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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과 신앙고백

Joyfule 2019. 6. 26. 11:51


 

      종교개혁과 신앙고백

 

 
  11로마 가톨릭 교회의 반 종교개혁 운동

교회의 개혁이 개신교 중심으로 일어난 것뿐만이 아니라, 로마 가톨릭교회 내에도 유사한 개혁의 물결이 도처에서 발생하였다. 이를 소위 반종교개혁(Counter Reformation)이라 부르는데, 이 반종교개혁은 내적으로는 교회를 갱신하고, 외면적으로는 개신교의 확산을 박해했으며, 적극적으로는 가톨릭교회의 확장에 심혈을 기울였다.
 
1. 반 종교 개혁 운동들
 
(1) 이사벨라 여왕과 스페인의 가톨릭 개혁 운동
 
1474년 스페인의 여왕 이사벨라는 그녀가 죽을 당시인 1510년대 까지 가톨릭교회의 개혁 운동을 이끌어 갔다. 당시의 수많은 성직자들은 대 영주의 위치를 가지고 있으므로 많은 부를 누리고 있었다. 때문에 영적 갈구를 채우는 성직의 직분에는 관심이 없었고, 또 수많은 하급 성직자들은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하였다. 수도원과 수녀원도 본래의 기능을 잃어버리고, 귀족과 고위 성직자들의 사생아를 돌보는 곳으로 전락해 버렸다.
교회를 개혁해 나가고자 결심한 이사벨라는 톨레도(Toledo)의 대주교 자리에 당시에 유명한 개혁 정신의 소유자 프란시스코 지메네즈 데 시스네로스(Francisco Jimenes de Cisneros, 1436-1517)를 임명하였다. 여왕과 대주교는 수도원과 수녀원, 그리고 교회를 향한 대대적인 개혁을 하였다. 부패한 고위 성직자들을 몰아냈다.
이때 이루어낸 대표적인 개혁의 결과물은 알카라(Alcala) 대학교의 설립과콤플루텐시안 폴리그롯(Complutensian Polyglot)의 출판이었다. 마드리드(Madrid) 근교에 위치한 알카라 대학교는 1500년 중반 가톨릭교회 내 개혁 운동을 이끌어 나간 중요한 인물로 알려진 세르반테스(Cervantes)와 로욜라(Loyola)를 배출하였다.콤플루텐시안 폴리그롯은 당시 뛰어난 학자들에 의해 편찬된 다국어 대역판 성경이다. 히브리어판, 헬라판, 라틴판. 전체 작품은 여섯 권에 달하였다. 구약이 4, 신약이 1, 그리고 히브리어, 갈대아어 그리고 헬라어 문법이 제 6권을 차지하였다. 이 작품은 1517년에 완성하여, 1520년에 출판하였다. 이 작품의 출판은 진정한 기독교 신앙은 성경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지메네즈의 사상의 결정체였다.
그러나 당시 이사벨라와 지메네즈에 의해 진행된 개혁은 교회와 제도적 개혁에 놀라운 변화를 가져왔으나, 결코 그들은 전통적으로 믿고 따르던 정통 교리에 대한 개혁에는 큰 관심을 표명하지 않았다. 종교 재판소를 통해 일체의 교리적 변화를 용납하지 못한 가톨릭 종교 개혁의 전형적 인물이 되었다.
 
(2) 교황 바울 3(1534-49)와 바울 4(1555-59)
 
클레멘트 3세를 이은 교황 바울 3세는 가톨릭교회의 반 종교 개혁에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신학보다는 점성술에 의존하고 족벌체제를 구축하였다. 10대이었던 그의 손자들을 추기경에 세우는 일을 서슴치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개혁 운동에 기여한 교황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은, 1540년 예수회를 공인하여 이들을 통해 선교에 힘쓰고 개신교 확장에 대항하게 했다. 금서 목록(Index of Forbidden Books)을 발행하여 가톨릭 신자들 읽어서는 안 될 책들을 수록하였다.
종교 재판소(Inquisition)를 설치하여 이단과 개신교 확장을 저지하였다. 1420년 스페인에서 이단 문제를 다루기 위해 교황의 허가아래 스페인에 설치하였다. 토마스 토르퀘마다(Tomas De Torquemada, 1420-98)의 주도하에 만 명이 처형되었고, 지메네즈 밑에서 약 2천 명이 처형되었다. 바울 3세는 바울 4세가 되는 추기경 카라파의 조언에 따라 1542년부터 종교 재판소를 어느 징겨에서나 이단을 대처하는 방편으로 세울 수 있음을 선포하였다. 1854년에 폐지되었다. 1545년 트렌트(Trent) 종교회의를 소집하였다.
 
(3) 이그나티우스 로욜라(Ignatius Loyola, 1491-1556)와 예수회(Jesuits)
 
16세기에 교회의 개혁을 부르짖으면 많은 수도원이 생기고 교황의 승인을 얻었다. 그중에 중요한 교단은 예수회(Jesuits)라 할 수 있다. 대부분의 수도원들은 고대로부터 전해지는 전통적인 수도원 규칙을 보다 철저히 그리고 엄격하게 지키려 하였다면, 예수회는 새로운 방법으로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려는 운동의 대표적인 그룹이었다.
이 예수회의 창시자는 이그나티우스 로욜라였다. 그는 스페인 귀족 출신으로 야망에 찬 군인이었다. 그러나 전투에서 부상을 당해 평생 다리를 절게 되었다. 그는 요양 기간에 경건 서적을 탐독, 종교에 대한 헌신을 결심하게 된다. 황제의 군사가 아닌 그리스도의 군사가 되기로 헌신하였다. 알카라대학교와 파리대학교에서 신학을 수업하였다. 1534년 그는 6명의 추종자들과 예수회를 설립하였다. 청빈과 독신을 주 강령으로 삼았다. 1540, 교황 바울 3세로부터 정식인가를 받았다. 로욜라는 그의 저서영성 훈련(Spiritual Exercises)라는 책을 예수회 단원들의 훈련 지침서로 사용하였다. 그리고 이 책을 통해 훈련된 자들에게서 3가지 서약을 받았다. 청빈, 독신, 그리고 순종을 서약해야만 했다.
그리고 예수회 활동의 중대한 3가지 목적을 세웠다. 첫째는 교육을 통한 교회 개혁, 둘째는 이단 특히 개신교와 투쟁, 셋째는 회외 선교였다. 예수회는 선교 분야에 있어서 놀랄만한 금자탑을 쌓았다. 19세기가 개신교의 선교의 황금기라 하면, 16세기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선교 황금기라 할 수 있다. 그 선두에 바로 예수회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스페인, 포르투갈, 프랑스 출신의 예수회 신부들은 중남미 아메리카, 북아메리카, 동남아시아 등지에 선교를 나갔다. 물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예수회 신부들이 순교를 당하기도 하였다.
예수회 선교사 마데오 리치(Matteo rich 1552-1610)1601년에 중국 북경에 도착하여, 6천여명의 추종자를 얻었다. 1700년에는 약 3십 만명의 가톨릭 신도가 있었다. 로욜라의 동료 프란시스 자비에르(Francis Xavier, 1506-1552)는 극동 지역에 선교한 대표적인 인물로, 1549년 일본에 복음을 전파하였다. 그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가톨릭 신앙을 가지게 되었다. 1593년 임진왜란 당시, 종군 신부로서 세르페데스(Gregory de Cerpedes)가 고니시 유끼나가(소서행장)가 이끄는 일본군대와 함께 한국 땅에 발을 내딛었다. 이 부대에는 기독교인들이 많이 있었다. 이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기독교의 복음이 일본의 칼과 함께 우리나라에 들어 온 것이다. 예수회는 1773년에 교황의 통제를 받아 한 때 해체되기도 했다. 그러다가 1814년에 다시 교단이 회복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2. 트렌트 종교회의(Trent Council, 1545-1563)
 
이 회의는 개신교 확장을 저지하고, 가톨릭교회 내 개혁을 주장하는 요구에 못이기는 상황에 이르자, 바울 3세는 15451213, 이탈리아 북부에 위치한 트렌트에서 종교회의 소집하였다.
 
(1) 트렌트 종교회의의 목적과 중요성
 
16세기 중엽에 놀라운 진보를 이룬 개신교 종교개혁에 직면하여 카톨릭 신자들은 자신들의 교회 상태를 점점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한편으로 성직 생활을 긴급히 개혁할 필요가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 개신교 교리에 대항하여 가톨릭 교회의 교리를 방어하고 정의 내릴 필요가 있었다. 그리하여 교황 바오로 3세는 15451213일 오스트리아 트렌트 라는 도시에 종교회를 소집했다. 긴 중단 기간을 거치면서(첫번째 중단은 1545-49, 두 번째 중단은 1551-52, 세 번째 중단은 1562-63) 트렌트 종교회의는 1563124일까지 25회의 공식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는 1563년에 종식되었다. 그러나 교황과 황제간의 권력 암투로 인해 긴 기간 동안 실제로 회의한 기간은 불과 몇 년에 불과하다고 한다(오직 3차례, 1545-1547, 1551-1552, 1562-1563; 나머지 기간은 정회). 그리스 교회와 개신교회는 참석하지 않았지만 이것은 로마 가톨릭교회가 주장하는 19차 연합 종교회의라는 세계적 종교회의이지만, 참석했던 주교가 70%가 이탈리아인이고, 철저히 교황의 통제에 의해 진행된 회의였다. 그러나 트렌트 종교회의가 즉각 모든 가톨릭교회에서 동등한 권위를 얻은 것은 아니었다. 1564126일에 발표된 피우스 4세의 교황교서 신의 축복(Benedictus Deus)은 트렌트 종교회의의 결정들을 엄숙하게 확인하고 이 회의의 결의들을 포함한 교리의 모호한점을 설명하는 독점적인 권리를 교황에게 넘겼다.
트렌트 종교회의의 결정들은 교령(decreta)과 법규(canones)로 분류된다. 교령은 카톨릭의 교리를 상세하게 진술한다. 법규들은 짦은 진술 형태로서 개신교회의 반대되는 견해들을 비난하고 항상 저주 받을지어다”(anathemasit)로 끝을 낸다.
가톨릭 관점에서 볼 때 트렌트 종교회의의 중요성은 3가지이다. 첫째 트렌트 종교회의는 수콜라신학의 결과들을 정착시켰고 스콜라신학에서 교회에 기여할수 있는 모든 것을 수집하였다. 둘째 트렌트 종교회의는 그때까지 결정되지 않는 특정한 교리적 문제점들의 결정을 내림으로 가톨릭의 신조를 정교하게 만들었다. 셋째 개신교의 가르침을 이단으로 낙인 찍고 정통신앙에 대한 명확한 진술문을 완성함으로써 트렌트 종교회의는 가톨릭 신자들에게 그들이 발전하는 개신교주의에 저항하는데 필요한 실제적인 주도권을 부여했다.
 
(2) 트렌트 종교회의의 교의적 결정들

교회 개혁에 대한 아주 중요한 결정들을 살피면, 성직 중임을 정죄하였고, 성직자 교육을 위한 신학원 설립을 결정하였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을 로마 교회를 대변하는 신학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이 회의는 성경만이 아니라 제롬의 벌케이트 라틴어 성경에 들어있는 위경과 정경적 성서들, 그리고 교회의 전통이 신자들을 위한 최종적 권위가 된다고 선언했다. 가톨릭교회는 두 가지 전통을 가지고 있음을 선포하였다.
교회는 이 진리와 계율이 기록된(written) 책들과 기록되지 않은(unwritten) 전승이란 그리스도의 입을 빌어 사도들에 의해 전수되었거나, 또는 사도들에게서 직접 전수되었고(성령에 의해 지시되었던, 그리고 손에서 손으로 전해 내려져 우리에게까지 이르게 된 것들을 말한다.(성경의 정경성에 관한 교령1546)
 
종교회의는 정통 교부들의 모범을 따라 경건과 경외의 동등한 재정을 가지고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모든 책들을...또한 상술한 전승들과 같이 받아 들이고 존경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왜냐하면 그 저자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전승들은 성경외에 다른 방법으로 신령하게 계시된 진리 또는 교훈들로서 그리스도 자신의 입의 말씀으로 또는 성령에 의해 구술되었다. 사실상 성경은 전승에 의해 즉 거룩한 모교회가...소유해 왔고 지금도 소유하고 있는 의미에 따라 해석되어야 한다. 그러나 성경과 전승은 교의의 확실한 근거들로 인정되지만 성경과 전승외에 다른 최고의 권위가 있으니 즉 성경의 참된 의미와 해석을 판단할수 있는 거룩한 모교회이다."
 
칭의에 있어서도, 인간은 믿음에 의해서만 의롭다함을 얻는 것이 아니라 믿음과 그에 따른 행위에 의해서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결정하였다. 선행을 구원의 조건으로 주장하였다.

칭의를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 안에셔 행해진 그들의 행위 자체에 의해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히 만족시켰고 ... 진실로 영생을 공로에 의해 얻었다.“
 
7성례와 화체설을 재확인하였다. 화체설에 대하여 이렇게 언급한다.
 
떡과 포도주의 축성에 의해 떡의 전체 물질이 우리 주 그리스도의 몸의 물질로 변화되고 포도주의 전체 물질이 우리 주 그리스도의 피의 물질로 변화된다. 이 변화를 거룩한 가톨릭 교회는 적절하고 타당하게 화체설이라고 칭한다.”
 
또한 연옥, 성인들의 기원(祈願, invocation)과 유물, 그리고 성상에 대한 교리들이 확인되었다. 연옥은 존재한다. 연옥에 영혼들이 감금되어 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자신들의 죄로 말미암아 일시적인 처벌을 완전히 속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신실한 사람들의 대리 기도(suffrages)에 의해서도 도움을 받지만 대체적으로는 제단의 용납 될 수 있는 제물에 의해 도움을 받는다. 트렌트 종교회의는 성경과 교부들의 고대 전승에 연옥 교리가 제시되어 있다고 주장하고 모든 주교들은 거룩한 교부들과 신성한 종교회의들에 의해 전해진 연옥에 대한 건전한 교리를 부지런히 가르치라고 요구한다. 또한 이 회의는 성인 숭배를 확인했다. “성인들이 기원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거부하는 자는 불경하게 생각 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트렌트 종교회의는 그리스도와 마리아와 그 밖의 성인들의 성상들에 대한 존경과 숭배를 드려야 한다고 선언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나타내는 존경은 그 성상들이 대표하는 원형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입을 맞추고 그 앞에서 머리를 가리고 몸을 엎드리는 방법으로 그리스도를 숭앙한다. 또한 우리는 성인들과 닮은 모양들로 성인들을 숭배한다.”
이 회의 결정 사항을 모아 1564년 소위 트렌트 신앙 고백을 채택하였다. 이 트렌트 종교회의의 의의는 소위 현대 로마 가톨릭 교회의 탄생을 선포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3. 30년 종교 전쟁과 베스트팔리아 평화 조약
 
1555년 아우구스부르그 협약이 독일의 통치자들 사이에 이루어졌다. 그 지역이 그들의 종교를 결정(Territorialism)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로마 가톨릭측과 루터측간의 평화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 협약에는 칼빈주의자들이 제외되었다. 이 협약이 깨질 것을 염려한 루터파와 칼빈파 개신교들이 1608년 복음주의 연합(Evangelical Union)을 결성하였다. 반대로 1609년에는 교황을 지지하는 측이 가톨릭 동맹을 구성하였다.
당시 북유럽 곳곳에서 종교와 정치 사이의 이중적 문제를 껴안고 투쟁이 일어났다. 그 와중에 1618년 보헤미아의 프라하에서 30년 전쟁의 도화선이 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보헤미아인들의 약 9/10가 개신교도들이었다. 반면에 그들의 왕 페르디난드 2(Ferdinand 2)는 독일의 황제요 열렬한 가톨릭 신자였다. 그래서 개신교도들을 아주 잔인하게 박해하였다. 개신교들이 프라하에 가서 항의하였다. 반대파 사람을 창문 밖으로 던짐으로 전쟁 발발의 도화선이 되었다. 1618년부터 1623년가지는 보헤미아 지역에서, 1625년부터 1629년까지는 덴마크 지역에서 전쟁이 극심하게 진행되었다.
드디어 전쟁은 1648년 베스트팔리아 평화조약(Peace of Westphalia)으로 인해 종식했다. 이 협약에 따라, 네덜란드와 스위스는 독립 개신교 국가로 인정되었다. 루터주의와 칼빈주의가 합법적인 종교로 인정받았다. 종교적 박해가 종식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