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성을 위한 ━━/세계문학

지(知)와 사랑11. - Herman Hesse.

Joyfule 2012. 9. 5. 10:56
 
  
 지(知)와 사랑11. - Herman Hesse. 

옮긴이: 최달식
펴낸곳: 교육문화연구회
다음날 아침, 키다리 에버하르트는 몇 대 얻어맞고서야 겨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만큼 곤히 잠이 들었던 것이다. 
아침 미사와 아침 식사, 수업에 그 누구도 늦은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골드문트의 안색이 말이 아니었으므로 마르틴 신부는 어디 아프냐고 물었다. 
아돌프가 경계하는 눈초리를 그에게 던졌기 때문에 골드문트는 아무렇지도 않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그리스 어 시간에 나르치스는 그에게서 잠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나르치스는 골드문트가 병이 났을 거라고 짐작했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를 주의 깊게 관찰하고 있었다. 
수업이 끝나자 나르치스는 골드문트를 불렀다. 
다른 학생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하기 위해 
심부름을 시켜 도서실에 보내고 그도 그의 뒤를 따라갔다.
  "골드문트"
  그가 말했다.
  "뭐든 널 도와줄 게 없을까? 너한테 무슨 곤란한 일이 생긴 것 같구나. 
너 혹시 어디가 아픈 건 아니니? 
그렇다면 널 침대에 눕게 하고 환자용 스프와 포도주 한 잔 보내 주지. 
오늘은 그리스 어도 머리에 안 들어갔을 거야."
  나르치스는 한참 동안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창백해진 소년은 안절부절 못하는 시선으로 고개를 떨구었다가는 다시 들고, 
입술을 실룩거리며 무언가 말을 하려고 했다가는 다물어 버렸다. 
그러고는 갑자기 옆으로 쓰러지더니 책상에 머리를 쳐박았다. 
그가 갑자기 참나무로 된 두 개의 조그만 천사의 머리 사이에 
고개를 처박고 울음을 터뜨렸다. 
나르치스는 당황하여 잠시 눈길을 딴 곳으로 돌려 버렸다. 
그는 한참 후에야 겨우 흐느껴 울고 있는 소년을 안아 일으켰다.
  "좋아, 좋아."
  골드문트가 지금껏 들어 볼 수 없었던 다정스런 말로 나르치스가 말했다.
"좋아, 친구여, 실컷 울렴. 울고 나면 이내 좋아질 거야. 자, 앉아. 
아무 말 하지 않아도 좋아. 
너는 오전 내내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도록 하느라 무진 애를 썼어. 
너의 행동은 정말 용감했었다. 
자, 이제는 울어라. 네가 지금 할 수 있는 최상의 방법은 우는 것뿐이야. 
안 울어? 벌써 다 울었니? 벌써 다 나은 거야? 자, 그럼 병실로 가자. 
침대에 누워 있거라. 저녁이면 씻은 듯이 낳게 될 테니까. 자 어서!"
나르치스는 학생들 방을 피해 병실로 그를 데리고 갔다. 
비어 있는 두 개의 침대 중에서 한 곳에 그는 누웠다. 
골드문트가 옷을 벗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 
그는 골드문트가 아프다는 걸 교장에게 알리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그는 또한 약속대로 스프와 포도주 한 잔을 주문해 놓았다. 
수도원의 오래된 관습인 이 두 가지 은혜는 가벼운 환자들에게 좋은 호응을 받고 있었다.
골드문트는 환자용 침대에 드러누워 어지러워진 머리를 정리해 보려고 애를 썼다. 
한 시간 전쯤만 하더라도 오늘 그를 
그다지도 피곤하게 만든 원인이 무엇인지 분명히 말을 할 수가 있었다. 
머리는 텅 비고 눈은 불타는 듯 고통스럽게 했던 
영혼의 아픔이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밝힐 수 있었을 것이다. 
어젯밤 일을 잊어버리기 위해 잡시도 쉬지 않고 힘든 노력을 계속했다. 
아니, 잊어버리려고 애를 쓴 것은 어젯밤의 일 그 자체가 아니다. 
그것은 또한 닫혀진 수도원에서의 어리석고도 즐거운 소풍도, 
숲속에서의 방랑도, 물방앗간에 이른 거무죽죽한 물이 흐르는 개울을 건너기 위해 만든 
미끌미끌한 다리도, 울타리나 창문, 골목길 등을 건너뛰어 오가던 것도 모두 아니다. 
그것은 소녀의 숨결을 느끼며 듣던 말과 소녀와의 악수,
그의 입술에 닿은 소녀의 입술 감촉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또 어떤 새로운 공포, 새로운 체험이 더해졌다. 
그것은 나르치스가 자기를 돌보아 준 것이다. 
그 곱고 고귀한 품위를 가진 나르치스가, 
울 것만 같은 가느다란 입술을 한 그 영리한 나르치스가. 
자신은 그 나르치스 앞에서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는 나르치스 앞에서 수줍어하다가, 머뭇거리다가 결국에는 울고 만 것이다. 
그리스 어나 철학이나 정신적인 사나이다움과 품위 있는 스토아적 평정, 
이같은 고귀한 무기로써 그 훌륭한 인물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버리기는 커녕 
보잘것 없이, 그의 앞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자신은 그것을 결코 용서치 못하리라. 
그리고 나르치스의 눈을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틀림없이 수치심을 느껴야만 하리라. 
울고 나니 크나큰 긴장은 풀어졌다. 
병실의 고요한 고독과 편한 잠자리는 썩 마음에 들었다. 
절망은 반 이상이나 사라졌다. 
한 시간쯤 지나자 수도자가 들어와서 밀가루 스프와 빵을 먹여 주었다. 
거기다가 또 보통 때 같으면 명절날 이외에는 못 먹는 붉은 포도주를 마셨다. 
골드문트는 실컷 먹고 나서 다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나 도무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얼마 동안 시간이 흐른 뒤 문이 조용히 열리며 나르치스가 들어왔다. 
그때 그는 잠이 들어 있었다. 
뺨에는 벌써 생기가 돌았고, 나르치스는 한참 동안 
사랑과 호기심과 약간의 선망의 시선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골드문트는 병을 앓고 있는 게 아니다. 
이제 내일부터 포도주를 보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 존재했던 장막은 이제 사라지고 
그들은 친구가 되리라는 것을 확신했다. 
오늘은 골드문트가 그를 필요로 하고 그의 봉사를 받고 있지만, 
그 자신이 약해져서 골드문트의 사랑과 도움을 필요로 할 때가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런 일이 있다면, 나는 이 소년에게서 그것을 받을 수가 있으리라, 하고 그는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