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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상의 예배는 기도이다.

Joyfule 2014. 8. 23. 00:16

 

 

 

최상의 예배는 기도이다.

 신상래 목사

 

예수를 믿고 교회에 오면 가장 많이 하는 신앙행위가 바로 예배이다. 천국에 가는 자격이라는 것도 주일날 예배에 참석하는 것이고, 교회에서 정한 예배에 참석하는 것이 목회자들이 가장 많이 하는 요구사항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교회에 오면 다른 것은 몰라도 예배 하나는 열심히 참석하고 있다. 여하튼 예배에 성공하라는 근본도 없는 말이 교회에서 판치고 있으니, 목회자들이 얼마나 예배를 강조하는 지 가늠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성경적인 예배의 모습은 과연 무엇일까? ‘예배하다라는 말은 헬라어로 프로스퀴네오라는 단어인데, 이 말의 의미는 절하다’, ‘경배하다’ ‘예배하다라는 뜻이다. 예배하다라는 원래의 뜻은 흠모하는 대상에게 존경을 표하는 행위인 것이다. 예배라는 말을 번역한 헬라어는 또 있다. ‘라트레이란아라는 헬라어인데, 원래의 의미는 의식혹은 제사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예배혹은 예배하다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조금씩 다른 의미였지만 같은 말로 번역이 되어, 한글성경에서는 그 의미의 차이를 알 수 없게 되어버린 게 아쉽다.

 

구약시대의 예배의식이 자리 잡은 것은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셔서 제정한 제사법에 의해서였다. 그 전에는 어떤 방식으로 제사를 하라고 하신 적은 없었다. 단지 아브라함과 그 자녀들은 가는 곳마다 제단을 쌓고 소나 양을 죽여 제물(고대의 제사에는 짐승을 죽여 제물을 삼은 것인 일반적인 풍습이었음, 필자 주)을 드려서 제사를 드렸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는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번제로 제사로 드리라고 한 것을 보면 그리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그 후에 모세를 통해 이 제사법이 더욱 꼼꼼해지고 세밀해졌다. 그러므로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을 경배하고 예배하려면 소나 양을 가져와 제사장에게 주어 죽여서 번제를 드리는 것이 일반적인 예배(제사)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희생의 제물이 되신 사건이후에는 소나 양을 죽여 제사를 드리는 제사법이 더 이상 무의미해졌다. 그전에는 죄를 지을 때나 절기 때마다 소나 양을 죽여 제사를 드려 죄의 용서함을 받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모든 죄가 용서함을 받았기에 더 이상 짐승을 잡을 필요가 없어졌다. 그래서 사도들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또 다른 제사의식을 만들어야 했다. 그래서 예수님이 명령하신 성만찬이나 세례를 의식화 하여 예배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구약시대의 명절에 하던 기도나 찬양을 첨가하여 나름대로 예배의식을 만들었다. 그러나 중세시대의 가톨릭교회의 부패로 종교개혁이 일어나자, 종교개혁자들은 일반교인들이 성경에 무지해서 이런 폐단이 생겼다고 여겨 예배의식의 중심에 설교를 집어넣게 된 것이다. 이렇듯 예배의식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께 경배를 드리는 일정한 의식으로 만들어졌으며, 시대의 흐름에 따라 예배의 요소들이 바뀌면서 지금에 이른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예배와 예배의식과는 다르다. 예배는 하나님을 경배하는 행위이며, 이를 의식화(儀式化) 것이 지금의 예배의식(Worship service)인 셈이다. 그러므로 경배를 드리는 마음이 없이는 예배의식에 참여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제사법을 마련해 주셨지만, 신약시대에는 현재의 예배의식을 거행하라고 하신 적이 없다. 왜냐면 구약시대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하나님을 경배하는 행위에 대해 무지하였기 때문에, 초등학생을 가르치듯 어떤 의식(儀式)을 제정해서 하나님을 경배하라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신약시대에는 예수님이 오셔서 하나님의 뜻에 대해 많이 알려주셨고, 그 후에 성경의 완성되어 모든 사람들이 읽고 배울 수 있었으며, 또한 성령께서 인도해주셔서 하나님의 뜻을 부족하지 않게 알 수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의 백성들은 예배하는 삶을 살아야 하며, 교회 공동체에서 규칙적으로 모여 교제를 하며 예배의식을 통해 하나님께 경배하는 태도를 확인하도록 제정된 것이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11:6)

 

그렇다면 처음으로 돌아가서, 하나님께 예배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행위를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행위는 성부하나님이 온 세상을 창조하셨고 외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인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희생을 치르셨다는 사건을 믿는 것이 성경적인 믿음이다. 그러므로 믿음의 행위를 보여주는 가장 기본적인 행위가 사랑의 하나님을 찾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는 찾고 찾으라, 간절히 찾으라, 전심으로 찾으라, 마음을 다하고 영혼을 다해서 찾으라는 등의 말씀을 수도 없이 하시는 것이다. 아기가 엄마를 애타게 부르듯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수시로 하나님을 찾는 행위가 최고의 예배행위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필자가 기도훈련을 시작할 때 다른 기도를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는 기도만을 하라고 강조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찾는 행위가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하나님은 어떤 행위를 기뻐하시는가? 찬양하고 감사하고 죄를 회개하는 행위가 아닌가? 우리를 사랑하셔서 당신의 외아들을 아낌없이 보내셔서 십자가에서 끔찍한 고통을 마다하지 않으신 성부 하나님과 예수그리스도를 찬양하고 기뻐하고 감사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다. 그래서 입만 열면 하루 종일 할렐루야를 불러가며 찬양하고 경배하는 것은 마땅한 자녀의 도리이다. 그리고 날마다 짓는 죄를 회개하는 것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 하나님은 죄를 끔찍이 싫어하실 뿐더러 죄인을 가까이할 수도 없는 분이시다. 그래서 우리가 날마다 십자가의 보혈에 의지하여 회개함으로 죄를 깨끗이 씻는 것을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시겠는가? 필자가 요구하는 기도는 이렇게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부르고, 기뻐 찬양하며, 진심으로 감사하고 회개하는 기도이다.

 

예배의 본래의 의미는 하나님을 존경하고 경배하는 행위이다. 이는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을 행하는 것이며, 그 행위가 바로 그분을 찾고 부르며 찬양하고 감사하고 회개하는 것이다. 이것이 최상의 예배가 아닌가? 이를 일정한 행위로 절차화해서 의식화한 것이 바로 작금의 예배의식이 된 것이다. 그러나 예배의식에 성실하게 참여했다고 하더라도 마음 깊은 곳에서 그분을 찾고 부르며, 찬양하며 감사하고, 회개하는 마음이 없다면 단지 구경꾼에 불과한 것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사람처럼 겉에 드러난 행위를 보시는 분이 아니라, 사람의 속내와 동기, 목적을 날카롭게 살피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교회의 예배시간에 정장을 빼입고 와서 경건한 태도를 보이더라도 마음 깊은 곳에서 기뻐하고 감사하는 마음이 없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12:1)

 

이처럼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우리도 영적 예배를 드려야 한다. 이는 주일에 한 시간짜리 예배의식에 참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게 바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를 쉬지 않고 하는 것이다. 예배의식에 참여해서 하나님을 찾고 부르며 찬양하고 감사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예배시간에만 한정된 일이다. 그러나 날마다 틈만 나면 하나님을 찾고 부르며 찬양하고 감사하는 행위를 쉬지 않고 할 수 있다면 최상의 예배가 될 것이다. 그게 바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가 아닌가? 그러므로 그런 기도가 바로 최상의 예배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필자가 교회의 예배의식을 소홀히 하거나 무시하라는 게 아니다. 교회의 예배의식에 참여하여 전심으로 예배드리는 것을 말할 것 없이, 날마다 틈만 나면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부르며 찬양하고 감사하는 기도를 쉬지 않고 해야 한다. 그런데 아쉽게도 우리네 교회에서 추구하는 예배는 본질을 잃어버린 채 껍데기를 반복하는 행사를 치르는 것으로 변질되어버렸다. 교회가 그렇더라도 당신만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인 쉬지 않는 기도의 습관을 들여야 한다. 그게 천국에 들어가는 최고의 자격이며,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평안하고 형통한 삶을 사는 열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