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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 카이퍼의 생애

Joyfule 2021. 7. 24. 08:29



아브라함 카이퍼의 생애            


1) 카이퍼, 개혁주의를 만나다

아브라함 카이퍼는 1837년 10월 29일 네덜란드의 항구 도시 마슬라의스(Maasluis)에서 태어났다.
그 시대 네덜란드의 교회 모습은 다소 실망적이었다.
카이퍼가 성장할 당시인 19세기 중엽엔, 16,17세기에 걸쳐 네덜란드의 칼빈주의자들이 세웠던 6개의 대학 중 세 개가 없어졌고, 그 나머지 세 학교마저도 개혁신학이 아닌 자유신학을 따랐다.

카이퍼의 부친 역시 목사였다. 그 역시 그저 시대의 흐름에 거역하지 않던 국가교회 목사였고, 분명한 칼빈주의자가 아닌 다소 완화된 개혁주의 형태의 정통주의자였다.

카이퍼는 1855년 레이덴(Leiden) 대학교에 입학하여, 문학과 신학을 배우게 되었다.
성경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계시보다 인간의 이성을 높였던 근대주의(합리주의) 물결이 당시의 학풍을 주름잡았고, 카이퍼 역시 다르지 않았다.

이미 개혁신학은 하향세였고, 자유신학이 상승세였다.
레이덴 학교 역시 라우벤호프, 퀴에넌, 스콜턴과 같은 자유주의 신학의 대변자들의 수중 안에 있었다.
카이퍼는 아이러니하게도 그러한 자유주의 신학을 배웠다.
(라우벤호프 교수는 심지어 "나는 더이상 예수의 육체부활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했다고 한다.)

신학교의 권유로 칼빈과 라스코의 교회관에 관한 논문을 쓰게 되었지만, 카이퍼는 절대로 그 개혁자들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 과정을 통해 그에게는 교회에 대한 통찰력이 생겼다.)
비록 카이퍼는 그 논문으로 논문대회에서 금메달을 받는 영예와 명성을 얻게 되었다. 모더니즘적인 신학자로서 화려한 데뷔였다.

1862년 그는 레이덴 대학에서 스콜턴 박사의 지도를 받아 박사 학위를 받았다.
(자유주의 신학자였던 스콜턴 박사는 1861년 요한복음에는 요한이 쓴 것이 한 마디도 없다는 주장을 했다.)
카이퍼는 신학적으로 정통주의와 자유주의의 사이에 서 있었다.
그에게 있어서 예수는 성경에서 계시하는 바 대로의 구세주나 중보자가 아니라, 자신의 확신에 따라 적대자의 손에 넘겨진 숭고한 순교자였다.

이런 카이퍼가 어떻게 변할 수 있었는가...
1863년 여름, 그는 시골에 있는 베이스트 교회의 담임 목사로 취임을 하게 되었다(당시 25세).
카이퍼는 반(半)정통주의, 반(半)자유주의였고, 베이스토 교회의 교인들은 보수적인 정통주의 경향이었다.
그 교인들은 그리 열정적이지 않았다.
다만 그들은 그 젊은 목사에게 이런 충고 한마디를 했다.

"이 교회에서 목사님은 몇 명의 불평분자를 발견하게 될 겁니다. 그들은 특이하고도 비판적인 사람들입니다. 모든 목사들을 아주 비참하게 만듭니다. 그들은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하찮은 지위의 사람들이니까 전임 목사님들처럼 그들에게 별 특별한 관심을 두지 마십시요."

이 '불순분자'들은 바로 개혁주의파 교인들이었다.
비록 그들은 '오래된' 개혁주의 신앙체계를 갖고 있었지만, 질서정연한 인생관과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고, 인간의 구원에 있어서 어떤 인간적인 행위나 공로는 그것이 아무리 작더라도 결코 용납될 수 없고 오직 "완전한 주권적 은총"만이 인정될 수 있다는 확신에는 타협할 줄 몰랐다.

젊은 카이퍼 목사는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던 이들을 상대하면서 종종 논쟁도 벌였다.
하지만 그는 그 만남을 소홀하게 여기지 않았고, 점점 그들의 호의를 얻어 논쟁이 아닌 대화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카이퍼는 이 만남에서 말하기보다 듣기를 즐겼다.)
이런 대화를 통해서 그의 반(半)정통주의적이고 반(半)자유적이었던 신학적 견해는 건전한 정통주의로 옮겨갔고, 본질적으로는 개혁주의적인 입장으로 바뀌었다.

그간 막연하게 꿈꾸었던 교회개혁과 교회건설에 대한 꿈은 좀더 구체적으로 승화되었다.
카이퍼는 더 풍부한 개혁주의 신앙과 신학 지식을 얻기 위해 화란과 외국 신학자들의 책을 접하였고, 그렇게 칼빈과 재회(!)하게 되었다.

1866년에 출판된 라스토의 저작 두 권에 그의 라틴어 서문이 실리게 된 것을 계기로 그는 이미 지역교회 목사가 아닌 전국 국가교회의 목사가 되었다.
당시의 지역교회에는 서로 다른 신앙고백을 가진 여러 부류의 교인들이 '한 지붕' 아래에서 함께 지내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소위 '교회의 문제'가 항상 있었다고 한다.
각 지역교회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교회재판소가 있었는데, 1867년 총회에서 각 지교회의 권한을 강화하는 원칙(23조)을 발표함으로써 새로운 혁신의 바람을 가져왔다.
카이퍼는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우리 자신을 위해 투표권을 지녀야 하는가? 아니면 우리를 위해 일할 교회재판소에 권위를 부여해야 하는가? 23조를 시행하는 데에 대한 한 가지 질문'이라는 소책자를 통하여 이 문제에 영향력을 발휘하였는데, 이것은 그의 최초의 중요한 교회개혁활동이라고 볼 수 있겠다.

암튼 베이스트의 카이퍼는 교회와 국가가 밀착되어 있었던 16세기의 칼빈 시대에 관심을 쏟으면서, 본의 아니게 정치학과 정부를 연구하게 되었다. (아직 본격적인 정치활동은 하지 않고 있었다.)
베이스트에서 목회와 연구에 힘을 쏟던 카이퍼는, 그의 능력을 인정받아 1967년 6월 위트레히트 교회의 청빙을 받는다.
그는 4년간의 베이스트 목회를 정리하고, 도시 위트레히트로 진출하게 되었다.

카이퍼는 그를 변화시킨 베이스트 교회의 개혁주의자들을 떠나게 되었다.
그들은 그를 보내는 것을 섭섭해 했다.
특히 그 중에서도 카이퍼를 영적인 아들로 여겼던 발투스란 여인의 슬픔은 더했을 것이다. (카이퍼는 그들 중 그녀의 이름만을 기억하고 있다고 회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