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성을 위한 ━━/김요한목사

참 기도를 하고 있는가?

Joyfule 2024. 5. 28. 12:44



참 기도를 하고 있는가?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15:7절)

 

 지금의 교회는 본성적인 경외감으로 하나님을 믿고 그 말씀을 배워

말씀을 자신의 의지로 순종하려는 소위 지성적 경건주의들과 성령을

받아 능력으로 행하여야 한다는 감성적 열광주의로 크게 분류가 됩니다.

이를 테면 예수 믿는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거나

방언을 받아야 성령이 임한 거라고 개구리 같은 소리로 기도하라는 겁니다.

이쪽도 저쪽도 하나님이 초청한 자리에서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신앙생활을 하는 기술만 늘어나 시냇가에 조약돌처럼 반질거리기만 합니다.

이를 테면 어떤 목사가 중병이 걸려 불안하고 두려워 하나님께 평안을

온 종일 구하니까 드디어 하나님이 평안을 주셨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이런 차원의 목사가 바로 진리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만일 진리를 안다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하나(에이레네)가 되었기에 생리적인 두려움은

누구에게나 있는 거지만 하나님과의 화평은 하늘에서 똑똑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의롭게 되어 하나님과 화평을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영어로 이 부분을 ‘We have peace with God through our Lord

Jesus Christ‘(롬5:1)라고 되어 있습니다. 평화를 내가 이미 가지고 있단 말입니다.

 

 말씀이신 주님께서 육신으로 오셔서 천국복음을 전파하고 제자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사신 다음에 승천하시고

약속대로 다른 보혜사 진리의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주님이 오셔서

말씀하신 그 계명대로 진리의 성령이 오시므로 우리에게 되게 하십니다.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셔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아버지 하나님께 나아가게 하십니다.

그리스도 안에 우리가 있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심을 알고 아버지

하나님과 하나가 된 것을 알게 하십니다. 이 하나가 되는 계명을 지키게 하시므로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그리스도께서 체화(요1:14)되어 가므로 아버지와 아들이

거하는 하나님의 집이 되고 이 약속을 지켜 세상이 얻지 못하는 평안을 얻습니다.

육신에 속한 우리가 영화(靈化)되어 영이신 아버지와 아들과 관계를 맺습니다.

바로 포도나무 뿌리이신 아버지께로부터 공급되는 생명의 진액이 그리스도를 통해

가지인 우리들에게 전달되는 신기한 매커니즘의 관계입니다. 이는 반드시 실재입니다.

 

 근간에 몇 설교를 들어보니 멜기세덱의 반차인 대제사장께 나아가라고는

하는데 어떤 과정을 통해 그 대제사장에게 붙잡혀 은혜의 보좌로 나아가는지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더군요. 또한 기도하라고는 하는데 기도가 뭔지 설명하지

못하는 것을 보기도 합니다. 새 언약이 발효된 오늘날의 기도는 구약의 이스라엘과

같은 기도는 아닙니다. 그들은 먹고 마시고 입는 것들을 구하고 땅의 것을 구합니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임하신 다음에는 그 되게 하심을 따라 주의 이름을 부릅니다.

성령이 임하신 목적은 하늘과 땅을 이으신 주님의 진리의 말씀을 깨닫게 하므로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보좌에 앉으신 주님의 이름을 부르므로

그 때마다 구원을 받게 하려 함입니다(행2:21) 부르는 것이 현재이므로

구원을 받는 것도 언제나 현재입니다. 기도는 자신이 저수지와 같이 잔뜩

담는 것이 아니라 저수지에 물꼬를 대는 샛강이 되는 정신적인 작업입니다.

무엇이든지는 바로 주님 자체를 구하는 것이며 이 기도는 분명한 실상입니다.

 

 주님께서는 가지인 우리가 충분하게 먹어야만 열매를 맺을 수 있음을 아십니다.

그래서 주께서 하나가 되게 하신 그 계명을 지켜 그 사랑 안에 거하면 주의

기쁨이 우리에게 충만하게 되어 반드시 열매로 드러나도록 하십니다(요15:10-11)

그러므로 기쁨이 없으면 평강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증거이며 평강이 없음은

하나님의 의가 그 안에 나타나지 않는다는 뜻이며 의가 없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은총을 따라와서 그리스도 안에 발견이 되는 그 날의 믿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평안을 빈다고 말하거나 은사를 달라고

조른다거나 하는 하나님의 집안에서는 도저히 있지 못할 일이 일어나는 겁니다.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진리의 성령으로 아들 안과 아버지 안에 조인(Join)이

되면 우리가 느끼는 느낌이 바로 평안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으로

돌아오므로 하나님께서 안식을 하시고 우리에겐 평강으로 나타나는 겁니다.

이는 묵시적인 감정으로 즐기는 해프닝이 아니라 진리 안에 거룩하게 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아버지 하나님과 하나가 된 계명을 지킬 때에

얻는 구원이며 상급과 삯입니다. 하나님은 이기면 상을 주시고 일을 하면

삯을 주십니다. 만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에 자신을

맡겨 십자가로 자신이 거듭나서 새로운 피조물로 의와 거룩을 얻은

하나님의 자녀로 인침을 받았다면 주의 이름을 담대히 부르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 무엇을 구하는 간접목적이 아니라 바로 주님을 구하는 직접목적이

되는 겁니다. 이와 같은 기도를 잠언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

이것이 내 몸에 양약이 되어 네 골수를 윤택하게 하리라”(잠3:6-8)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내가 지고 나를 부인하고 주께로 돌아오는 것이

진정한 경외이며 회개입니다. 그러면 주께서 생명의 진액을 링거와 같이

공급하시고 골수를 윤택하게 하므로 온 몸에 그 생명의 기운이 가득하게 됩니다.

기독교가 이방인의 기도와 같이 땅의 것을 구하든가 아니면 묵시적으로

상상하듯 기도하므로 흡사 다른 종교의 명상과 별반 다를 바가 없어 보입니다.

우리의 손가락이 손바닥에 붙어 연결이 된 것을 우리가 알고 있듯

우리가 포도나무이신 그리스도께 붙어 있는 것도 그 만큼 실재입니다.

진리의 성령은 이를 알게 하므로 예수께서 가르치신 그 말씀이 우리에게

이루지게 하므로 실제로 적용이 되어 그리스도 안에서 주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에

그 이름 안에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우리에게 주어지는 실상의 참기도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