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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知)와 사랑13. - Herman Hesse.

Joyfule 2012. 9. 7. 10:15
 
  
 지(知)와 사랑13. - Herman Hesse. 

 옮긴이: 최달식
 펴낸곳: 교육문화연구회
나르치스는 누구보다도 분명하게 인간의 마음을 읽을 줄 알았다. 
특히 사랑하고 있는 이런 경우에 나르치스는 
한층 더 고도의 명백함을 가지고 읽을 수 있었다. 
정반대인데도 불구하고 마음속까지 이해하고 있었던 골드문트의 성질이 그에게는 잘 보였다. 
왜냐하면 그것은 나르치스 자신이 잃어버렸던 성질의 다른 면이었기 때문이다. 
나르치스는 그 성질이 공상이나 교육의 과오나 
아버지의 훈계 등의 딱딱한 껍질에 싸여 있다는 것을 믿고, 
복잡할 것 없는 이 젊은 생명의 비밀을 모두 다 훨씬 전부터 예감하고 있었다. 
그의 임무는 확실했다. 
말하자면 그것은 이 비밀을 그 당사자에게 알게 해주고, 
그 껍질에서 빠져나오게 해 본래의 성질을 다시 찾아 주는 것이었다. 
물론 그것은 괴로운 일일 것이다. 
그리고 더 괴로운 것은 그 때문에 이 친구를 잃지나 않을까 하는 곳이었다.
아주 천천히 그는 목표를 향해 다가갔다. 
수개월이 지났으나 서로 진지하게 이야기할 수도, 심오한 이야기를 나눌 수도 없었다. 
우정에 금이 가지는 않았지만, 두 사람 사이는 서로 떨어져서 그들의 포물선은 폭이 넓어졌다. 
눈뜬 사람과 장님이 나란히 걸어갔다. 
장님 스스로가 자기 자신이 장님이라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다는 것은 
차라리 그 자신을 위해서는 다행한 일이었다.
먼저 타개책을 강구한 것은 나르치스였다. 
그것은 그 당시 마음이 흔들리어 허덕이고 있었던 소년을 
자기에게 몰아댄 것은 어떤 경험이었던가를 캐물으려고 했을 때였다. 
캐내는 일은 생각한 것보다 쉬웠다. 
골드문트는 벌써부터 그날 밤의 경험을 참회하고 싶은 기분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마음놓고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은 원장 이외에는 없었다.
하지만 원장은 그의 고해 신부가 아니었다. 
그래서 나르치스가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을 때 
두 사람이 맺어지게 되었던 시초의 사건을 나르치스가 
골드문트에게 상기시켜 몰래 그 비밀을 건드리자 상대는 솔직히 말했다.
 "당신이 성직을 아직 갖지 않아서 참회할 수가 없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나는 참회를 하고 나서 그 사건에서 해방되고 싶었습니다. 
그로 인해 벌을 받는 것도 사양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나의 고해 신부에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신중하고 빈틈없이 나르치스는 파고들어갔다. 
지나간 발자취는 발견되었다.
  "네가 병이 난 것 같아 보이던 그날 아침을 말하고 있는 거니?"
  나르치스가 신중하게 계속 파고 들어갔다.
  "벌써 잊은 건 아니겠지? 그때 우리는 친구가 되었었지. 
나는 가끔 그때 일을 생각한단 말이야. 
아마 너는 눈치채지 못했을 테지만 나는 그때 정말 당황했었어."
  "당황했었다구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골드문트는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당황한 쪽은 오히려 저였어요. 
뻣뻣이 선 채 훌쩍거리며 아무 말도 못하다가 울음을 터뜨린 것은 제 쪽이였으니까. 
나는 아직도 그때의 일을 부끄러워하고 있어요. 
나는 두 번 다시 당신의 눈앞에 나타날 수 없으리라 생각했는걸요. 
당신 앞에서 불쌍하게 맥없이 쓰러졌다는 걸 생각하면요."
나르치스는 조금씩 다가섰다.
  "네가 불쾌했다는 것은 알고 있어. 
너처럼 야무지고 용감한 녀석이 낯선 사람 앞에서, 
더구나 선생 앞에서 울음을 터뜨렸다는 사실은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지. 
아니, 나는 그때 네가 병이 들었다고 생각했지. 
열이 심하면 아리스토텔레스라도 이상한 행동을 했을 거야. 
그러나 너는 진짜로 병이 난 건 아니었어. 열도 전혀 없었거든. 
그래서 넌 부끄러워하고 있는 거야. 열에 지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사람은 없어. 
안 그래? 너는 무슨 다른 일에 대한 패배감 때문에 부끄러워한 거야. 
대관절 무슨 특별한 일이라도 있었니?"
골드문트는 약간 주저하는 듯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다. 
당신이 제 고해 신부라고 생각하게 해주십시오. 
언젠가는 말해야만 되는 일이니까요."
고개를 숙인 채 그는 친구에게 그날 밤의 사건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후에 나르치시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사실 '마을에 간다'는 것은 금지되어 있지. 
하지만 금지되어 있는 것이라도 얼마든지 할 수가 있고, 또 그것을 비웃을 수도 있는 거야. 
안 그러면 참회라도 할 수 있는 일이지. 
그러면 그 일은 그것으로 모두 끝나. 아무런 관련이 업어지지. 
대개의 학생들이 하는 것처럼 넌들 한 번쯤 
그런 사소한 어리석은 짓을 하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단 말이지? 
그것이 그렇게 나쁜 일인가?"
골드문트는 자제력을 잃고 화난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당신은 정말 선생 같은 말씀만 하시는군요. 
당신은 무엇이 문제가 되는지 잘 알면서 말이에요. 
물론 저도 수도원의 규칙을 어기고 학생들의 바보스런 장난에 가담했다고 해서 
그것이 그다지 커다란 죄악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물론 그것이 수도원 생활의 한 가지 예행 연습은 아니었다고 해도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