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과 신앙고백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는 세계 여러 나라에서 나온 신앙 문서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으며, 여전히 성경에 나오는 진리를 가장 탁월하게 요약한 문서로 손꼽히고 있다. 한국 개혁주의 교회가 채택하는 신앙의 표준 문서요, 예배와 교회 정치 제도, 교회 헌법의 기초를 이루고 있는 고백서이기도 하다. 따라서 한국 칼빈주의 교회의 신학, 예배, 교회 정치의 기초에 대한 연구와 비교는 소홀히 할 수 없다. 유럽에서 일어난 16세기 종교 개혁 운동의 연장선상에서 영국으로 퍼져 나간 칼빈주의 신학이 일궈 낸 놀라운 성취이기에 개혁 신학의 발전과 성장을 가늠함에 있어서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된다.
1. 청교도 신학의 대헌장
1625년 국왕이 된 이래 찰스 1세는 윌리엄 로드(William Laud, 1573-1645) 대주교와 손을 잡고 영국의 청교도들을 핍박하기 시작하였다. 1637년 새로 작성된 ‘공동 기도서’를 영국과 스코틀랜드 교회가 사용하도록 강요하였다. 이것은 로마 카톨릭이 하던 통일 체제로 회귀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청교도들은 거세게 반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국가 기관에서나 교회에서나 청교도들은 열세에 몰리게 되었다.
특별한 사건이 발생한 날은 1673년 7월 23일이었다. 스코들랜드 에딘 버러의 감독은 이 기도문을 강단에 가지고 와서 성찬이 집행되는 동안 예식서로 사용하였다. 이 지역 칼빈주의자들과 특히 야채를 판매하던 제니 게디스(Jenny Geddes)라는 여성도가 이런 성찬을 받을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그녀는 자신이 앉아 있던 작은 의자를 주교에게 밀어 던지면서 “당신은 내 귀에 미사를 들려주는 구려"라고 통곡하였다. 여기서 폭동이 시작되었다. 그 교회당은 스코틀랜드에서 가장 높이 여겨지는 중심교회, 성 질레스 대성당(St. Giles Cathedral)이었다. 혹자는 바로 이 제니 게디스가 의자를 집어 던진 사건이 결국 영국 왕실과 성공회의 붕괴를 초래 하였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아마도 노년에 접어든 요한 낙스는 그녀의 행동에 자부심을 느꼈을 것이다.
또한 그 당시에 정치 권력이 기독교 신앙을 가진 성도들과 충돌한 것은 스포츠 논쟁과 같은 사건이었다. 영국 청교도들이 가졌던 특별한 신앙의 모습은 철저히 주일날을 ‘안식일처럼’ 준수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1637년 ‘스포츠에 관한 선언’ (The Declaration on Sports)이 발표되어 주일날에도 각종 운동 경기를 허용하였다. 이것은 청교도를 모욕하는 법령이었다. 사회와 민간에서는 비윤리적인 것을 눈감아 주었고, 성공회는 갈수록 알미니안주의에 잠식되고 있었다. 또한 모든 교회를 중앙 집권적인 단일 감독 체제하에 둠으로써 청교도들은 심지어 직장에서도 로드 대주교의 강압적인 정책에 위협을 느껴야 했다. 1630년대 영국에서는 로마 카톨릭 체제로 회귀하려는 권력층과 그 사이에 곳곳에서 솟아 나온 급진적인 여러 종파들이 맞물려서 청교도들에게는 두려움과 공포가 매우 심각했다.
영국의 칼빈주의가 쇠퇴하는 데 결정적인 악영향을 미친 지도자는 대주교 윌리엄 로드였다. 그는 1633년 켄터베리 대주교가 된 다음에 잉글랜드 지역 내외에 널리 퍼져 있던 청교도들의 흔적을 말끔히 청산하고자 했다. 그는 오직 ‘성공회 체제’ 만을 고집하는 자였고, 로마 카톨릭에 대해서는 동정심을 갖고 있음이 분명하였다. 예를 들어 그는 로마 카톨릭 교회만이 유일한 그리스도의 교회라는 점은 부인하지만, 그러나 그는 믿음의 본질적인 교리에 있어서는 로마 카톨릭 교회도 역시 하나의 참된 교회라고 인정한다. 그러나 청교도들에게 있어서는 알미니안주의자들보다 로마 카톨릭 교회가 더 비성경적이요 왜곡된 집단으로 생각되었다.
이에 영국과 스코틀랜드의 청교도들은 국가적인 언약(the National Covenant, 1638)을 결성하였다. 특히 스코틀랜드 전지역에서는 새로운 기도문과 카톨릭화하는 시책에 저항하며 성경적인 개혁 신앙에 따라서 살고자 다짐하는 서약 작업이 전개되었다. 그들은 성경이 자신들의 언약 사상을 지지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여호수아 24:25, 왕하 11:17, 사 4:5). 이 언약 선서는 오늘의 동맹군에 가입하는 것과 흡사한데, 내용은 정치적이라기보다는 신학적인 유대감을 갖자는 것이었다.
긴장이 점점 고조되자 찰스 1세는 1640년에 국회를 소집하였다. 그와 로드는 국회를 설득하여서 청교도를 제압하는 자신들의 방법을 추인받고자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로 인해서 국회는 국왕이 내놓은 결정적으로 중요한 제안들을 기각해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 결과 시민전쟁이 발생하게 되었다. 찰스 1세를 지지하는 군대(the Cavaliers)와 청교도를 지원하는 전적으로 지지하지는 않지만 정부를 무너뜨리는 데에는 동의하였던 사람들도 많았다. 이제는 의회가 정치적인 우선권을 장악하였다.
그 당시에 의회는 청교도들과 그들의 이념에 동정적인 인사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하나님이 이 시대에 사용하신 인물은 올리버 크롬웰이었다. 그는 케임브리지를 대표하여 의회에 참석하였으며, 독립파 청교도였다. 그와 새로운 모델의 군대가 중심이 되어서 싸움은 1646년 찰스 1세의 군대가 패배하는 것으로 끝이 났다. 이제 크롬웰은 사사기에 나오는 지도자같이 되었다. 그는 장군으로서의 군사적인 용맹함과 정치가로서의 통솔력을 겸비한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나라와 교회의 건설을 염원하였다.
이제 새로운 언약파가 구성되었다. 왕당파를 좋아하지 않았던 그들은 결국 찰스 1세와 윌리엄 로드를 처형하였다. 시민 혁명으로 인해서 비로소 종교의 자유가 회복되는 계기가 주어지고, 의회는 올리버 크롬웰에게 왕관을 씌워 주려 했지만 그는 겸손하게 사양하였다. 대신에, 선출된 것도 아니요 국왕의 가문에서 나오지도 않은, 보호자(the Lord Protector)라는 호칭으로 불려졌다.
사회 전체가 군주 제도에서 벗어나 크롬웰이 지도하던 몇 년 동안 영국은 신앙의 자유를 누리면서도 가장 경건한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칼빈의 제네바나 낙스의 스코틀랜드와 같이, 신앙적으로 국회가 기도하고 교회 중심적으로 생활하는 운동이 나라 전체에 퍼져 나갔다. 앞서 찰스와 로드 추기경 시대에 사회 전반에 뿌려 졌던 신앙적인 죄악이 중지되고, 청교도 시대의 꽃이 피었다.
국회는 1643년 신학적이며 교회적인 문제들을 자문할 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문제에 자문을 구하기 위해서 웨스트민스터 총회를 소집하였다. 많은 청교도들이 국회에서 정규적으로 설교를 하였다. 이미 훌륭한 청교도 설교자로 정평이 나 있던 인사들이 스코틀랜드 대표로 선정되었다.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구성과 진행과정
국회는 1643년 6월12일,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라는 새로운 문서를 만들어서, 영국 성공회의 개혁을 위하여, 다시 말하면 칼빈주의 노선으로 복귀하도록 기초를 제공하고자, 신학자와 목회자들을 초빙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1643년7월1일부터 1648년 2월22일까지 5년 6개월 동안 런던 웨스트민스터 교회당에서 무려1163회의 모임을 가졌다. 여기에 초대된 151명의 대표들은 121명의 성직자들과 30명의 평신도들(20명은 하원 대표, 10명은 상원 대표)로 구성되었다.
교파별로 볼 때에 대부분은 장로교인들이었다. 지역 교회의 권위는 당회에 있고, 더 넓은 지역에 영향을 미치는 노회가 있으며, 최고 권위를 전국 총회에 두는 이 제도는 신약 성경에 있는 제도를 따라서 정비된 것이었다. 회중 교회와 독립교회의 대표들도 다섯 명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1630년대에 네덜란드로 피신했던 목사들이요 뉴잉글랜드 회중 교회와 연관을 맺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지역 교회의 자율권을 주장하면서도 다른 교회나 국가로부터의 분리를 주장하지는 않았다.
비록 성공회 체제하에서 목회하고 있지만, 좀더 지역 교회의 다양성과 자율권을 존중하는 방향으로 유연한 제도를 희망하는 온건파들도 있었다. 이들은 세속 군주들이 지역을 다스리듯이 운영되는 국가 교회 체제를 반대하고, 다만 교리와 설교에 있어서만 감독권을 시행하는 신약 시대의 목회자 제도를 희망하였다. 아일랜드 아르마의 대주교 제임스 어셔를 비롯하여, 십여 명의 성공회 대표들은 국왕 찰스 1세의 반대로 인해서 참석하지 못하였다. 비록 소수였지만 매우 학식이 있는 에라스티언주의 자들도 있었다. 이들은 특히 국회의 존경과 지지를 많이 받았다.
스코틀랜드 교회의 대표들은 투표권은 없었으나 발언권을 보장받았다. 찰스 1세에 압박을 가하는 일에 군대를 파견할 정도로 적극적이었던 스코틀랜드 의회는 새뮤얼 러더포드, 죠지 길레스피에, 알렉산더, 핸더슨 등 5명을 파송하였다. 그리고 잉글랜드나 아일랜드도 스코틀랜드처럼 동질의 예배, 권징, 정치 제도를 갖추게 되기를 희망하였다.
거의 100여 년의 장로교 제도를 유지해 온 스코틀랜드 교회는 회의에서 장로교회 제도를 옹호하였다.
이들 각 교파의 특색은 총회가 교회 정치 제도를 다룰 때에 첨예한 논쟁을 거듭하면서 자연스럽게 분출되어 나왔다. 신학적으로 볼 때에, 웨스트민스터 회의에 참석한 대표들은 전부 다 칼빈주의자들이었다. 신앙고백과 요리 문답에 합의한 이들 참가자들은 교리적인 통일을 이루고 있었다. 리처드 백스터 목사는 당시 이 회의에 참석한 대표는 아니었지만, 여기서 결정된 모든 사항에 대하여 철저한 개혁 신학의 내용으로 인정하고 전적으로 동의하였다. 그는 나중에 모든 감독파 사람들이 대주교 어셔와 같고, 모든 장로교인들이 스테판 마샬과 같으며, 모든 회중교회 성도들이 예례미야 부루스와 같다면, 교회의 분열은 곧 치료될 수 있다고 언급하였다.
국가 전체에게 영향을 미칠 철저한 개혁주의 교회 건설의 이념을 품고 거듭된 회의를 속개해 나갈 때마다 보통60명에서 70명 정도가 출석하였다. 매주 월요일 아침마다 참석자들은 서약문을 큰 소리로 낭독하였다. “나는 진심으로 다음과 같이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행할 것을 다짐하고 서약하나이다. 나는 이 회의에 참석하는 회원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에 가장 부합하는 것으로 믿는 바를 교리의 요점으로 삼을 것입니다. 권징의 요점에서 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과 그 분의 교회의 평화와 유익을 위하여 가장 최상의 것을 만들 것을 서약하나이다.” 때로는 기도와 금식에만 전적으로 매달리기도 했는데, 어떤 회원은 큰 소리로 외치기도 했고, 두 시간 이상을 기도에만 전념하기도 했다. 상당수 참석자들은 바로 그런 시간들이 가장 영적으로 보낸 시간들이었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이 회의에 참석한 회원 중에서는 단 한사람도 이단으로 정죄된 사람이 없었다. 단지 한 사람만 참가를 거절당했는데, 회의 참가시에 서약했던 의무를 저버리고 밖에 나와서 회의 내용을 누설했기 때문이었다.
초기 243차까지의 회의에서(1643-44) 주로 많은 발언을 했던 대표들은 열 아홉명으로 밝혀졌다. 그 중에서도 토마스 굳원은 초기 127차 회의에서 무려 357회 발언을 해서 단연 제1위였다. 그의 영향력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하버트 팔머는 140차 회의시까지 272회 발언을 하였고, 4위에 해당한다. 죠지 길레스피에는 89차 회의시까지 167회 발언하여 8위에 올랐다. 윌리엄 고그는 99차 회의까지 152회 발언하여10위에 해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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