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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성경 핵심 공부(창세기에서 계시록까지) (56과) 1

Joyfule 2008. 12. 7. 00:24

인터넷 성경 핵심 공부(창세기에서 계시록까지) (56과) 1

 룻기(4): 룻과 다윗(4장)


룻과 엘리멜렉

룻과 나오미

룻과 보아스

룻과 다윗

타락과 회개

구원(1)

구원(2)

회복과 축복

1장

2장

3장

4장


1. 두 지평-기업 무를 자(룻 4:1-6)

'고엘'찾기
4막으로 넘어오면서 룻기는 고엘언약을 지킬 자격이 있는 두 사람을 소개한다.  
그 기업 무를 자'로 소개되는 익명(匿名)의 1순위자 '아무개'와 보아스가 바로 이들이다. 과연 이 두 사람 가운데 누가 룻을 통해 나오미의 꺼져가는 가정을 다시 회복하게 될 것인가? 이것이 4장 서두에 흐르는 팽팽한 긴장이다.  먼저 고엘제도와 관련된 구약의 언약을 다시 한번 기억해 보자.  레위기 25장으로 간다.

"토지를 영영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라 너희는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너희 기업의 온 땅에서 그 토지 무르기를 허락할지니, 만일 너희 형제가 가난하여 그 기업 얼마를 팔았으면 그 근족이 와서 동족의 판 것을 무를 것이요, 만일 그것을 무를 사람이 없고 자기가 부요하게 되어 무를 힘이 있거든, 그 판 해를 계수하여 그 남은 값을 산 자에게 주고 그 기업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그러나 자기가 무를 힘이 없으면 그 판 것이 희년이 이르기까지 산 자의 손에 있다가 희년에 미쳐 돌아올지니 그가 곧 그 기업으로 돌아갈 것이니라."(레25:23-28)


그 기업 무를 자
이 말씀에 의거해서 보아스보다 '더 가까운 친족'(3:12)인 제1순위자 '아무개'가 갑자기 마지막 장에서 등장한다.  단역 출연자인데 진행되는 방향에 따라서는 주연 버금가는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  

(1) 그는 단숨에 축복의 문턱에 서게 된다.

이미 3장에서 그의 출현이 암시되었다.  드디어 그는 당당히 기업 무를 자로 무대에 등장한다.  그에게는 율법이 부여한 그러한 권리가 있었다.  그는 보아스의 설명을 듣고서(3-4b) "내가 무르리라"고 말한다.  우리는 여기서 긴장하지 않을 수 없다.  성문에 앉아 이 말을 듣고 있는 보아스에 마음은 어떠했을까?  그런데 이어지는 5절의 부연 설명, 즉 옵션을 듣고서는 그만 생각을 바꾸고 만다.  왜 그랬는가?    

"내가 무르리라"는 말이 나중에 바뀐 것은 자신이 입을 '손해'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손해나지 않을 것이라 판단했던 것 같다.  그는 계산이 빨랐다.  엘리멜렉은 이미 죽었고, 따라서 이제 나이든 나오미마저 죽으면 엘리멜렉의 소유지가 모두 자기의 것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대단히 이해타산(利害打算)에 밝았다.  그런데 이방의 땅 모압 여인 룻을 책임져야 했고, 룻에게 자식이라도 생긴다면 자신은 엘레멜렉 → 나오미 → 룻 → 자식으로 이어지는 사람들을 위해 자기의 재산을 허비하는 멍청한 사람일 것이라는 생각까지 하게 되자 전혀 이득이 없는 거래라고 판단한 것이다.  

나오미와 룻 따위는 처음부터 생각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의 문제나 형편은 전혀 고려조차 않았고, 오직 자신에게 이익이 되느냐, 아니면 손해가 되느냐 하는 것만을 생각했다.  율법이 그에게 이러한 특권을 값없이 주었으나, 그는 말씀을 버리고 오직 손해와 이익이라는 경제법칙만을 따라 행동한다.  말씀은 안중에 없다.  말씀으로 사건을 이해하고 해석하고 적용하는 일에 철저히 실패한다.  그 결과 그는 찾아온 기회를 버리고 만다.  그는 자기 것을 유지하기에 바빴다.  이기적이며, 자기중심적인 사람이다.  

그는 당장에는 손해가 아닌 이익처럼 보이는 편을 택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수준을 넘지 못한다.  사람들은 당장 좋아 보이는 것, 이익이 되는 편,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처럼 보이는 쪽으로 줄을 선다.  그러나 더 자세히 살펴보자.  그러니까 '아무개'씨는 룻의 엑스트라가 될지 모른다는 점 때문에 '고엘찾기'의 주연이 되는 축복을 알지 못했다.  자승자박(自繩自縛), 그러니까 자기 수에 자기가 넘어간 셈이다.  

(2) 영적 거듭남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이와같다.

자기가 펄펄 살아있는 사람은 시작된 하나님의 복을 보지도, 알지도 못한다.  모든 판단의 중심에는 오직 '자신'이 서 있다.  그는 자기가 얻을 수 있는 몫의 복을 다른 사람을 통해서 듣고, 알게 된다.  더욱 한심한 것은 굴러온 복을 거부해 버리고 마는 영적 무지에 있다.  지금 무엇이 '복'인지, 그리고 무엇이 '화'인지, 무엇이 손해이며 이득인지 분간을 못하며 살아가고 있다.

복을 발로 저 멀리 차 버리며 사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지금 서 있는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영적으로 득이 되는 자리인지, 아니면 큰 화가 임하는 자리인지 빨리 주파수를 맞추어야 한다. 내가 이 일을 이렇게 결정하고 행동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바른 것인지에 대한 최소한의 통찰과 점검이 필요하다.  어물거릴 여유가 없다. 지금도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축복의 기회들은 쉼없이 내 곁을 지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신 생각에 '아니올시다'라고 그러면서 믿지 못하니까 그의 믿음대로 '아니올시다'로 끝나는 것이다.

노아시대 사람들을 보라.  120년 동안이나 하나님이 방주를 실물로 보여 주시면서 -마치 룻을 베들레헴 사람들 앞에 세우시고 계신 것처럼- 말씀하셨다.  거대한 방주가 그들 앞에 준비되어 있다.  이제 구원의 방주에 오르기만 하면 되는데 사람들은 어떻게 했나요?  방주의 문이 닫히는 그 순간까지 그렇게 하지 않았다(마24:37-39).  '아무여'가 그런 사람이다.  룻이라는 축복의 통로가 있는데 그 축복을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한다.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볼까요?  교회가 있고, 구역이 있고, 봉사할 곳이 있고, 헌신할 대상이 있는데 현대 기업 무를 자인 많은 사람들 역시 '아무개'씨처럼 축복의 문턱에서 그만 뒤돌아 서 버린다.  여러분 생각에는 '아무개'와 '보아스' 중에 누가 똑똑하다고 느껴지나요?  그에게는 상식과 지식은 있었는지 몰라도 하나님을 아는, 율법의 도를 알고 믿는 영적 지혜는 없었다.  이것이 현대의 많은 '아무개'들의 결정적인 문제다.

'아무여'씨는 '신분'은 기업 무를 제1순위자다.  그러나 그는 어떻게 이런 사람이 결승전에 올라온 최종 후보가 될 수 있는지 어리둘절 할 정도로 그 '수준'은 전혀 아니다.  신분과 수준 사이의 부조화가 문제인 것이다.  신분은 그리스도인인데 수준이 세상 사람과 동일한 사람, 그래서 자기에게 이익이 될 것 같으면 말씀을 붙잡고, 손해 볼 것 같으면 가차없이 말씀의 끈을 놓아 버리는 사람, 그가 바로 '아무개'씨의 후예들이 아닌가?  하나님마저도 자기 편리와 목적을 위해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간 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