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교도 인물연구
토마스 굳윈(Tomas Goodwin, 1600-1680)
1600년 노르폴크에서 태어난 토마스 굳윈 목사는 어린 시절부터 강렬한 종교분위기에서 성장하였다. "여섯살의 나이에 ...그는 그의 안에서 성령께서 역사하심을 느끼게 되었고 자신의 죄에 대해 슬피 울었다. 그 집의 하인은 굳윗이 일곱 살때 지옥의 고통이 어떠한지를 확실히 깨닫게 해주었다."
그의 전 생애 사역을 특정지워준 영적인 성숙은 케임브리지에 있는 그리스도 대학에 있을 대 시작되었다. 그는 1613년 열 세 살의 나이에 대학에 등록하여 그 후로 수많은 명망이 있는 청교도 지도자들의 영향을 받았다. 그리스도 대학에서는 폴 베인즈가 퍼킨스의 뒤를 이어 연구교수로 활동하였으며 친근감을 주는 사람이었다. 그는 영혼을 회심시키는데 탁월한 재능을 발휘하였다. 굳윈의 영적인 성장은 정통 청교도주의자들과 더불어 시작된 것이다. 열네살 때 굳윈은 '기독교강요'를 읽고 "오, 이 책의 일부분을 읽는 것만으로 도 나에게 얼마나 감동이 되는가"라고 감격했으며, 또한 그리스도대학의 경건한 사람들을 보고는 "내가 저들과 함께 하늘나라에 갈 수 있다면"이라고 흥분하기도 하였다.
1616년에 굳윈은 문학학사학위를 받는다. 그러나 이전에 그는 유혹에 빠져 하나님의 주권적인 능력 대신에 인간의 이성과 의지력을 의존하기 시작했다. 그는 1620년 프레스톤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다. 그는 한 때 인간 이성을 신뢰하였으나 거기서 헤어 나와 그 뒤로는 자유의지 관념과 대항하여 싸웠다.
1620년에 그는 문학석사학위를 받고 캐더린 홀에 연구원 겸 강사로 부임하였다. 그 후 8년간을 캐더린 홀의 연구원으로 머물면서 굳윈은 능력있는 설교자가 되었다. 1628년 프레스톤이 죽자 굳윈은 프레스톤의 뒤를 이어 트리니티 교회의 강사로 발탁이 되었고
1632년에는 그 교회의 목사가 되었다. 1634년 교권을 쥔 당국자들로부터의 강한 압력에 견디다 못해 사임하게 되었다. 그리고 난 다음 그는 회중교회에 대한 확신을 더욱 강화시켰다. 런던에서 회중교회를 설립하고 10년의 목회 기간 동안 굳윈 목사는 설교가로서 명성을 얻었다.
1650년에는 의회가 그를 옥스퍼드의 막달렌 대학 총장으로 임명하였다. 굳윈 목사의 학문의 깊이와 넓이는 목회자 후보생들을 훈련시키는데 적합한 인물이었다. 왕정복구시대후 그는 런던으로 돌아가서 20년 동안 목회하며 여생을 보냈다.
굳윈은 그의 온화한 성품으로 인해 모든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그의 저서로는 "중보자 그리스도에 관한 강론 (A Discourse of Christ Mediator)"
"땅위의 죄인들을 향한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의 마음: 인간의 성품을 입고 영광 중에 온갖 질병과 죄와 비참 속에 있는 그의 지체들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은혜로우신 섭리와 온화한 사랑에 대한 논고"
"땅위의 죄인들을 향한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의 마음( The Heart of Christ in Heaven Towards Sinners on Earth)"의 목적은 치열한 투쟁 가운데 그리스도의 삶을 살고 있는 신자들에게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함이다
그 책에서 굳윈은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에서도 땅위에 있는 우리들을 염려하고 계시며 그 분의 마음은 하늘로 올라가셨지만 땅위에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같은 감정을 표출하시므로 오히려 그 감정을 더 풍부하게 표현하고 계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