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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과 이승만

Joyfule 2020. 7. 8. 23:54


제주4.3과 이승만
written by. 이현오
우남 이승만 연구회 콜로퀴엄.... 4.3사건 당시 토벌대 요원도 나와 증언


우남 이승만 연구회(회장 이주영 교수)와 (사)건국대통령 이승만 박사 기념사업회(회장 강영훈)는 17일 오후 3시 서울 중구 정동교회 아펜셀러 홀에서 우남 이승만연구회 제47차 콜로퀴엄을 열고 '제주4.3과 이승만'을 주제로 강연회를 가졌다.

이 날 강연회의 초청 강사로 나선 국방대학교 손경호 교수는 제주4.3의 발생배경과 1945년 일제패망이후 제주에서 이 같은 이념적 소용돌이가 태동하게 된 동인을 짚고 이어 청중의 보충발언 및 질의 응답 순으로 진행됐다.

특히 이 날 강연회에는 당시 국방경비대 7연대 소속으로 제주 무장폭동에 대한 토벌대 일원으로 참여한 최현문씨가 나와 당시의 상황을 설명해 이채를 띠웠다.

자신이 겪은 제주4.3사건을 중심으로 책을 내기도 했다는 최씨는 당시의 상황에 대해 "대낮에도 제주에는 북한의 인공기가 휘날리고 있었고, 주민들의 얘기로는 도로를 중심으로 바닷가를 연한 마을은 대한민국이었지만 그 바깥 산으로 이어지는 지역은 북한의 인민공화국이리고 말할 정도였다"며 "생태적으로 어쩔 수 없는 풍토가 된 것이지만 결과적으로 이북사람에 의해 강요된 것"이라고 말했다.

또 강연회에서는 제주4.3사건과 관련해 헌법소원을 제기하고 이 문제와 연관돼 정확한 진상을 알리기 위해 법적 투쟁을 벌이고 있는 이선교 목사가 나와 지난 참여정부에서 작성된 '제주4.3폭동 진상보고서'에 대한 왜곡된 내용을 짚어가며 이의 시정조치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다음은 이 날 콜로퀴엄에서 밝힌 손경호 교수의 발표안임.(konas)


                     제주 4․3과 이승만

1. 해방이후 한국사회의 이념적 성향과 변화

해방이후 한반도에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의 형성이 광범위하고 신속하게 일어났으며 이들 조직에는 다수의 민족주의자들이 참여하고 있었으나 수뇌부는 공산주의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지역차원의 정치는 대부분 인민위원회를 중심으로 한 좌익세력이 주도하였고 우익세력은 특별한 주도권을 행사할 수 없었다.

이러한 시기 1945년 12월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으로 인해 빚어진 신탁통치 대란으로 인해 한국인들은 공산주의자들의 의도에 대해 의구심을 갖게 되었고 차츰 민족주의 세력이 자리 잡을 수 있게 되었다.

1946년 이승만이 행한 전국순회연설은 한국인들의 뜨거운 호응을 받으며 우리사회의 이념적 성향을 바꾸어 놓는 계기가 되었고 특히 지역에서 우익 세력들이 정치세력화하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1946년 10월 남한을 휩쓴 대구폭동은 공산주의자들이 지닌 무모한 폭력주의적 성향을 드러내었으며 이의 폐해를 목도한 한국인들로 하여금 대안을 모색하게 하였다.


2. 제주 지역의 일본군 무장해제 과정과 제주 지역의 사회주의 활동의 뿌리

해방과 더불어 도착한 미군정은 제주도 주둔 일본군 제58군에 대한 무장해제를 실시하였으나 일본군의 손에 의한 해제로 말미암아 소화기들의 회수와 폐기가 불완전하게 이루어졌다.

공산주의자들은 지역사회의 인텔리들을 통하여 전파되었으며 이들은 지역 내에서 항일운동을 전개하였고 아울러 제주인들이 도일하여 형성한 집단 거주촌에서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하여 항일운동을 실시하는 등 활발한 독립운동을 하였다.

제주지역에는 미군정이 상대적으로 늦게 기능을 발휘하여 미군정 중대의 도착 전까지 인민위원회를 중심으로 행정과 치안활동이 이루어 졌으며 미군정 중대의 설치 이후에도 인민위원회가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여 미군정과 협조하였다.

미군정은 원활한 통치를 위하여 인민위원회를 활용하였으며 당시 산적한 어려운 문제들을 인민위원회의 도움을 받아가며 해결하였다.

1946년 말 실시된 임시 입법기구 구성을 위한 대의원 선거에서 제주도에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좌익인사들이 당선되었다. 이들은 임시입법기구의 활동 전 행한 기자회견에서 사퇴 의사를 밝히고 제주도민들은 민전의 지도아래 단합하고 있다고 전했는데 이는 당시 남한사회의 전반적인 성향의 변화와 동떨어진 일이었다.


3. 제주 공산주의자들의 조직과 성격의 변화

제주도에 1946년 8월부터 도제가 실시되면서 제주도 내의 공산주의들은 더 이상 도 행정에 관여할 수 없게 되면서 점차 제주 사회에서 영향력을 상실하여 갔다.

한편 제주도 내에 남로당 조직이 기존의 조선공산당을 대신하여 설치되자 공산주의 계파 중 화요파에 소속되어 있던 제주 지역의 원로 토착 공산주의자들이 차츰 세력을 잃고 강문석 라인의 젊은 공산주의자들이 득세하게 되었다.

제주의 공산주의자들은 이러한 영향들로 인해 공산당 중앙 조직에 대해 독자성을 상실하게 되었고 점차 당 활동을 중심으로 움직이게 되었다.

이러한 와중에 제주의 1947년 3월1일 3.1절 기념행사를 강행하였고 행사를 마칠 무렵 경찰의 우발적인 발포로 인해 6명이 사망하였다. 이에 제주 남로당은 전도에 걸친 총파업을 조직하여 제주도청을 비롯한 대다수의 사업장에서 관민 총파업이 일어나게 되었다.

초유의 관민 총파업에 대하여 중앙의 미군정은 당황하게 되었고 이를 경찰력을 투입해 강경하게 진압하기 시작하였다.

제주인들은 정부의 진압에 대하여 불만을 가지게 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경찰을 불신하게 되었고 미군정에서는 제주도를 일반적인 당시의 남한 사회와 달리 친 공산주의 성향을 지닌 지역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4. 남로당 제주도위원의 봉기 결정과 전라남도당의 역할

총파업에 대한 진압이 경찰의 강압적인 작전으로 이루어지고 이후 경찰과 제주 남로당 간에 마찰이 계속 발생하자 제주도인들은 미군정과 경찰에 대하여 극한 분노를 갖게 되었다.

또한 당시에 부임한 유해진 지사가 극우의 성향을 가진데다 여러 가지 실정을 하여 제주 도민들이 반감을 지니고 있었고, 제주도에 입도하여 활동을 시작한 서북청년회의 폐해로 인하여 제주도민들은 더욱 친 공산주의 성향을 더하게 되었다.

한편 1948년 들어 남로당은 전국차원의 봉기를 수차례 계획하고 감행한바 여기에 참여한 제주의 공산주의자들이 속속 검거되자 이들은 자체 세력의 보존을 위하여 제주도에서 미군정에 대하여 봉기할 것을 결정하였다.

봉기의 결정은 제주의 원로 공산주의자들이 대부분 세력을 잃고 떠나 있거나 수감되어 있는 와중에 김달삼을 중심으로 한 젊은 공산주의자들을 중심으로 이루어 졌고 여기에는 남로당 제주위원회를 지도 감독하는 전라남도당에서 지도원이 임석하고 있었다.

제주 지방 공산주의자들의 봉기를 전국적인 차원에서 단선반대를 위한 사보타지로 활용하기 위하여 이를 지도한 것은 남로당 전라남도당이었다. 남로당은 전국적으로 단선 반대 활동 지침을 하달하였으며 각 도당에서의 독자적인 계획을 보고받고 이를 허락하였다.


5. 4.3의 발생과 전개

최초 4.3의 전개는 전국적으로 행해진 여타 사보타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봉기는 면단위로 조직된 면당을 중심으로 하여 이루어졌고 경찰, 우익인사에 대한 습격과 경찰지서 습격이 주를 이루었다.

그러나 봉기 후 얼마 되지 않아 공산주의자들은 조직을 중앙집권적으로 개편하였다. 이후 수차례에 걸쳐 공산주의자들은 능률적인 게릴라 조직으로 발달하여 갔으며 선거방해 작전을 효과적으로 추진하여 남한내에서 유일하게 당선무효사태를 만들어 냈다.

남로당 중앙당은 제주도에서 공산주의자들의 봉기가 성공하자 이를 활용하고자 지도하기 시작하였으며 나중에는 북한 역시 제주도의 봉기에 주목하고 제주도 게릴라들을 지도하기 시작하였다.

제주도의 게릴라들은 6월말에는 북한의 지도하에 정치지도원이 편성되고 전투부대원 보다 많은 수의 보급대원을 지니며 고유의 통상명칭을 지닌 고도의 군사적인 게릴라 부대로 변화하였다.

미군정은 처음에는 치안작전을 통하여 제주도의 봉기문제를 해결하려 하였으나 재조선 미군사령부 작전참모부가 개입하면서 대게릴라전으로 인식하게 되었고 경찰 대신 국방경비대가 투입되었다.

미군정은 국방경비대 주도의 작전에 만족하지 않고 미 보병6사단의 제20연대장이 직접 작전을 지휘하도록 하였다. 한편 6월18일 국방경비대 제9연대장 박진경 중령이 공산주의자인 부하 문상길 중위에 의해 암살되었다.


6. 4.3의 파장과 진압

제주도 반란의 진압을 위해 파견을 준비 중인 여수의 14연대가 여순반란을 일으켜 제주도반란은 전국적으로 파장을 끼치게 되었고, 이로 인해 1948년 8월에 갓 출범한 대한민국 정부로서는 여순반란과 제주반란의 진압에 총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목전에 다가온 중국의 공산화, 날로 강성해 가는 북한 정권, 그리고 예정된 주한미군의 철수로 인하여 심각한 안보적 위협을느끼고 있었고 제주도마저 공산주의자들의 수중에 넘어가는 사태를 방지하기 위하여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또한 김달삼을 비롯한 제주 반군의 지도자들이 북한의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자 제주사태는 단순한 지역 공산주의자들의 봉기가 아니라 이미 정권을 수립한 남과 북의 공식적인 대결의 장이 되었다.

송요찬 중령이 지휘하던 진압군은 무리한 진압작전을 강행하여 많은 인명피해가 발생하였다. 특히 주민과 게릴라들을 구분하지 않고 사살함으로 주민들의 민심이 이반하게 되었고 게릴라들의 세력이 줄어들지 않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러나 1949년 2월 편성된 유재흥 대령이 지휘하는 전투사령부가 선무공작과 토벌을 병행하여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하였다.


7. 결론

제주 4.3은 남로당이 5.10총선거를 방해하기 위하여 조직한 무장 봉기였다. 제주의 공산주의자들은 남로당 중앙당과 북한의 지원과 지도아래 효과적인 게릴라전을 전개하였다.

한국 정부는 출범이후 공산주의세력으로 둘러싸여 있는 상황에서 생존을 위하여 제주의 반란을 진압하여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