁이도 지나야 했다. 다행히 늦게까지 저자를 보고 오는 동네 아줌마라도 있으면 그 꽁무니를 뛰는 걸음으로 쫓아가며 두려움의 장소를 외면할 수 있었지만, 혼자서 지나야하는 날은 저만치 눈에 들어오는 숲을 보며 혹시 뒤에 구세주가 오지나 않을까 하고 은근히 민그적 거리다 그 숲까지 다다랐고, 거기서부터는 달음박질이 시작되었다.

등 뒤에 매달린 책보 속의 연필통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고 느낄 때는 머리 카락 조차 쭈뼛 솟기도 했고, 더구나 길 양옆의 미루나무가 갑자기 커다란 귀신으로 둔갑하여 앞을 가로막을 것 같은 상상을 하기도 했다. 한참 그렇게 정신 없이 달리다 땀이 흥건히 밸 때쯤이면, 마을 입구에 다다랐는데 첫번째 집에서 새어나오는 희미한 남포 불빛을 보며 어머니를 만난 듯한 반가움이 느껴지고, 어느 집에선가 “토닥”거리는 다듬이 소리는 콩닥거리던 가슴을진정시키기에 충분했다. 조금 전까지 등 뒤를 잡아당기는 것 같던 무시무시한 성황당 숲도, 앞을 가로막을 것 같았던 미류나무 귀신들도 저 엷은 불빛에 실려있는 토종의 다듬이 소리에 소멸되고 마는 것이었다.

다듬이 소리는 액을 쫓는 부적이었을까? 참으로 엉뚱한 생각이다. 분명 그럴 것이다라고 느끼게 된 것은 늦은 밤 소피를 보러 가야하지만 뒷간은 집에서 가장 먼 곳에 위치했고 안은 어두웠다. 봉당에서 마당으로 갈겨도 되겠지만 이튿날 꾸중들을 것을 각오해야했기에 탈 없기는 삽작문 밖 두엄 더미까지 가야했는데, 마침 다듬이 소리라도 들린다면 얼마나 큰 힘이 되었던가. 콩콩거리는 심장의 소리와 멀리서 들려오는 다듬이 소리는 어쩌면 두려움에 뛰는 심장의 박동과는 다른 안정된 박자로 다가왔기에 위안이 되었을까?

다듬이 소리. 아낙의 그리움과 기다림과 외로움을 함께 지닌 생활속의 리듬. 내 심장의 박동만큼이나 살아있음을 느끼게하는 그런 소리였다.
이제 한 세대의 어른들이 졸업을 하고 나면 손 끝에 서툴러 울려보지도 못할 소리가 되어 버릴 것 같고, 아스라이 잡힐 듯한 기억 저편으로 달아나는 소리가 되어버린 것 같아 더욱 그리워 지는 소리이다.

어머니의 손길이 배어있는 한복을 가까이 하시는 아버지를 뵈며, 그 옛날 다듬이 소리가 그려있는 내 가슴속의 여닫이 문에서 쿵덕거리는 심장의 소리, 다듬이 소리를 들어 본다.

※ 월간 문학세계 5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