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성경 핵심 공부 (창세기에서 계시록까지) (161과)1. |
말라기(1): 제사장의 타락 (1:1-14) |
1-1. 말라기와 시대적 배경 "여호와께서 말라기로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 경고라(1)."
선지자들은 계속해서 메시아의 오심을 예고해 왔다. 말라기는 이러한 선지자들 중에 가장 마지막에 예언한 선지자였다. 말라기의 개인 경력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다. 어떤 사람은 "말라기"란 말이 "나의 사자"라는 뜻이며, 고유 명사가 아니라고 말한다. 일반적으로 자유주의 비평가들은 이 책이 원래 익명으로 기록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히브리어나 헬라어에서 "사자"라는 말은 "천사"라는 말과 같다. 그러므로 몇 몇 교부들은 말라기를 성육신 한 천사로 간주하기도 했다.
이 책은 특히 제사장에 대해서 두드러지게 언급하고 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은 말라기가 제사장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또 요나단의 아람어 탈굼은 에스라가 말라기를 썼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박국과 오바댜처럼 말라기도 그 혈통과 출생지에 대해서 알려진 바가 없다. 유대 전승은 말라기가(학개, 스가랴와 같이) 대회당에 속한 회원이었다고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구약 성경에서 익명으로 전달된 선지서는 없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면 우리는 말라기가 바로 이 책을 기록한 사람이었으며, 또한 이스라엘의 마지막 선지자였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 선지자는 느헤미야가 다스리던 시기에 활동했다. 그는 분명히 포로기가 끝난 후에 활동했다. 당시에는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사람들로 인해 성전이 재건되었으며, 제사장들을 통해 제사를 드릴 수 있었다. 그러나 정작 이스라엘 백성들은 영적으로 침체해 있었다. 말라기는 학개와 스가랴보다 약 1세기 정도 지난 후에 활동을 했다. 학개와 스가랴가 스룹바벨과 여호수아를 격려하고 인도했던 것처럼, 말라기도 느헤미야를 격려하고 인도했다. 이러한 점에서 보면 그가 활동했던 시기는 주전 5세기 말 경으로 볼 수 있다. 말라기의 메시지는 대부분 죄의 선고와 책망이었다.
그 당시에 나타난 백성들의 정신은 후일 바리새주의나 사두개 종파로 발전되었다. 그 당시 이스라엘의 도덕적, 영적 상태는 오늘날 기독교의 도덕적, 영적 상태와 같았다. 여기에는 바벨론 포로생활로부터 돌아온 남은 자들의 영적 생활이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들은 자기들을 향해 나타난 하나님의 크신 사랑에 대해 무감각했다. 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뜻에서 얼마나 벗어나 있는 지 알지 못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았으며 하나님을 멸시하기까지 했다. 그들은 영적 인식력이 부족해서 자기들의 행위가 지적을 받을 때에도, 자기들이 왜 책망을 받아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기들을 책망하는 선지자들에게 다시 그 말의 의미를 묻고 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2),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무케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시랑에게 붙였느니라(3). 에돔은 말하기를 우리가 무너뜨림을 당하였으나 황폐된 곳을 다시 쌓으리라 하거니와, 나 만군의 여호와는 이르노라! 그들은 쌓을찌라도 나는 헐리라. 사람들이 그들을 일컬어 악한 지경이라 할 것이요, 여호와의 영영한 진노를 받은 백성이라 할 것이며(4), 너희는 목도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지경 밖에서 크시다 하리라(5)." 이 예언의 표제는 하나님의 경고이다. 이 말은 이 메시지가 격래나 위로를 위한 것이 아니라 책망을 위한 것임을 보여준다. "경고"라는 말은 이 구절과 (슥 9:1, 12:1)에서 사용되고 있다. 말라기는 이스라엘, 즉 포로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12지파 모두에게 이 메시지를 선포하고 있다. 이 예언은 하나님께서 야곱을 사랑하셨다는 영광스럽고 즐거운 사실을 지적함으로 시작하고 있다. 구약 성경의 마지막 예언이며, 거룩한 말씀의 마지막 페이지인 말라기서에서 하나님은 이라엘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지속적으로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선택하신 것은 야곱의 분에 넘치는 일이었다.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사람들을 선택하셨다는 교리는 변덕스럽거나 독단적이 아니다. 또한 하나님의 선택이 인간의 책임을 감소시키는 것도 아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의 선언에 대해서 이스라엘은 경건하지 못한 태도로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느냐?"고 물었다. 이스라엘의 모든 죄악의 뿌리는 하나님의 사랑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 죄에 물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무한하신 인내로서 에서보다 야곱을 더사랑하셨다고 반복해서 말씀하셨다. 야곱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대조를 이루는 것은 에서에 대한 하나님의 미움이다. 많은 해석자들은 이 책에 사용된 "미워한다"는 말을 비교급으로 보고 있으며, 이러한 예로 (창 29:30-31, 신 21:15-16, 잠 13:24, 마 6:24, 10:37, 눅 14:26)을 지적하고 있다. 하나님은 피조물을 책망하기 위해서 주권을 행사하지 않으신다. 에서가 계속해서 하나님을 대적해 왔기 때문에, 에서에 대한 미움은 타당한 것이었다. 이것은 구약 성경의 끝에 언급되어 있다.
1:4에는 책망이 포함되어 있지 않으며, 이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것도 아니다, 에서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를 드러내기 위해서 선택된 예는 산들이 황폐해지고 그 산업이 황폐케 되어서 시랑이 거하는 장소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은 이 구절을 나바티안이 에돔을 정복한 것이나, 바사와 애굽이 전쟁한 일, 그리고 바벨론에 의한 예루살렘의 멸망으로 이해하고 있다. 주전 586년 예루살렘 성이 함락된 지 5년 후에 갈대아인들이 에돔을 침범했다. (사 13:22)과 같이 "황무지'와 병행하기 위해서는 이사야 13:22에서 처럼 "황무지"와 병행하기 위해서는 "시랑"으로 번역된 말을 "거처"로 변혁할 수 없다. 이러한 번역은 이사야서의 구절에서 그 의미를 잃게 되는데, 이는 '거처"라는 말의 어원이 좀 복잡하기 때문이다.
에서가 교만하게 황폐해진 곳을 재건한다고 해도 하나님은 그들이 건축한 모든 것을 엎어버릴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이로 인해 그 땅을 재건하려는 모든 실행은 모두 실패하게 될 것이다. 1:4에서 하나님은 에돔이 그 지위를 되찾는 것을 결코 허락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전에 에돔의 지경, 즉 에돔의 땅이라고 불리웠던 곳을 사악한 지경이라고 불리우게 될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에돔의 황폐화된 상태가 죄 때문임을 알게 될 것이다. 선지자 말라기가 에돔의 이름을 완전히 없애는 일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고 간주할 필요는 없다. 에돔의 쇠퇴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을 나타내는 또 하나의 증거가 될 것이다. 그 때에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땅을 통치하신다는 사실이 진실로 은혜스러운 것임을 증거하게 될 것이다. 그때에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위대하심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나타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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