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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융 Part 1. 분석심리학자로의 성장 - 7. 이상한 사건들

Joyfule 2015. 9. 18. 08:51

 

 

칼 융 Part 1. 분석심리학자로의 성장

 

7. 이상한 사건들

 

융은 1909년 3월 프로이트를 방문하고 있었는데, 떠나기 전날 밤에 ‘ 정신분석 운동의 황태자 ’ 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다 . 그런데 그날 저녁, 프로이트가 신비학에 대해 적의를 표하자 융은 매우 화가 났다. 날카롭게 반박하고 싶은 충동을 꾹 참고 있던 융은 자신의 횡경막이 자꾸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 때 갑자기 그들 위로 비틀거리며 쓰러지기라도 할 것처럼 책장 쪽에서 큰 소리가 났다. 융은 그것이 ‘ 촉매적인 외형화 현상 ’ 의 한 예라고 생각했다 . 황태자로서의 서임식이 있던 저녁, 융의 제 2 인격이 프로이트이론의 전당이라고 할 수 있는 프로이트의 책장을 넘어뜨리려고 애쓰고 있었던 것이다!

 

1909년 융은 고대신화 연구에 몰두했다. 님프와 켄타우루스를 분석하면서 융은 혼란에, 그리고 흥분에 빠졌다. 신화와 정신병자들의 중얼거림에서 많은 유사점을 발견했던 것이다. 예를 들어 뷔르골츨리의 한 환자는 “ 태양의 중앙에 페니스가 솟아나 있어요 . 그것은 움직이면서 바람을 만들어내고 있어요 ” 라고 말했다 . 이러한 표현은 융이 그리스도교 이전의 미트라 신앙을 연구하고 난 후에야 제대로 이해될 수 있었다. 미트라 신앙에서는 바람이 태양 중앙에 매달려 있는 튜브에서 생겨난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그 환자는 미트라 신앙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그렇다면 그 환상이 어디에서 생겨났을까?

 

정신의학에서는 ‘ 일상의 잔여물들 ’, 즉 보고나서 잊어버렸으나 마음 어딘가에 저장되어 있는 이미지들을 무의식이 보유하고 있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융은 무의식이 개인이 아닌 ‘ 고대의 ’ 잔여물들도 저장할 수 있는지 궁금했다. 태양에 대한 환자의 이미지는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집단적인collective 이미지가 아닐까? 그것은 우리의 무의식 속에 묻혀 있는 잊혀진 신화들로 되돌아갈 수 있는 통로가 아닐까?

 

8. 프랭크 밀러를 오진하다

 

그 후 융은 프랭크 밀러라는 젊은 미국 여성이 쓴 아티클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 아티클에서 그녀는 무의식적인 ‘ 고대의 잔여물 ’ 에 가리워진 어떤 영상을 묘사하고 있었다 .

“ 내가 반쯤 잠에서 깨어 누워있을 때 , 고대 아즈텍인이 나에게 다가왔다. 그는, ‘ 나는 치완토플이라고 하오 . 내 영혼의 동반자를 찾고 있지만 허사였소. ’ 하고 말했다 . 그 때 초록색 독사가 그를 물고 그의 말을 죽였다. 화산이 폭발하고 지진이 일어나 그를 삼켜버렸다. 내가 보고 들은 것은 半의식적인, 혹은 최면적인 상태에서 일어난 일이다. 즉 심령술사들이 죽은 영혼으로부터 메시지를 받을 때와 같은 상태에서 일어난 일들인 것이다. ”
이에 대해 실험심리학자인 테어도어 플러노이 Theodore Flournoy는 그것이 무의식에 있는 역치下의 일상적 잔여물들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주장했다. 융은 다른 견해를 보였다.

“ 밀러 양은 내향적 인물이다 . 그녀의 정신적 에너지가 내부로 향해 있기 때문에 이러한 무의식적인 고대의 잔여물들이 생겨난 것이다. 치완토플의 실패와 죽음은 어머니로부터의 독립이라는 영웅적 행동을 해내지 못한 밀러 양 자신의 실패를 극화한 것이다. 그녀의 무의식은 독립하고 싶어하고 있으며, 그렇게 할 수 없는 그녀의 무능력은 그녀 역시 ‘ 산사태에 묻혀버리게 ’ 될 것이라는 점을 알려주고 있다. ”

융은 밀러가 결국 정신병에 걸릴 지 모르는 잠재적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고 진단한 것이다 .
융은 그녀의 명예훼손 문제에는 아랑곳 없이 , 그녀를 한번도 만나보지 않은 상태에서 프랭크 밀러에 대한 분석결과를 출판했다. 후에 개정판에서 융은 예측이 ‘ 주요 측면에서 볼 때 정곡을 찔렀다 ’ 고 덧붙였다 . 왜냐하면 프랭크 밀러가 정신분열증으로 고통받으면서 요양소에 입원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성공적 예측은 융의 방법론이 환상fantasies-신화적이고 역사적인 이미지들과 동일선상에서 해석될 수 있는-에서 발견되는 심리적 증상들을 정확하게 진단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이어지는 여러 케이스들에서도 이러한 사실이 입증되었다.

그러나 사실 융은 프랭크 밀러에 대해서는 틀린 예측을 한 것이었다 . 최근 연구 결과, 그녀가 요양소에 입원하기는 했지만, 정신분열증의 주요 증상인 환각hallucination이나 망상delusion에 사로잡히지는 않았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실제로 그녀는 수 주 후에 퇴원했다.

그렇다면 융은 왜 프랭크 밀러를 오진한 것일까 ? 프로이트에 대한 투쟁이 극에 달하고 있을 당시 융 자신은 그에 대해 준비가 되어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사실 프로이트가 설명했던 신경적 장애neurotic disorder의 성적인 근거에 대해서 그다지 성공적으로 반박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프로이트를 배격하기 위해 정신적 장애psychotic disorder에 대해 무리를 해서라도 확신에 찬 예측을 해야만 했던 것이다. 만약 밀러가 정신분열증에 걸릴 것이라는 융의 예언이 맞는 것으로 밝혀졌더라면 , 프로이트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편협한 이론을 넘어서서 정신에 대한 더 광범위한 정의를 내림으로써 결국 정신분석학 전체를 융의 손으로 재정의할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융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대한 프로이트의 이론을 지지하는 기본적인 ‘ 근친상간incest 욕구 ’ 에 대해서도 동의하지 않았다 . 프로이트는 아동의 환상이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소유하고 싶어하는 욕구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융은 프로이트가 근친상간 욕구를 문자 그대로 어머니를 범하고 싶어하는 충동으로 여겼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대신 융은 근친상간 욕구가 한 개인으로 완성되고자 하는 정신과정에서 나타나는 영적인 재탄생rebirth에 대한 욕구의 상징이라고 보았다.

 

한편 밀러의 케이스에서 무의식에 남아있는 ‘ 고대의 잔여물 ’ 에 대한 아이디어를 떠올린 것은 융의 제 2 인격의 한 표현이었다. 그러나 융은 그의 제 2 인격 측면의 ‘ 환상적 사고 ’ 를 제대로 다룰 만할 준비가 아직 되어 있지 않았다 . 융은 프랭크 밀러가 병이 날 것이라고 예언했지만 그녀는 그렇지 않았고, 반면 융은 1913년 병이 들었다! 크라프트-에빙의 예언적 경고에 딱 맞아떨어진 것이다.
“ 환자에 대하여 주관적으로 반응할 때 당신은 당신 자신 의 문제를 발견할 위험에 빠질 것이오 ! ”

 

9. 고통스런 항해를 떠나는 융

 

프로이트와 결별한 후 융은 위험한 항해를 위해 출항했다. 바로 중년의 위기를 관통하는 여행이었다. 신화에 대한 지식이 있었기 때문에 융은 위험한 네카이아Nekyia, 즉 ‘밤바다 여행night-sea journey’을 감내해야만 하는 영웅에 대한 오랜 신화들을 잘 알고 있었다. 이러한 영웅의 항해는 태양 고유의 일상적인 뜨고 짐, 즉 태양의 ‘삶’과 ‘죽음’으로 상징된다. 그리고 태양의 연간주기는 황도대zodiac로 상징된다. 때때로 영웅은 바다괴물에게 잡아먹히기도 한다. 성서에 나오는 고래와 요나 이야기를 상기해 보라. 가끔 괴물이 못된 여성의 형상으로 묘사될 때도 있다.

 

네카이아Nekyia
호메로스의 '오딧세이'의 주인공 오딧세우스가 하데스의 지하세계로 떠난 여행을 일컫는 말
심리학적으로 보면 그러한 바다괴물은 어머니에 대한 무의식적 이미지를 나타낸다. 즉, 현재 우리가 애착하고 있으나 독립적이고 개별적인 존재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벗어나야만 하는 존재로서의 어머니를 뜻한다. 그렇기 때문에 영웅은 어머니의 안(고래의 뱃속)으로 다시 들어가야 한다. 그러한 재진입을 통해서만이 그는 그녀로부터 다시 한번, 이번에는 영적으로 탄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재진입은 성적인 근친상간 욕구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는 것이 융의 생각이었다.융은 밀러를 오진함으로써 그 자신의 무의식 여행에 대해 예언한 바 있었다. 그 여행은 무척 위험한 여행이었다. 융 자신도 뷔르골츨리의 미친 이들에게서 통제되지 않은 무의식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 목도했었다. 그들의 정신이 광기의 바다에 빠져버렸던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는 융이 그러한 정신적 붕괴의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융은 서른 아홉살이었고 막다른 길에 직면해 있었다. 친구들과 동료들이 그를 저버렸다. 그는 과학적인 텍스트에 대한 관심을 상실했고, 대학에서의 직위도 내팽개쳤다. 1914년부터 1919년 사이에 그는 세상으로부터 도망쳐 그 자신의 무의식 세계를 탐험해야만 했다. 융은 이 때의 기분을 묘사하면서 타로카드의 ‘매달린 남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