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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언제부터 미국을 인식했을까?

Joyfule 2006. 11. 6. 00:55
조선은 언제부터 미국을 인식했을까?

 

교회와신앙 webmaster@amennews.com

 

이상규 교수 / 고신대학교 역사신학, 신학박사

 

우리나라가 미국이라는 나라를 인식하기 시작한 때가 언제였을까?

또 우리는 미국을 어떻게 인식했을까?

우리나라가 어떻게 서방나라 중 최초로 미국과 조약을 체결하고

오늘에 이르는 한미관계를 유지하게 되었을까?

오늘은 이런 질문을 가지고 역사의 뒤안길을 둘러보고자 한다.

 

우리나라가 미국과 최초로 공식적인 조약을 맺은 것은 1882년의 ‘한미수호통상조약’이지만,

1840년대 후반부터 미국이라는 나라를 인식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처럼 도로, 통신, 혹은 교통이 발달하지 못했던 그 때는

주로 중국을 통해 수입되는 서책(書冊)을 통해 미국에 대한 지식을 얻게 된다.

이런 상황을 헤아리기 위해서는 18세기 중엽 이후의 우리나라 주변의

정치 외교적 상황을 이해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18세기 중엽 산업혁명을 겪으면서 영국과 프랑스는 경쟁적으로 식민지 개척에 몰두했다.

시장개척과 원료확보가 주된 관심사였다.

동양에서 그 첫 무대는 광대한 나라 인도였다.

영국은 결국 인도를 식민지배하기 시작하였고,

19세기 전반기에는 그 세력을 확대하여 동남아로 확장해 가기 시작한다.

 

그리고는 다시 북상하여 중국을 공략한다.

즉 아편전쟁(1839-42)을 계기로 난징조약(南京條約, 1842)을 체결하여 홍콩(香港)을 할양받고,

광저우(廣州), 샤먼(厦門), 상하이(上海), 푸저우(福州), 닝푸(寧波)의 개항하게 하고

각 개항지에 영사관을 설치하고, 또 배상금도 확보하게 된다.

 

영국과의 인도 쟁탈경쟁에서 실패한 프랑스는 인도차이나 반도로 눈을 돌려

어느 정도 실익을 차지하게 된다. 프랑스 역시 중국으로 눈을 돌려

청나라와 황포조약(黃捕條約, 1844)을 체결하고 영국과 동등한 통상권을 확보하게 된다.

반면 러시아는 이미 시베리아 일대를 획득하는데 성공하였다.

19세기 중엽부터 남하정책을 통해 흑룡강 연안 지방을 사실상 점령하였고,

애혼(愛琿, Aigun)조약을 체결하여(1858) 흑룡강 이북지방을, 북경조약(1860)을 통해

오소리 강 이동지방을 러시아령으로 편입하였다.

또 블라디보스토크항을 건설하여 극동진출의 근거지로 삼았다.

러시아 세력이 연해주로 진출한 결과 조선은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러시아와 국경을 마주하게 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도 18세기 말엽부터 태평양을 횡단하여 극동으로 진출하기 시작한다.

난징조약이 체결된 직후 청나라와 망하(望厦)조약을 체결하고(1844) 중국 진출의 기반을 닦았다.

이어서 페리(Matthew C. Perry, 1794-1858) 제독을 일본에 파견하고

미일(美日) 조약을 체결케 했는데(1854. 3), 이 조약이 가나가와(神奈川)조약이다.

또 제2차 아편전쟁(애로우전쟁)을 계기로 청나라와 천진조약(1860)을 체결하여

영국이나 프랑스와 동등한 통상권을 확보하게 된다.

 

이처럼 미국을 포함한 열강들이 중국에서 활동하게 되자

열강들에 대한 소식이 조선에 유입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조선이 열강들의 침략 활동을 인식하는 시작이 된다.

그 첫 보고는 1810년(순조10년) 3월 동지겸사은행서장관(冬至兼謝恩行書狀官)

 이영순(李永純)의 보고였다.

그는 보고서에서 “영길리인(暎咭唎人)들이 점지모리(占地謀利) 할 목적으로

자주 오문(奧門)에 침공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물론 보고가 신속하지도 못했고, 내용이 정확하지도 않았지만 이런 식으로

아편전쟁, 난징조약, 제2아편전쟁 등에 대한 소식을 어설프게나마 알게 되었다.

미국에 대한 정보는 1860년(철종11년) 일성록(日省錄)에 처음 나타나는데,

역관 김경수(金景遂)에 의해서였다.

그는 “대영(大英), 대법(大法), 아라사(俄羅斯)와 아미리(亞美里) 등 사국(四國)

서양오랑케들이 북경에 침입하여 황제는 열하(熱河)로 피난하고…”라고 했는데,

 아미리(亞美里)가 바로 미국이었다.

바로 그해에 일본은 조선에 서계(書契)를 보내 노서아, 불란서, 영길리(英吉利),

그리고 아묵리가(亞墨利加)와 통상하고 있음을 알려왔는데, ‘아묵리갗가 바로 미국이었다.

미국에 대한 연행(燕行)사절의 보고는 극히 제한적이었으므로

우리나라의 미국인식에 큰 영향을 주지는 못했다.

 미국에 대한 정보는 도리어 북경을 통해 입수된 책자를 통해서였다.

그 대표적인 문서가 위원(魏源, 1794-1856)의 <해국도지>(海國圖志, 1844)와

서계여(徐繼畬, 1795-1873)의 <영환지략>(瀛環志略, 1850)이었다.

 

이 책은 아편전재의 패배를 경험한 청나라가 세계정세를 살피고

이에 대처하기 위해 만든 일종의 인문지리서였다.

 이 두 책에서는 미국을 ‘미리견국’(彌利堅國) 혹은 ‘미리견합중국’(彌利堅合衆國)이라고 불렀다.

 <해국도지>는 출판된 이듬해인 1845년 동지부사(冬至副使)로 북경에 갔던

호조참판 권대긍(權大肯)에 의해 유입되었고,

<영환지략>의 전래연도는 불분명하지만 늦어도 1857년 이전에 유입된 것으로 보고 있다.

말하자면 우리나라는 <해국도지>를 통해 1840년대부터 미국을 인식하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당대의 석학에 속했던 최한기(崔漢綺, 惠崗, 1803-1877)는 위의 두 책을 대본으로 하여

1857년 5월에는 13권으로 구성된 <지구전요>(地毬典要)를 출판했는데,

 이 책 10권에서는 미국의 자연환경, 정치제도, 경제 지리 등을 소개했는데,

그는 미국을 ‘북아묵리가미리견합중국’(北亞墨利加米利堅合衆國)이라고 호칭하고 있다.

 이 책에서는 앞에서 말한 <해국도지>나 <영환지략>에서와 마찬가지로

미국에 대해 호의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런 점을 미루어 볼 때 1850년대 말에는 조선의 위정자들이나 지식인들은

미국에 대해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때부터 우리나라는 미국인과 접촉하기 시작하는데,

미국 선박들이 우리나라 연해에 들어오게 되면서부터였다.

 

흥미로운 점은 우리나라는 미국을 ‘아미리’(亞美里)로 일본에서는 ‘아묵리갗(亞墨利加)로

중국에서는 ‘미리견국’(彌利堅國) 혹은 ‘미리견합중국’(彌利堅合衆國)으로 불렀다는 점이다.

후일 조선의 최한기는 미국에 대한 일본식 표기와 중국식 표기를 적당히 조합하여

 ‘북아묵리가미리견합중국’(北亞墨利加米利堅合衆國)이라고 불렀다.

 이 용어 자체만 보더라도 조선의 미국인식은

일본과 중국을 통한 간접적인 것이었음을 암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