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가랴(33) 참된 리더가 되는 길 (슥 11: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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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잡혀 먹히는 축복의 원리 >
11장은 메시야가 오실 때 인간이 어떤 모습이 될지를 묘사하면서 먼저 사람들이 하나님이 없이 자신의 영광과 아름다움을 즐김으로 패망할 것을 예언합니다(1-3절). 바로 이어서 목자들이 무서운 타락상을 언급합니다. 타락한 목자들은 양떼들을 사서 잡고 또한 양떼들을 팔아서 자기 배를 채우며 양떼들을 불쌍히 여기지 않습니다(4-5절). 결국 하나님의 진노가 그 땅 거민에게 임하고 이웃 나라들이 그들을 쳐도 하나님이 건져주지 않습니다(6절).
그때 하나님이 친히 양떼를 먹이시는데 특이한 행동을 취하십니다. 즉 막대기 둘을 취해서 한 막대기는 ‘은총의 막대기’라고 부르고 다른 한 막대기는 ‘연락의 막대기’라 부르며 양떼를 먹입니다(7절). 반면에 타락한 지도자들은 하나님이 끊으십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위선을 싫어했기 때문이고, 또한 그들도 겉으로는 하나님을 찾으면서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미워했기 때문입니다(8절).
참된 목자는 ‘잡힐 양떼’처럼 행동하는 목자입니다. 목자는 ‘잡는 사람’이 되지 말고 ‘잡힐 양떼’가 되어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이 친히 먹여주시는 ‘은총의 역사’가 나타나고, 사랑과 이해를 통해 마음과 마음이 연결되는 ‘연락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양떼를 잡아먹으려고 이 땅에 오시지 않고 잡혀 먹혀서 성도들의 마음에 들어오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 방법이 사람을 변화시키는 최적의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남편이 출근하면서 아내를 잡아먹을 듯이 화를 냈습니다. 그때는 남편에게 잡혀 먹힐 양처럼 미안한 표정을 짓고 말하십시오. “여보 미안해요.” 그렇게 어린 양처럼 잡혀 먹히면 영적으로 남편의 마음속에 들어가 버립니다. 그러면 남편은 자나 깨나 아내에게 더 잘해주려고 하면서 ‘은총의 역사’가 생기고, 아내를 더 이해하고 사랑하게 되면서 ‘연락의 역사’가 생깁니다. 그 원리가 바로 ‘잡혀 먹히는 축복의 원리’입니다.
< 참된 리더가 되는 길 >
목회란 간단하게 말하면 ‘잡혀 먹히는 것’입니다. 현대 성도들은 목회를 ‘목회자가 카리스마를 가지고 양떼를 잡아먹는 것’으로 오해합니다. 목회자도 그렇게 오해하고 성도들도 그렇게 오해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목회는 ‘잡혀 먹히는 것’입니다. 결국 영적인 의미로 목회지가 살찐 것보다 살이 안 찐 것이 거부감이 없습니다.
목사는 어렵게 개척교회를 할 때 가장 목사다운 모습이 나옵니다. 그러다가 교회가 커지면 ‘목사다운 모습’은 점차 사라지고 ‘군주다운 모습’이 나타납니다. 결국 목사는 개척할 때 가장 깊이 교인들의 마음속으로 들어갑니다. 개척의 길은 눈물 없이는 못 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때 성도는 목사님의 눈물을 잊을 수가 없고 눈만 감으면 목사님이 생각납니다. 그때 신비한 평안과 치유가 생깁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은 개척교회를 외면함으로 그런 신비한 축복의 과정과 역사를 놓치고 있습니다.
반면에 성공한 목사에게는 군주 같은 모습과 득의한 표정이 나타납니다. 성숙한 교인은 그 모습도 사랑하지만 미성숙한 성도에게는 그것이 이해되지 않습니다. 게다가 불신자에게는 그 모습이 거부감을 주고, 극력 기독교 반대자들에게는 그 모습이 비판의 먹잇감이 되면서 결국 전도를 막습니다. 그래서 목회자는 항상 다짐해야 합니다. “언제나 잘 잡혀 먹혀서 교인의 마음속에 들어가자.” 잡아먹으려고 해서 교인의 마음에 못 들어가면 그저 ‘선생’일 뿐이지만 잡혀 먹혀서 교인의 마음에 들어가면 비로소 ‘목자’가 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군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요 10:11-12).” 선한 목자는 먼저 죽어줌으로 양떼를 지킵니다. 그때 성도들은 생각합니다. “그때 목사님이 나를 위해 죽었지.” 그러면서 영원히 그 목사는 교인의 마음속에 들어갑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죽으셨기에 우리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계신 ‘주님’이 된 것입니다.
ⓒ 글 : 이한규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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