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5): 분열왕국 이야기(2)(12-17장)
인터넷 성경 핵심 공부 (창세기에서 계시록까지) (68과)4
2. 남북 평화 시기의 남왕국 유다(여호사밧-아달랴)
2-1. 여호사밧(주전 870-845, 왕상 22:41-50, 대하 17-20장): 경건함과 잘못된 화해정책
가. 종교 개혁 운동
여호사밧은 아사의 뒤를 이어 25년간 나라를 통치하였다. 그는 왕이 된 처음부터 부왕 아사가 시작한 개혁운동을 계속하였다. 그는 경건한 인물로서 전심으로 여호와의 도를 행하려고 하였다.(대하 17:6, 19:3) 그는 산당과 아세라 목상을 제하고(대하 17:6) 또 부왕이 미처 계속하지 못한 "남색하는 자"를 붸아 내었다(왕상 22:46). 그는 레위 사람들과 제사장들을 뽑고 또 방백들을 뽑아 각 성읍을 순회하면서 백성들에게 율법책을 가르치게 하였다(대하17:7-9).
나. 군대 조직과 전쟁에서의 승리
여호사밧의 군대는 5개의 군단으로 조직되어 있었는데, 유다 지파에서 3개의 군단, 베냐민에서 2개의 군단이 조직되어 그 군대의 수는 100만이 넘었다. 그는 북방 이스라엘을 방비하기 위하여 성읍들을 더욱 견고히 하였으며, 각 성읍마다 군대를 주둔시켰고, 에브라임 성읍들에 영문을 두었다. 여호사밧은 모압과 암몬과 에돔의 연합군이 쳐들어왔을 때에 온 백성에게 금식을 선포하고 함께 기도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아하시엘을 통하여 이스라엘이 승리할 것을 가르쳐 주셨다. 왕은 특별히 노래하는 자를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하여 찬송을 부르게 하였다. 이 전쟁은 대승리로 끝이 나게 되어 그들은 전리품을 나르는데 3일이 걸렸다. 여호사밧은 그밖에도 국고성을 건축하는 등의 국방을 튼튼히 하였다. 이처럼 나라가 튼튼해지고 견고해 졌을 때에 그는 북방 이스라엘과의 전쟁을 피하기 위해 이스라엘과 화친을 맺었다.
다. 이스라엘과의 동맹
여호사밧은 이스라엘과 화친을 이루기 위하여 아합 왕의 딸 아달랴를 자부로 맞았다.(왕하 8:18) 이로 인하여 그의 아들 여호람은 아달랴로부터 영향을 받아 종교적으로 크게 부패해졌다.(대하 21:6) 여호사밧은 이스라엘과 합작하여 에시온게벨에서 이스라엘과 공동으로 배를 짓고 다시스와의 무역을 통하여 오빌의 금을 가져오려고 하였으나, 선지자 엘리에셀의 예언대로 그 배가 파선함으로 실패하고 말았다.(왕상 9:26-28) 여호사밧은 이스라엘과 군사 동맹을 맺고, 아합의 요청을 받아 아람의 벤하닷과의 전쟁에 참여하였다가 길르앗 라못에서 아합은 전사하였고, 그는 구사일생으로 목숨만 건지게 되었다.(왕상 22:29-33, 대하 18:29-34) 그러나 그 후에 그는 또다시 아합의 아들 여호람의 청원을 따라 모압과의 전쟁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그때에 그들은 7일동안 물을 얻지 못하여 군사와 가축이 다 죽게 되었다. 그러나 여호사밧이 엘리사에게 도움을 요청하여 모압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왕하 3:15-27). 그러나 선지자는 여호사밧이 이스라엘과 함께 참전하는 일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여 책망하였다.(대하 19:2)
2-2. 여호람(주전 848-841년. 왕하 8:16-24, 대하 21장)
아달랴의 섭정. 여호사밧의 뒤를 이은 여호람 왕의 유다 통치의 8년간은 비극의 연속이었다. 그는 아사 왕이나 여호사밧을 따르지 않고 오히려 아합 왕의 뒤를 따랐는 데, 그것은 바로 그 아내인 아달랴 때문이었다(대하 21:6, 왕하 8:18). 만일 하나님께서 다윗의 언약을 기억하지 않으셨다면 그는 완전히 멸망당했을 것이다.(대하 21:7) 그는 왕이 된 후에 아달랴를 반대하는 자기 형제들을 모두 죽였으며, 이스라엘과 같이 우상종교 정책을 썼다. 엘리야는 그의 가족들과 모든 재물을 빼앗길 것이며, 그의 창자에 중병이 들어 창자가 빠져 나오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대하 22:11-15) 이 예언은 문자 그대로 이루어졌다. 블레셋과 아라비아가 군대를 일으켜 유다를 쳐서 왕궁의 모든 재물과 아들들과 아내를 탈취하였으며, 오직 여호아하스만이 남고 여호람 자신은 예언대로 중병이 들어 2년 후에 죽었다(대하 21:16-20). 여호람 통치 기간 중에 국세는 심히 약해져서 블레셋과 아라비아가 유다를 침략하였으며, 에돔도 유다를 배반하여 독립하였고, 립나도 유다를 배반하여 그 수하에서 벗어났다.(대하 21:8-9, 왕하 8:20-22)
2-3. 아하시야(주전 841, 왕하 8:25-29, 9:27-29, 대하 22:1-9): 아달랴의 섭정-
블레셋과 아라비아의 침공으로 겨우 여호아하스만이 살아 남아 여호람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으나(왕하 21:17), 그는 왕이 된지 1년도 못되어 죽었다. 그는 왕위에 있는 동안 어머니인 아달랴의 교도를 따라 아합의 길로 행하였고, 북방 이스라엘과 친밀한 교제를 유지했다. 그는 북방 아합의 아들 요람 왕이 아람의 하사엘과의 전쟁이 있었을 때에 그를 도우려 길르앗 라못으로 갔다. 그 전쟁에서 요람 왕은 부상을 입고 이스르엘로 돌아와 있었으며, 아하시야가 그의 병 문안 차 갔다가 때마침 반란을 일으킨 예후에게 죽임을 당하게 되어 그의 통치가 끝나게 되었다. 이때에 아하시야는 자기의 부하들까지 잃게되어 왕위를 지킬 힘을 잃고 말았다.
2-4. 아합의 딸 아달랴의 섭정(주전 841-835년, 왕하 11:1-6, 대하 22:10-23:15)
아달랴는 아하시야가 예후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왕족들의 씨를 모두 죽여 버리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그때에 여호람의 딸이요 아하시야의 누이인 여호사브앗이 아하시야의 어린 아들인 요아스를 간신히 피신시켜서 6년 동안 숨겨 키웠다. 아달랴는 그 어머니 이세벨의 뒤를 따라 남방 유다에서 피의 숙청을 자행하였다. 그는 바알 종교를 다시 부흥시키려 하였다. 만일 제사장 여호야다의 반정이 없었더라면 유다는 다시 한 번 영적 암흑기를 맞을 뻔하였다. 그러나 결국 아달랴는 여호야다의 반정으로 인하여 국민들의 칼에 죽었다(대하 23:21). 그러나 어린 요아스가 왕위에 오름으로 6년간의 암흑시대는 막을 내리게 되었고, 북방 이스라엘과의 긴밀한 관계도 끊어지게 되었으며, 얼마동안 두 관계는 평행을 이루어 나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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