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성을 위한 ━━/김요한목사

그 날에는 지금까지와 다른 기도를 하라

Joyfule 2024. 5. 31. 12:00



그 날에는 지금까지와 다른 기도를 하라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16:24절)

 

로마서 강해를 듣고 12년이나 산 기도를 했던 분이 그 동안 헛 기도 한 것이

억울해서 4시간이 울었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이방인의 기도이였지요.

유대인은 하루 세 번 기도하는 게 그들의 일상이며 자랑이기도 했습니다.

제가 무슬림 지역에 3년을 지내면서 그들의 지도자들과 교제를 많이 했는데

그들이 하루 5번이나 기도시간을 갖지만 제가 당신들 플라스틱 무슬림이야 하고

농담으로 놀리기도 했습니다. 사실 지금 교회에서 기도제목이라고 내 거는 것을

보면 낯이 뜨거워지고 플라스틱 기독교인 곧 표면적인 기독교인이 많은 걸 봅니다.

유대인의 기도나 회개를 따르면 그건 유대인과 같은 외식하는 플라스틱들이며

표면적 신자의 기도가 됩니다. 그건 하나님의 형상 곧 씨와 DNA가 없는데 아무리

부르짖어 봐도 주의 기쁨이 우리 기쁨이 되어 충만하게 되는 말씀이 성취되지 않습니다.

그 안에 있는 형상에 따라 형체 곧 모양에 변화가 나타납니다. 그 증거가 바로 기쁨입니다.

 

그러려면 주님께서 가시고 난 뒤에 진리의 성령이 오신 그 때의 기도를 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않았다(요7:6)고 하시면서 주님이 말씀하시는 그 때는

주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난 다음에 성령이 오신 다음에야 비로소 주를 믿는 자의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임무교대를 하신 때입니다.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요16:16) 하신

말씀대로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사신 다음에 승천하신 후에 진리의 성령을

보내셔서 우리 가운데 임마누엘 하십니다. 예수로 우리를 죄에서 속하시고(마1:21)

성령의 기름부음으로 그리스도로 우리 가운데 임하십니다. 주의 속죄를 죄 사함을

받았지만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계시지 않으면 하나님의 형상이 그 속에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창조의 계획(창1:27-28)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말씀이

육신으로 오신 주님께서 가르치신 말씀이 진리의 성령이 오심으로 이루어집니다.

 

예수 믿고 죄 사함을 받았다고는 하나 그리스도 안에 영생을 얻은 생명이

내주하는 역사가 없으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므로 옛 사람은

점점 사라지고 그리스도 안에 새로운 피조물로 임무교대가 안 됩니다. 그래서

예수만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은 속죄만 믿을 뿐 그리스도를 안에 모시지 않으므로

아무리 오래 신앙을 해도 조약돌처럼 반질거릴 뿐 하나님의 형상 곧 그 속성에

의한 형체의 표현 곧 몸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겁니다. 진리의 성령은

우리에게 임하시면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십니다(요16:13) 진리는 생명으로 인도합니다.

그 생명은 주와 하나가 되어 그 영광에 나아가게 합니다. 그래서 진리의 성령은

주의 영광을 나타내십니다(요16:14) 성령이 탄식하시며 주의 뜻 곧 그 분이

미리하신 기도(요17)의 뜻을 따라 친히 탄식하며 기도하십니다(롬8:26) 성령의

탄식은 이방인의 기도에 익숙한 우리들에게 그 형상을 본 받도록 하시는 기도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행불행이나 형통이나 불통이 다 합산이 되어 유익이

되는데 하나님께서 미리 아신 자들이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기 때문입니다(롬8:28-29)

 

우리는 아담의 타락한 속성을 가졌기 때문에 할 수 있으면 하나님을 하늘에 모시고

믿으려는 악성과 악습이 있습니다. 비록 속죄를 받았다고는 하지만 체질이 바뀌지 않아서

그리스도를 안에 모시고 그를 경외하고 존중히 여기므로 자신을 부인하고 주님을 시인하는

믿음이 오랫동안 제대로 정착이 되지 않습니다. 어쩜 제게도 제일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남에게는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 나는 아니고 주님이시다고 발표를 하지만 돌아서면

나요 하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대외 선전용일 뿐 그렇게 살아지는 것이 아니더라고요.

그러나 환난과 인내와 연단을 통해 드디어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라는 해산의 고통을

겪은 후에 비로소 진리의 성령과 친근하게 되어 주님께 붙잡힌 것을 붙잡으려고

주의 이름을 부르며 그 앞에 엎드려 말씀을 들으며 무릎을 꿇고 경배를 드리게 됩니다.

진리의 성령이 시어머니와 같이 잔소리꾼 같이 여기다가 이제 동반자와 같이 친해집니다.

이와 같은 상태에서 주의 이름을 간절히 부르면 의와 거룩과 평강이 순차적으로

이루어져 전개가 되면서 주의 기쁨이 우리 속에 충만해 집니다. 그러면 노래를 부릅니다.

호모슈마돈이라는 말은 호모로게오의 입술로 시인하는 정도가 아니라 큰 함성입니다.

우리가 진리의 성령을 모시고 주의 이름을 부를 때에 이와 같은 고함을 칠 수만 있다면

그 외의 모든 문제는 다 조무래기가 되고 맙니다. 복입니다. 그 복에 분복은 따라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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