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관 자료 ━━/C.G. Jung

칼 융 Part 1. 분석심리학자로의 성장 - 6. 융, 프로이드를 만나다

Joyfule 2015. 9. 17. 00:33

 

칼 융 Part 1. 분석심리학자로의 성장

  

6. 융, 프로이드를 만나다

 

융의 단어연상검사와 관련된 연구는 프로이트의 무의식에 대한 연구결과를 다시 한번 확고히 해주는 것이었다 . 융은 프로이트에게 연구논문을 한 부 보냈고, 이를 계기로 그들은 1906년부터 1913년까지 긴밀한 학문적, 인간적 우정을 나누게 된다. 처음에 그들은 서로 엄청난 유대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융이 1907년 비엔나에서 프로이트를 처음 직접 만났을 때 그들은 장장 열 세 시간 동안 쉬지 않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융은 자신이 만났던 사람들 중 진정 중요하다고 느낀 첫번째 인물이 바로 프로이트였다고 술회한다. 프로이트와 비견할 인물이 아무도 없다고 느꼈던 것이다.

 

융의 정신의학적 백그라운드와 뷔르골츨리에서의 경험 , 그의 지성과 명망 등을 이유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진영은 융을 적극적으로 초청했다. 게다가 융은 유대인이 아니라는 장점도 있었다. 당시 프로이트측은 정신분석학이 유대인들의 학문에 지나지 않는다는 편견에 시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융은 곧 프로이트측에서도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다. 그는 국제정신분석학회International Psychoanalysis Association(IPA)의 초대 회장으로 선출되었고, 최초의 정신분석학 저널인 Jahrbuch의 편집장이 되었다.
그렇다면 , 융이 ‘ 정신분석학의 적자 (嫡子) ’ 로서 추앙되었던 1909년으로부터 불과 4년 뒤인 1813년에, 프로이트가 융에 대하여 ‘ 그 경건한 척하는 짐승 같은 녀석 ’ 이라고 혹평하게 된 것은 어찌된 영문일까 ? 두 사람의 결별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1. 프로이트의 권위주의

 

S a ndor Ferenczi
(1873~1933)
정신분석적 이론과 치료법에서의 테크닉에 대한 실험에 기여했던 헝가리의 정신분석학자. 1894년 비엔나대학에서 학위를 받은 후, 군의관으로 복무하면서 신경학, 신경병리학을 전공하고최면술 기법을 익혔다. 1908년 프로이트를 만나서 프로이트측의 비엔나 정신분석 학회에 가입하였다. 그로부터 오랜동안 프로이트와 밀접한 우정 및 학문적 공조관계를 유지했다. 1913년 헝가리 정신분석 학회를 창설했고, 1919년에는 부다페스트대학에서 정신분석학 교수가 되었다.

1909년, 프로이트와 융은 클락 대학에서 정신분석학 강의를 하기 위해 미국으로 향했다. 오랜 뱃길에서, 두 남자는 서로의 꿈을 분석해보게 되었다. 그런데 프로이트가 꿈해석에 필요한 자세한 개인적인 배경을 털어놓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프로이트는 자신의 견해를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제자를 원했고, 융에 대해 자신이 아버지와 같은 위상을 유지하길 바랬던 것이다. 프로이트는 자신의 권위가 실추될까봐 두려웠을테지만, 바로 그런 행동으로 인해 융에 대한 프로이트의 권위는 모두 사라졌다.

한편 프로이트는 그 언쟁이 융의 부성 콤플렉스 때문이었다고 주장했다 . 즉, 융은 정신분석학의 ‘ 아버지 ’ 인 자신을 죽이고 정신분석학 , 그 ‘ 아름다운 어머니 ’ 를 혼자서 독차지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 프로이트는 자신과 융 간에 발생한 여러 초자연적인 사건들(프로이트는 융 앞에서 두 번이나 갑자기 기절했다)에 대해서도 이와 같은 ‘ 프로이트적 설명방법 ’ 에 의지해야만 했다 .

바야흐로 정신분석학은 프로이트의 비엔나파와 융의 취리히파로 쪼개질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 이에 대해 페렌치S a ndor Ferenczi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겼다.

“ 융은 더 이상 프로이트를 (신처럼) 믿지 않는다! ”

 

2. 이론적 견해차이

 

1906년 조발성 치매와 연상실험에 대한 연구에서 융은 ‘ 프로이트의 눈부신 업적 ’ 에 빚진 바 있다고 인정하였다 . 그러나 융은 프로이트의 유아기의 성적 욕구sexuality에 대한 집착에 의구심을 품었다. 또 그는 프로이트의 치료법에 대해서도 그다지 열성적이지 않았다. 융은 그 치료법이 이론적으로 제시하는 정도의 성과가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처음엔 두 사람 모두 갈등의 골이 제법 깊어질 때까지 이러한 불일치에 대해서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 그러다가 1912년 뉴욕의 포드햄대학에서 융이 강연을 하게 되면서, 처음으로 공적인 장소에서 이러한 갈등이 크게 불거지게 되었다. 원래 융은 강연에서 정신분석학을 소개하고 옹호하기로 되어있었다. 그러나 그는 프로이트의 기본적인 견해에 대해 의문을 제시하고 자신의 견해에 맞게 모든 것을 재해석하여 강의했다.

융은 히스테리 hysteria와 강박적 신경증obsessional neurosis이 ‘ 틀림없이 성적인 ’ 리비도가 비정상적으로 환치되었음을 보여준다는 것에 대해서는 프로이트와 의견을 같이 했다. 그러나 정신분열증과 같은 정신병적 상태는 교란된 성적 본성이라는 개념으로 설명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조발성 치매의 경우 환자들은 총체적인 현실감각의 상실을 겪기 때문이다. 융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정신병에서 현실기능을 상실하는 것이 너무나 극단적이기 때문에 , 성적인 특성이 전적으로 배제된는 여타의 본능적 충동들 역시 상실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아무도 현실 이 性의 작용이라고 주장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

그렇다면 유아의 성적 욕구에 대한 프로이트의 이론은 ? 프로이트는 아기가 어머니의 젖을 빠는 것이 일종의 성적 행동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융은 유아의 빨기행동이 가져다주는 정서적 만족감은 단지 인간이 음식을 먹는데서 비롯되는 만족감일뿐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유아의 성적 본능에 대한 증거라고 말하는 것은 성인만의 생식적 본능을 모든 연령대의 인간에게 공통되어 있는 식욕과 혼동하는 것이다. 따라서 프로이트는 출생에서 성숙하기까지 정신적 삶의 발달을 설명하는 데 있어 섹슈얼리티의 개념을 과도하게 확장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결론지은 융은 정신적 에너지에 대한 성적 정의를 부정할 수밖에 없었다.

 

3. 철학적 차이

 

융은 오랜 동안 영혼의 신비로운 측면에 대해 관심을 가져왔다는 점에서도 프로이트와 달랐다 . 프로이트와 가까이 지냈던 6년동안 융은 정신의학과 정신분석학이 제한한 한계선까지 그의 제 2 세계를 가급적 억제하였지만, 여전히 초심리학에 대한 관심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1911년에는 점성학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 융은 정신분석학에 대한 풍부한 전리품을 가지고 ‘ 종교적인 리비도의 구름 ’ 으로부터 돌아오겠노라고 프로이트를 안심시켰다 . 프로이트는 정신분석학의 영역에 초심리학이라는 부분을 추가할 수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성적 욕구에 관련한 이론을 저버려서는 안된다고 충고했다. 프로이트는 여전히 오컬티즘의 검은 해일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방어책이 그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차이로 인해 그들의 우정에는 돌이킬 수 없는 금이 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