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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폭스 (John Foxe, 1516 - 1587)

Joyfule 2021. 7. 22. 07:37



 신앙위인 - The Reformers(4) 영국     

존 폭스 (John Foxe, 1516 - 1587)


 

 

죤 폭스는 1516년 영국 동부의 링컨셔주 보스톤에서 태어났다. 대단히 학구적이었던 그는 16살 때에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옥스퍼드 대학에 진학하여 1537년 문학사 학위를 받았고, 1538년에는 모들린 단과대학의 특별연구원 후보가 되었으며, 이듬 해에 1539년에 특별 연구원이 되었다. 그는 1539년부터 1540년까지 논리학을 강의했고, 1543년 석사 학위를 받았다. 

 

옥스퍼드 대학 시절 그의 절친한 친구로는  휴 라티머와 윌리엄 틴데일이다. 그는 그들과 마찬가지로 개신교를 강력히 지지했는데, 이 사실로 인해 1545년 폭스를 비롯한 다섯 명의 모들린 단과대학 특별연구원이 사임하게 된다.

 

옥스퍼드를 떠난 그는 워릭셔주 찰르코트에 있는 루시(Lucy) 가문의 가정교사로 일했다. 1547년 초 찰르코트 교회에서 아그네스 랜달과 결혼한 그는 생계를 위해 런던으로 왔다. 1548년이 저물어갈 무렵 폭스는 1547년에 처형된 서리(Surrey)의 백자 헨리 하워드(Henry Howard)의 자녀들을 가르치는 가정교사가 되었다.

 

1550년 런던의 주교 리들리는 폭스를 성 바울교회의 부제(副祭)로 임명했다. 그리하여 그는 비록 목회자로서의 책임을 맡지는 않았지만 그곳에서 설교를 했으며, 그곳에서 개신교를 전파한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그 동안 그는 신학 논문들을 출판하고, 많은 교회사 책을 읽었다.

 

1553년 7월 메리 여왕이 즉위하게 됨으로써 폭스에게는 불안한 시기가 시작되었다. 카톨릭 신자였던 늙은 노포크 백작은 감옥에서 풀려나자마자 자기의 손자들을 가르치고 있던 폭스를 해임했다. 폭스의 친구들은 대부분 박해가 시작되었을 때 영국을 떠나 유럽 대륙으로 갔으며, 폭스도 그들의 뒤를 따르기로 결심했다.

 

그는 위클리프 시대로부터 그 시대에 이르기까지 유럽에서 있었던 개혁자들의 박해에 관한 라틴어 논문의 첫 부분을 복사하여 가지고 갔었다. 이 책은 주로 위클리프와 후스를 다룬 것으로서, '행위와 불후의 업적'(Acts and Monuments)의 초안이 되었으며, 1554년에 출판되었다.

 

폭스는 프랑크푸르트에 약 1년동안 머무는 동안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자 존 낙스와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 그후 바슬레로 이사한 그는 극심한 가난으로 고생했다. 그는 열렬한 개신교 신자이며, 개신교 서적을 출판했던 요한 헙스터(Johann Herbst)의 인쇄소에서 원고조사계로 일했는데, 헙스트는 폭스에게 자기의 저서를 집필한 시간을주었다.

 

그 동안 폭스는 그린달을 통해 영국에서의 박해에 대해 보고를 받고 있었다. 브래드포드 사건이 그가 입수한 최초의 박해 사건이었으며, 크랜머의 심문에 관한 보고서를 입수했을 당시 폭스는 그것을 출판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린달은 폭스에게 헨리 8세의 통치 말기까지 있었던 영국에서의 개혁자 박해에 관한 기사를 즉시 완성하라고 권했다. 그는 착실하게 작업하여 1551년에는 헨리 8세 통치 말기까지의 박해에 대한 이야기를 거의 다 기록했다. 라틴어로 기록된 이 저서는 1559년 9월 1일 옛날 그가 가르쳤던 학생으로서 이제는 백작이 된 노포크 백작에게 헌정되었다.

 

같은 해 폭스는 영국으로 귀환했으며, 당시 런던의 주교였던 그린달은 1560년 그를 사제로 임명했다. 그는 앞서 말한 저서를 영어로 번역하고 자기가 수집한 자료를 다듬는 일에 몰두했다. 그는 크랜머의 비서였던 랠프 모리스의 서류를 비롯하여 많은 새로운 자료들을 입수했었다.

 

'행위와 불후의 업적'은 1563년 3월 20일 출판되었다. 이 책은 출판되던 날부터 '순교자들의 책'으로 알려졌다. 폭스는 이 책의 출판으로 그는 크게 성공하였다. 그는 샐리스베리 성당에서 성직자록을 받았고, 1563년 5월 11일 심톤의 교구목사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재정적인 문제로 고생했다.

 

1570년 성 금요일, 엘리자벳 여왕을 파문한다는 교황청의 교서가 발표된 뒤, 폭스는 그린달의 명령에 따라 성 바울 교회에서 강력한 설교를 하여 카톨릭 교회에 대한 공격을 재개했다. '행위와 불후의 업적'은 1570년에 재판되었다. 성직자 회의에서는 이 책을 교회, 그리고 대주교, 주교, 집사, 부감독의 집에 반드시 비치하라고 결정했다.

 

1586년 폭스는 건강이 악화되어 많은 고생을 하다가 1587년 4월에 사망하여 런던에 있는 성 가일즈 교회에 매장되었다. 그의 아들 사무엘이 새긴 기념비가 지금도 그곳에 남아 있다.

 

폭스는 자신의 처지도 곤궁하고 넉넉지 못했으면서도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선을 행했으며, 언제나 명랑하게 살았다. 그의 아내는 18년을 더 살다가 1605년에 사망했고, 그들에게는 다섯 자녀가 있었다.

 

폭스는 많은 저서를 집필했는데 그 중에서도 후세 사람들에게 기억될 불후의 역적은 '순교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