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의 경건
<자기를 부인함과 이웃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부분적으로 이웃을 위한 일이기도 하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웃을 우리 자신보다 좋아하고 신실한 태도로
그들의 선을 증진시키기 위해 노력하라고 전하고 있다.
우린 그렇게 할 수 없다.
다른 사람보다 우리 자신을 항상 높여야 하며
우리 안에 하나님의 선물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나면
그것들을 우리 자신들을 위해 높이고 그것을 찬양하는 도구로 사용하게 된다.
우리는 우리의 허물을 은폐하는 데 익숙하지만
이웃의 허물은, 지적해주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침소봉대한다.
자기자신에게 아첨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성품과 도덕을 비난하는 것을 사소하게 생각하는 것,
자기 뜻대로 될 때는 온건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 온유함을 유지하지 못하는
이 질병은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뿌리째 뽑아버려야 한다.
이것을 인식하자. 애석하게도, 우리 자신 안에는 우리를 교만하게 만들만한
요소가 전혀 없으며 오히려 납작 엎드리게 만들만한 요소는 얼마든지 있다.
우리에게는 모든 것을 사랑하라는 새로운 명령이 주어져 있다.
허물을 바라보지 말고 간과하며 혹은 아첨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존경의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우리의 본성에 대해 엄격해지자. 성경은 주님의 손으로 주어진 모든 은사들은
모두가 교회의 공동선을 위해 위탁된 것임을 말하고 있다.
우리는 지체다.
어떤 지체도 자신만을 위해 이 능력을 소유하고 있지 않다.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들을 동원하여 우리의 이웃을 도와야 한다.
우리 자신의 권익에 대해 염려하는 것과 같은 마음으로
이웃의 권익에 대해 염려하며 우리의 권익을 양보해야 한다.
어쩌면 우리가 선을 행하도록 명령받은 대상들 가운데 대다수는 별 볼일 없는 자들이다.
그러나 그들의 장점만을 가지고 평가해서는 안되며
모든 사람들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바라보아야 한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하라고 명령하신 것은
주님이 그 허물을 스스로 짊어지셨기 때문이 아닌가?
성경은 나그네를 대접하라고 명령한다.
그것은 하잘 것 없고 우러러 볼만한 것이 없는 그리고
아무런 대가도 바랄 수 없는 자에게 은혜를 베풀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이는 조롱을 하지 않고는 은혜를 베풀 수 없는 유감스러운 감정을 소유한 사람이 있다.
우리는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의 위치에 서보아야 한다.
그 불운을 마치 자신이 느끼고 겪는 것처럼 동정할 수 있게 된다.
그런 자는 자기가 베푸는 친절에 교만한 태도를 곁들이거나
그들이 궁핍한 처지를 견책하거나
그들에게 어떤 의무를 부과하려고 노력하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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