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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성경 핵심 공부 (창세기에서 계시록까지) (78과)9

Joyfule 2009. 6. 27. 00:51


인터넷 성경 핵심 공부 (창세기에서 계시록까지) (78과)9

에스더(2)


8-4. 현재적 상관성

  우리는 지금까지 에스더서를 우리 스토리의 일부로서 수용하는 것이 원리상 옳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설사 그렇다고 해도 오늘날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무엇이라고 말하는 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런 점에서 에스더서를 깊이 살펴보면 여러 수준에서 에스더서의 현재적 상관성을 볼 수 있다.

 

  첫째, 에스더서는 포로된 하나님의 백성들을 다루는 다른 본문(예를 들면 다니엘 이야기)과 함께 오늘날 우리가 처한 상황에 가잘 잘 맞는 구약 나레이터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에스더서의 유다인들과 같이 이방인들이 권력을 휘두르는 세계 속에 살고 있다. 그런데 에스더서는 이런 세계 속에 적합한 라이프 스타일이 무엇인지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에스더서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즉 이방 세계 속에서 "창조적이고 풍부한 삶을 살 수 있는 가능성"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 에스더서는 다니엘서와 함께 디아스포라(흩어진) 유대인들이 여호와께 충성하고 민족 종교적 전통에 충실하면서도 동시에 이방 세계 안에서 창조적이고,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둘째, 에스더서에 나타나는 숨겨진 하나님의 모습은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살고 있는 세계와 잘 맞는다. 에스더서의 사건들은 매우 정상적이며, 이적들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앞서 살핀대로 이러한 이적의 부재는 반드시 하나님의 부재를 가리키지 않는다. 숨겨진 하나님은 현상적으로는 숨겨진 것처럼 보일 때에도 사실은 그의 백성을 보호하고 계시며, 모든 것이 합혀여 선을 이루도록 역사하신다.

 

  셋째, 에스더서는 하나님의 백성의 삶 자체, 즉 위기로부터의 구원과 이로 인한 "샬롬"은 모두 하나님의 선물임을 강조한다. 에스더서의 플롯 전개가 등장 인물들이 통제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일어난다는 점은 에스더서의 결론에 나오는 "샬롬"이 인간의 선행에 대한 보상이 아니요, 하나님의 구원의 선물임을 강조하고 있다. 특히 에스더 9장의 "거룩한 전쟁 모티브"들은 유다인들이 얻은 구원은 인간의 업적이 아님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수 2-6장)에 잘 나타나는 "거룩한 전쟁"을 보면 이스라엘의 적들이 전쟁을 시작하기도 전에 두려워 떠는 모습을 보게된다.

 

이에 이스라엘은 큰 노력 없이도 승리를 얻게 되었으며, 따라서 적의 물품은 하나님께 바쳐져 아무도 전리품을 취해서는 안되었다. 그런데 (에 9장)을 보면 이런 거룩한 전쟁의 모티브가 나타나고 있다. 우선 전쟁 전에 이미 적들이 모르드개와 유다인들을 두려워하였다(9:3). 이에 유다인들은 손쉽게 수산성에서 800인을 죽이고, 각 도에서 무려 75,000명이나 살해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전혀 그들의 재산에 손을 대지 않았다. 이를 보면 유다인들이 구원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며, 인간이 성취한 것이 아님을 느낀 것으로 보인다. 부림절이 예물을 주는 날로서의 성격을 갖는 것도 마찬가지이다(9:22).

애굽에서의 구원이나 가나안 정복도 선물이었던 것을 기억하라! 에스서더는 우리가 우리 스스로의 공으로 돌리기 쉬운 "작은 수준의 구원"도 역시 하나님의 선물, 즉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보여준다. 사실 우리의 삶 전체가 은혜라고 할 수 있다. 에스더서는 이런 점을 우리에게 놀라운 필치와 웅변력으로 전하고 있다.

 

  넷째, 에스더서의 유머스러운 성격 역시 오늘 우리에게 주는 시사적인 메시지가 크다. 에스더서가 우리의 이야기라면, 우리는 모두 에스더서의 웃음에 동참하는 것이 옳다. 에스더 스토리는 우리로 하여금 하만의 몰락을 보고 즐거워 할 것을 요구한다. 하만은 하나님의 백성이 어디로 가든지, 그들을 미워하는 열국의 미움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화신이다(요 17:14). 결국 에스더서는 하만의 몰락을 즐거워 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이며, 부림절기를 통해 이러한 계기를 미래로 투사시켰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온 세계의 주권자이시며, 따라서 결국 마지막으로 웃는 사람은 군주들이나 지배자가 아니라 하나님과 그의 백성이라는 것을 믿을 수 있는 것이다(계 18:20). 현재 세상을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는 악의 세력을 비웃을 줄 아는 능력을 가져야 할 것이다.

 

  다섯째, 에스더서와 모르드개의 승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궁극적 승리를 예기하고 있다. 에스더서의 위험을 자초하는 중보, 철천지 원수가 엎드러짐, 모르드개가 승귀하여 모든 백성에게 평화를 말하는 모습 가운데, 우리는 장차 올 일들의 그림자를 보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구속 역사는 에스더서 원 독자들이 생각지도 못할 놀라운 방식으로 성취되고 있음을 놓쳐서는 안된다.

 

에스더서와 모르드개의 승리는 이방인과 대조되는 유다 민족에 대한 무조건적인 보호와 안전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는 유다 공동체의 잘못된 율법주의와 메시아니즘 가운데 표현된 거짓 희망들과 안전판들을 심판하면서 새 언약을 세우셨다. 예수님 당시 유다 공동체는 율법주의의 장벽을 높이 세우고, 자신들만이 선민이라고 믿고 이방인들을 무시하고, 유다 백성의 보전과 영광만을 보장하는 잘못된 메시아니즘을 소유하고 있었다.

이에 예수께서는 율법주의의 장벽을 허물고, 잘못된 메시아니즘을 부순 후에야 비로소 유다인과 이방인으로 형성된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과 새 언약을 체결하셨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께서는 역사의 과정을 통해서 통치하셔서, 유다와 이방의 담을 무너뜨릴 그의 아들 예수의 출현을 천천히 준비하셨던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는 에스더서가 비종교적 언어로 기록된 심오한 종교적 스토리임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은 것은 의도적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숨겨진 하나님께서 전 세계에 흩어져 사는 숨겨진 하나님의 백성을 섭리로 보호하신다는 것을 드러내는 문예 장치로 볼 수 있다. 흔히 윤리적 모호성이나 도덕적인 거리낌을 야기한다고 주장하는 요소도 실제로 에스더서를 심도 있게 분석하면, 그렇게 심각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에스더서가 정경의 일부로 인식되고 교회 안에서 정경으로 인정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