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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성경 핵심 공부 (창세기에서 계시록까지) (74과)4

Joyfule 2009. 5. 23. 00:28

인터넷 성경 핵심 공부 (창세기에서 계시록까지) (74과)4

에스라-느헤미야(1): 서론

 

 

2.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개혁의 성격

 2-1 율법과 성전 중심의 공동체

 

  이때에 등장한 두 개혁자가 바로 에스라와 느헤미야였다. 하나님께서는 이 두 사람의 지도 아래 개혁과 부흥을 시도함으로 포로 후기 공동체가 나름대로의 정체성을 회복할 수 있도록 도우셨다. 그런 점에서 에스라와 느헤미야를 통한 하나님의 구속 사역은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날 때까지 400년이라는 기나긴 세월 동안 지속될 암흑이 오기 전에 예루살렘의 삶의 모습을 비춰줄 두 줄기의 빛이었다.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율법을 회복하고, 기존 성전을 중심으로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한 이후, 수세기 동안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집(성전)과 율법 중심의 공동체였다.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업적을 통해서 이스라엘은 예루살렘의 하나님의 집과 율법을 중심으로 하는 공동체로서 새로운 정체성을 형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동안에 예루살렘은 짧은 기간을 제외하고는 남의 나라의 속국 신세를 벗어나지 못했다. 우선 예루살렘은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의 손에 넘어갈 때까지 페르시아 왕들의 지배를 받았다. 알렉산더의 원정과 그의 헬라화 프로그램에 따라 유다 공동체는 헬라인들의 이상과 관습과 씨름하면서 정체성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주전 323년 알렉산더가 죽은 지 150여 년 후에 유다인들은 그의 후계자들인 셀루시드 왕조에 반역하였으며, 마카비 가문의 지도 아래 독립을 쟁취하여, 나름대로 60년 이상 독립을 유지했다.  

 

이 용감한 시기 동안 다윗 가문을 회복하려는 노력은 없었으며, 오히려 마카비 제사장 가문에게 모든 것을 맡길 뿐이었다. 그러나 이 제사장들도 로마 군단의적수는 되지 못했다. 주전 63년 예루살렘은 폼페이가 이끄는 군대에 의해 정복했다. 유다의 독립의 마지막 불길은 깨졌고, 예수께서 오실 때까지 예루살렘은 또 다시 로마의 속국이 되었다.

 

  스룹바벨의 성전은 솔로몬의 제1성전 터 위에 든든하게-비록 장엄하지는 않지만-서 있으면서, 백성들에게 예배 장소와 때로는 피신처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외양에 대한 기록은 우리에게 내려오지 않고 있으나, 아름답지는 않았던 것 같다. 결국 제2 성전이 허물어진 지 20년 후에 베들레헴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셨다.

 

이렇게 본다면 에스라-느헤미야서에 나오는 포로 후 공동체는 평범한 성전과 율법을 중심으로 하는 소수 공동체로서 이방 열강들의 각축 속에 겨우 존속해 온 여백의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한다면 도대체 에스라-느헤미야서가 그렇게 중요하게 다루는 예루살렘 성전 재건과 에스라의 율법 개혁과 느헤미야의 예루살렘 성벽 재건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 그저 유다 민족의 생존과 유지의 역사 기술만을 목적으로 한 것이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