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적인 교회
김요한 선교사
"너희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는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살전 1:3-4)
역사적인 종말의 교회이든 개인적인 종말의 신앙이든
우리 모두는 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믿음으로 접근해 가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너희들의 믿음을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늘 생각한다,
너희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그리스도의 형제들이다 참 귀하다'
칭찬하는 것처럼 우리도 같은 평가를 받아야 합니다.
요즘 들어와서 명제는 과연 내가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과연
믿음에 의한 동력으로 움직이는가 하는 점에 관심을 갖게 하십니다.
야고보서의 행함은 믿음이 뒷받침이 되는 행함이며 행함이 뒷받침이 되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살아서 행함을 만들고 그 행함이 살아있는 믿음을 증거 합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아집니다.
그러나 마지막 때의 교회는 예수그리스도를 밖에 모시는
라오디게아 교회와 같아지므로 그 믿음은 살아있는 믿음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관심이 많다고 믿음이 좋은 것이 아닙니다.
공부 못하는 아이들이 공부에 대한 말을 더 합니다.
공부 잘 하는 아이들은 공부 이야기를 하지 않고 공부를 할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주 예수그리스도를 모신 믿음의 사람들은
그 믿음을 일으켜 자신을 움직이는 원리를 익히느라 골몰합니다.
물건을 하나 사도 따라오는 매뉴얼을 익히느라 한참 애를 쓰는데
그리스도의 말씀이 내게 가까와 입에 있고 마음에 있는 사람이
그 말씀을 자신의 것으로 삼는 일에 결코 소홀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믿음의 분량을 잘 체크해서
그 믿음의 분량대로 살아가는 훈련을 반복해야 합니다.
그 믿음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 죄랍니다.(롬14:23)
그 다음엔 우리가 사랑을 행하면서 그 수고를 감내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한다는 것이 그리 만만하지 않습니다. 참 피곤합니다.
안타깝고 지루합니다. 그러나 수고를 하지 않고 사랑을 이룩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므로 수고할 수 있다면 끝까지 인내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소망 가운데 인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주와 맺은 언약을 굳게 붙잡고
그 분의 생명과 영광이 나타나시기를 간절히 사모하며 인내해야 합니다.
비록 율법적인 믿음으로 출발했지만 끝장을 봐야겠다는 욥의 인내는 대단합니다.
씨앗을 뿌리고 추수를 기다리는 농부의 인내도 여간 아닙니다.
질기고도 아름답습니다.
자, 이제 우리의 믿음과 삶을 날마다 체크해 보십시다.
과연 믿음으로 살고 믿음으로 이웃을 보고 있는가?
사랑을 위해 수고를 당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생각하고 있는가?
그리고 주 예수그리스도께서 기쁘게 임하시도록 우리는 인내하고 있는가?
이와 함께 '내가 살고 있는 때에 주님이 오시지 않으면 내가 주께로 가겠습니다.'
하는 통 큰 믿음이 필요할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