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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성경 핵심 공부 (창세기에서 계시록까지) (74과)3

Joyfule 2009. 5. 22. 00:32

인터넷 성경 핵심 공부 (창세기에서 계시록까지) (74과)3

에스라-느헤미야(1): 서론

 


 1-5 정체성 상실과 낙망

 

  다윗 왕조의 부활이 무산되자, 페르시아 제국 도처에 흩어져 살더 유다인들은 재건 사업에 관심을 잃게 되었으며, 대부분 각자의 처소에 그대로 눌러 사는 데 만족했다. 에스라 2장과 느헤미야 7장의 귀환자 명단을 보면, 고향으로 돌아온 당시의 유다 총 인구가 약 5만명 정도임을 알 수 있다.

 

유다는 스룹바벨 이후 유프라테스 강 서쪽과 남쪽에 위치한 "아바르 나하라"(강 서편) 속주의 일부로서 임명직 총독에 의해 통치되었다. 최근에 발굴된 도장, 관인, 직인이 찍힌 단지의 손잡이 등, 고고학적 유물을 통해서 당시에 유다 출신의 총독도 있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각 속주들은 직접적인 페르시아 문제를 제외하고는 자치를 보장받았다. 그리고 총독은 왕실 재원을 위한 징세의 임무를 맡았다.

 

  성전이 완공된 때부터 주전 458년에 에스라가 귀국할 때까지 약 60년간 포로 후기 유다 공동체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히브리 왕정 시대의 역사를 다룰 때에는 그 당시의 거대한 제국들로부터 많은 역사적 자료를 얻을 수 있다.

 애굽, 앗시리아, 바벨론 궁정 기록 뿐 아니라, 고대 근동 아시아의 다른 작은 왕국들의 기록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페르시아 시기에 이르면 우리는 실제로 당시의 역사 기록이 별로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또한 왕정 시기에 대해서는 성경에서도 많은 자료를 제시해주고 있지만, 페르시아 시대에 대해서는 에스라-느헤미야, 에스더, 그리고 여기 저기에 산재해 있는 몇 가지 언급이 전부이다. 따라서 이 시대에 관한 배부분의 역사적 결론은 임시적인 것임을 유념해야 한다.

 

  이 점을 염두에 두면서 말라기와 에스라-느헤미야서를 통해서 성전 건축 이후 60년이 지난 포로 후 공동체의 모습을 재구성해 보도록 하자. 성전의 완공으로 집회 장소가 마련되었고, 이로써 유다인들은 예배 공동체로서 그 위치가 분명해졌다. 그러나 공동체의 영성은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다. 자기 직무에 싫증이 난 제사장들은 여호와께 병들고 흠이 있는짐승들을 바치면서도 그것을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말 1:6-14).

 

또한 율법을 집행할 때에는 편파적인 처신을 함으로써, 성직의 품위를 실추시켰다(말 2:1-9). 이것은 일반 백성들도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은 안식일을 무시하고 버젓이 장사를 했다(느 13:15-22). 평싱도들이 십일조를 내지 않았기 때문에 레위인들은 생계를 마련하기 위해서 자신의 직무를 버려야만 했다(느 13:10-). 이들은 신앙에 충실해 봐야 아무런 득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말 2:17, 3:13-15). "이는 너희가 말하기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니, 만군의 여호와 앞에 그 명령을 지키며 슬프게 행하는 것이 무엇이 유익하리요?(말 3:14)."

 

  이러한 태도는 사회 윤리와 개인의 도덕적 문란을 초래하였다. 이혼이 성행하였으며(말 2:13-16), 부자들이 임금을 착취하고, 악한 이들을 이용했다(말 3:5). 가난한 이들은 가뭄으로 인해 세금을 내기 어려울 때에 자기 밭을 저당잡혔다가 강매당하여, 자녀들과 함께 노예로 전락했다(느 5:1-5). 더욱이 이방인과의 통혼으로 유다인 공동체의 순수성 보존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느 13:23-27).

 

따라서 공동체가 스스로 개혁하여 영성을 회복하고 방향성을 찾지 않으면, 공동체가 붕괴하지 않는다고 해도, 조만간 그 성격을 상실하게 될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바벨론 포로 이전에는 유다인들은 다윗의 제도와 신학, 국경, 궁전, 성전, 그리고 수도를 가진 유다 라는 국가에 속한 국민이었다. 그러나 이런 국가적 제도를 회복하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따라서 공동체의 미래는 다른 방향에서 찾아야만 했다.

 

포로 후 공동체가 스스로 정체성을 다시 정립하지 않으면, 이웃 민족들과 사회-문화적으로 동화되어 사라져 버릴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따라서 철저한 대책이 요구되었다. 이러한 상태로는 아주 위험하였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거룩한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떤 새로운 길을 찾을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떤 방향으로 정체성을 정림해여 하는 지는 분명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