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성경 핵심 공부 (창세기에서 계시록까지) (74과)2 |
에스라-느헤미야(1): 서론 |
1-3 새로운 활기
그러는 사이에(주전 530년) 페르시아의 왕 고레스가 전쟁에서 죽고 그의 아들인 캄비세스가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다. 잔혹한 폭군으로 알려진 캄비세스는 애굽에 3년이나 머물면서 정복 사업에 열중했다. 그러던 중에 그는 자기의 아우인 바르디야(또는 스메르디스)가 왕위를 찬탈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귀국하는 길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러나 다리오가 7인의 군사령관의 도움을 받아 바르디야로부터 왕위를 다시 인수받게 되었다. 다리오는 대중적인 인기가 있었던 바르디야와는 달리 대중적인 지지를 받지 못했다. 그러므로 그는 재위 초에 여러 지역에서 일어나는 반란을 진압해야만 했다. 그가 한 해에 19번이나 전쟁을 치르고 9명의 왕을 사로잡았다는 기록은 제국 전체에 얼마나 소요가 극심했는 지를 잘 말해주고 있다.
페르시아 연대기 | ||
왕 |
연대(주전) |
비고 |
고레스 |
550-530 |
고레스 칙령(538)-바벨론 포로 귀환 |
캄비세스 |
530-522 |
성전 건축 재개(520) |
다리오 1세 |
522-486 |
성전 완공(515), 마라톤 전투에서 패배(490) |
아하수에로(크세르크세스) |
486-465 |
에스더와 모르드개의 활약 |
아닥사스다1세(롱기마누스) |
465-424 |
에스라 귀환(458), 느헤미야 귀환(445) |
다리오 2세 |
424-404 |
|
이러한 페르시아 제국 내의 광범위한 소요와 분쟁은 여호와의 결정적인 개입의 전주곡으로 간주되었다. 그리고 학개와 스가랴와 같은 선지자들은 성전을 다시 건축하도록 유대인들을 독려하였다. 특히 학개는 백성들이 자기 집은 잘 지으면서도 성전은 폐허로 남겨놓은 일을 지적했다. 그는 이러한 일은 하나님에 대한 모욕이며, 이로 인해 하나님께서 그 따에 기근을 보내셨다고 말했다(학 1:9-10).
학개는 여호와께서 다시 시온을 통치의 처소로 사용실 것으로 확신했다. 그는 성전 완공을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가운데 거하시며, 그들을 축복하기 위한 전제조건으로 인식했다. 그러므로 그는 성전이 왕공되지 않는 한 이러한 상황이 계속될 것이라고 강하게 암시했다. 이로 인해 스룹바벨과 예수아의 지휘 아래 성전 공사가 다시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일이 진척되어 학개가 첫 번째 예언을 한 지 한 달 후에 두 번째 예언을 하게 되었다. 학개는 두 번째 예언에서 여호와께서 열방을 무너뜨리고 성전을 만국의 보배로 충만케 하여, 솔로몬 성전의 영광보다 더 크게 하겠다고 선포했다(학 2:1-9).
한편 스가랴는 스룹바벨로 인해 여호와의 신의 도움으로 성전이 완공될 것이며(슥 4:6-10), 기다리던 다윗 가문의 후손이 스룹바벨이라고 선언했다(슥 3:8, 6:9-15, 학 2:20-23). 학개와 스가랴의 설교는 효력을 발휘했다. 다리오 왕은 사마리아인들의 고발을 접하고 조사하던 중에 고레스의 칙령을 확인했다. 그러므로 그는 유대인들이 성전을 건축하는 일을 허락했으며, 이로 인해 성전 건축은 순탄하게 진행되었다.
마침내 고레스의 칙령이 내려진 지 거의 25년이 지난 뒤인 주전 515년에, 성전의 마지막 돌이 기쁨 중에 놓이게 되었다. 이로 인해 새로운 성소가 하나님의 에배 장소로 벙헌이 되었으며, 유월절을 성대하게 거행할 수 있게 되었다(스 6:14-22). 이로 인해 포로후 공동체는 성전을 중심의 예배 공동체로서 정체성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민족 재건의 일단계 사업은 성취되었다.
1-4 왕정 복구 희망의 몰락
그러나 이런 기쁨의 순간이 지나고 성경에는 다시 무거운 침묵이 흐르고 있다. 이 후의 성경 기록에는 학개와 스가랴가 선포한 소망이 실현되었다는 이야기나 예언에 대한 언급이 나타나지 않는다. 비슷한 시기에 기록된 역대기 역시 희망이 성취되었다는 말을 하지 않고 있다. 고통과 희생의 힘든 기간에 유대민족을 인도해 왔던 에스라서 역시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있다.
스룹바벨의 이름은 다 이상 언급되고 있지 않으며, 그를 둘러싼 높은 기대도 가을 안개처럼 사라져 버렸다. 그는 성전을 완공한 후에 예루살렘 총독으로서의 임무를 완수하고 무명으로 돌아감으로 열광적인 추종자들의 꿈을 허무하게 만들었다. 어쩌면 그는 학개와 스기랴의 요구를 받아들여 왕전 복구로 방향을 틀다가 페르시아 제국에 의해 실작되었는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슥 12:10)을 근거로, 포로 후 공동체가 내분을 일으켜서 스룹바벨이 친 다윗 파에게 살해되었다고 추측한다.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슥 12:10)." 그러나 이러한 일들은 모두 추측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에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많은 이들이 회복된 다윗 성에 대해 가졋던 빚나는 꿈과는 달리 다윗 계열의 어느 후손도 이 성 위에 앉아 통치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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