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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융(Carl G. Jung, 1875∼1961) - 분석적 심리치료

Joyfule 2015. 9. 9. 10:26

 

 

칼 융(Carl G. Jung, 1875∼1961) - 분석적 심리치료

 

 성격의 구조

융의 견해에 따르면 성격은 자아(自我, ego), 개인 무의식(personal unconscious), 집단 무의식(collective unconscious)이라는 세 가지의 분리된, 그러나 서로 교류하는 체제로 구성되어 있다. 그 체계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서로 양향을 주고 받을 수 있다.

집단 무의식은 성격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며, 융의 이론 전체에서 가장 논란이 많은 부분이기도 하다. 비교적 덜 중요한 두 가지 체계를 먼저 논의해보자.

자아(自我, ego)는 의식 속의 정신 부분이며, 매순간마다 우리의 인식 속에 들어오는 지각, 기억, 사고, 감정들을 포함한다. 우리는 일생을 통해 광범위한 자극 속에 끊임없이 몰려 있어서 효율적으로 그 많은 자극들에 다 주의를 기울일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주위에 있는 것을 선택하여 지각해야 한다. 우리에게 해롭거나 위협적인 것들과 함께 무의미하고 부적절하고 사소한 자극들도 걸러낸다. 자아(ego)가 이 절대적인 기능을 수행한다. 감각이든 관념이든 기억이든, 자아의 의식 속으로 인지되고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보이지도 들리지도 사고(思考)되지도 않을 것이다.

우리 의식의 많은 부분(어떻게 세상을 지각하고 반응하는가)은 외향성(外向性, extroversion)과 내향성(內向性, introversion)이라는 태도군(態度群, attitudes)에 의해 결정된다. 이들은 세상을 보는 방법에 있어서 서로 정반대의 입장을 대표하고 있는 것으로, 융의 이론 중 가장 널리 알려진 부분이다. 일반적으로 그것은 심리학에서 하나의 전제로서 잘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것은 의식의 다른 두 가지 방향, 즉 우리들에게 익숙한 두 가지 성격형이다.

외향적 성격의 사람은 객관적 현실이라는 외부세계로 향해 있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객관적이고 사교적이며 타인들과의 교제를 진실로 즐기는 듯하다. 한편 내향성은 내부의 주관적 삶에 방향을 두고 내성적이며 위축되어 있고 소심한 경향이 있다. 이 두 가지 태도는 상반(相反)된 방향-외부 대 내부-을 대표하고 있는데 융은 누구나 어느 한쪽 부류에 속할 수 있다고 느꼈다.

사람의 일생에 있어 정상적으로는 이 태도들 가운데 어느 한쪽이 우세하여 행동과 의식을 지배하게 된다. 그렇다고 다른 한쪽이 완전히 무시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존재는 의식의 일부인 것만은 아니다. 개인 무의식(personal unconscious)의 일부가 되어 그 속에서 여전히 행동에 영향을 줄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 개인이 근본적으로 외향적이거나 혹은 내향적일지라도, 완전히 그렇지는 않다. 열세(劣勢)의 태도도 영향력이 조금 미약하긴 하더라도 존재한다. 이 태도의 우세가 심리적 건강이라는 측면에서 내포하고 있는 의미와, 연령에 따라 어떻게 번화되어가는지는 후에 이야기하기로 하자.

의식부(意識部)에는 외향성과 내향성 이외의 것이 또 있다. 융은 이를 심리적 기능군(psychological functions)이라고 소개했다. 이 역시 우리 주위와 내부 속에서 지각하고 반응해 보이는 방식인데 즉 우리의 외부세계와 내부세계이다.

융은 내향성과 외향성이라고 모두 똑같은 게 아님을 발견했는데 그것은 세계에 대한 태도가 이성적(rational)이냐, 혹은 비이성적(nonrational)이냐 하는 점에서 다르다. 이성적 기능(rational function)은 사고(思考, thinking)와 감정(感情, feeling)이다. 이들은 실제로 정반대의 기능이지만 양쪽 모두 경험에 대해 판단하고 평가하며 체계화하고 분류한다는 면을 갖고 있다. 비이성적 기능이란 감각(sensing)과 직관(intuiting)을 들 수 있는데 이들은 이성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감각은 감각기관을 통해 현실을 경험하는 것을 말하고 반면, 직관이란 일종의 초감각적 경험이나 육감을 토대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그들끼리 서로 상반되는 기능인 것이다.

세계에 대한 우리의 기본적 태도라는 방향의 견지에서 한가지 태도만이 지배적이었듯이 기능에 있어서도 한가지 기능만이 의식부에서 지배적이고 다른 나머지 세 부분은 개인 무의식의 부분이 된다. 그 상반성 때문에 한 개인에게는 이성적이거나 혹은 비이성적 기능, 어느 한쪽만이 지배적인 것은 분명하다. 한 개인이 일관성있게 양쪽 형태의 기능을 한꺼번에 사용할 수는 없다. 또한, 각 쌍의 한쪽 편만이 어느 시기에든 우세하다. 한 인간이 동시에 사고와 감정 양식으로 작동하거나 혹은 감각과 직관 양식으로 작동할 수는 없다.

결국 이런 다소 복잡한 성격 분류에 의해 두 가지 태도군과 네 가지 기능군으로 여덟 가지의 심리형(psychological types)을 형성케 된다. 두 가지 태도군에 의하여 분류될 내향적이거나 외향적인 사람이 각각 네 가지 기능 중 한 가지의 지배를 받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내향적인 사람이 사고형(思考型)으로, 외향적인 사람이 감각형(感覺型)의 기능을 수행할 수가 있다.

융에 의하면 성격에 있어서 의식부는 중요하기는 하나 무의식부보다는 훨씬 덜 중요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무의식에는 개인 무의식과 집단 무의식의 두 가지 차원이 있다. 보다 상위부에 보다 피상적인 차원에 있는 것이 개인 무의식(personal unconscious)인데 근본적으로 의식 속에 더 이상 남아 있지는 않지만 의식부로 쉽게 떠오를 수 있는 자료들의 저장소 혹은 저수지이다. 이 자료들은 별로 중요하지 않거나 그와는 반대로 너무 위협적이어서, 인식되는 의식부에서는 밀려나간 기억과 생각들로 구성된다.

주어진 시간 안에서 우리가 의식할 수 있는 경험에는 한계가 있다. 어느 순간에든 한 두 가지 혹은 몇몇 가지의 생각이나 경험 밖에 주의를 기울일 수가 없다. 다른 기억이나 생각들은 현재 초점이 되고 있는 것에 자리를 마련해주기 위해 밀려나간다. 예를 들면, 우리는 수많은 정보-전화번호, 주소, 성명, 인상들(images), 과거에 일어난 사건의 기억 등을 지니고 있다. 전화번호를 알고는 있지만 항상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필요한 때는 즉시 의식부 안에서 인지될 수 있도록 상기(想起)해낼 수가 있다.

그러므로 의식부와 개인 무의식 사이에는 서로 빈번한 왕래가 있다. 여러분의 주의력은 이 장(章)의 내용에서부터 어젯 밤 했던 일의 기억으로 혹은 내일 할 일에 대한 계획으로 옮겨지기도 할 것이다. 개인 무의식은 우리들의 감정, 사고, 기억들을 모두 간직한 서류철에도 비교할 수가 있다. 어느 특정한 기억을 추출하여 잠시 검토해 본 후 제자리로 보내고 다음 필요할 때까지는 별 어려움 없이 잊어버린다.

융이 컴플렉스(complexes)라 부른, 하나의 공통된 주제에 관련된 정서, 기억, 사고의 묶음은 개인 무의식의 중요한 국면이다. 어떤 의미에서 컴플렉스란 성격 전체 속에 있는 보다 작은 성격이며 특정한 것에 대해서는 강한 편견을 갖는 특징이 있다. 한 예로 우리가 어떤 사람이 열등감(inferior complex) 혹은 권력 컴플렉스(power complex)를 갖고 있다고 말할 때는 그가 열등의식이나 권력에 사로잡혀 그의 행동에 크게 영향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컴플렉스를 가지고 있을 때 그것은 의식의 인지 수준에 놓여 있지 않고 개인 무의식 속에 존재하기 때문에 그 지배를 받고 있는지를 깨닫지 못한다. 컴플렉스란 실질적으로 우리 주변에 있는 것들-즉 어떻게 세계를 지각하며 어떤 가치와 흥미와 동기를 가질 것이냐 하는 것을 결정하는 것이다.

융은 처음에는 컴플렉스가 아동기에 일어난 공격적 사건에서 비롯된다 고 믿었으나 후에 보다 깊은 경험에서 파생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에게는 컴플렉스가 종(種)의 진화사(進化史)에서 겪은 어떤 경험, 즉 유전이라는 기제(hereditary mechanisms)를 통하여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계승되는 경험 같은 것으로 느껴졌다. 마치 우리 각자가 과거의 경험을 쌓아 정리해 보관하는 것처럼 인간이란 종도 그렇게 하여 왔다. 이러한 우주 진화 경험의 저장고인 집단 무의식(collective unconscious)은 성격의 가장 접촉하기 어려운 깊은 수준에 존재하며 한 인간 성격의 토대가 된다. 집단 무의식은 현재의 모든 행동을 지시하므로 성격에는 가장 큰 힘을 미치게 된다.

그러나 인간이 태초에 경험한 것들은 무의식적인 것이어서 우리가 그것을 인식할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의식적으로 그것들을 기억하거나 상상하지 않는다(한 번 의식에 있었던 개인 무의식의 내용물을 축적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대신에 그 태초의 경험들은 우리들 속에, 조상들과 같은 방식으로 지각하고 생각하고 느끼는 소인(素因, predisposition)이나 경향성(tendencies)으로서 존재하고 있다.

그 경향성이 우리 행동에 실제로 나타날 수 있는지 혹은 인식될 수 있는지의 여부는 앞으로 직면하게 될 특정한 경험들에 의해 결정된다. 예를 들면, 원시 조상이 어둠을 두려워하였고, 그와 같은 방식으로 행동하는 하나의 소인을 물려받았다고 하자. 이것이 자동적으로 어두움을 두려워하도록 우리 각자가 키워졌다는 의미는 아니다. 낮에 빛이 있는 것보다는 어두움을 쉽게 두려워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경향성은 내재하는 동안 그 소인을 현실화시킬 적절한 경험(말하자면 어두울 때 악몽에서 깨어나는)만이 필요하다. 융은, "자신이 태어날 세계에 대한 모습은 실제적 이미지로서 이미 자신과 함께 타고난다"고 기술하고 있다. 즉, 우리는 조상들이 세계에 반응했던 방식으로 세상에 반응할 소자가 있다는 것이다.

또하나의 예로서, 융의 이론에 의하면 우리는 어떤 정해진 방식으로 어머니를 지각할 수 있는 소인을 타고난다. 일반적으로 어머니는 지나간 세대의 어머니들이 행동했던 것처럼 행동한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우리의 소인은 경험하고 있는 현실과 일치할 것이다. 타고난 우리 세계의 본질은 우리가 경험을 지각하고 반응하는 방식을 사전에 제시해 준다.

융은 다양한 문화를 연구할 때 어느 시대, 어느 장소나 유사한 경험과 주제와 상징성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또한 그 주제들이 자기 환자들의 꿈이나 환상 속에서 반복되고 있다는 것도 발견했다. 고대와 현대의 이러한 일치성은 그로 하여금 어떤 경험들은 수세대 동안 거듭 반복되어 심령 속에 새겨져 있다고 믿게 하였다.

이 우주적 경험은 우리에게 심상(心像, image)으로 확실하게 되거나 표현되는데 융은 이를 원형(原型, archetype)이라 불렀다. 그의 정의에 따르면, 원형이란 어떠한 것들이 만들어지게 되는 기본 모형이다. 그것은 나중에 형성되는 이미지에 대한 하나의 귀감이거나 본보기이다. 융은 그의 연구의 일부로 탄생, 죽음, 권력, 신, 악마, 대지 등의 예를 들어 여러가지 원형을 구별하여 논했다. 인간사의 전형적이고 반복적인 무수한 경험만큼이나 많은 원형들이 있다.

이 여러가지 원형 중에서도 몇 개는 우리 삶에 특히 중요한 것으로 융에게는 생각되었다. 그것들은 보다 충분히 발달되고 세력이 있는 것들로 그 중에는 퍼소나(persona), 아니마(anima)와 아니머스(animus), 그림자(shadow)와 자신(self)이 포함된다.

퍼소나(persona)란 원래 배우가 다른 얼굴이나 역할을 청중에게 나타내기 위해서 쓰던 가면을 일컫는 말이다. 융도 같은 의미로 퍼소나란 자신이 아닌 다른 어떤 것으로 나타내 보이려고 사용하는 가면이라고 정의한다. 그것은 연기를 할 때와 마찬가지로 그때 그때의 상황이나 타인들의 요구에 맞추어서 어떤 행동이나 태도를 적응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역할을 하고 여러가지의 가면을 쓴다. 판사가 법정에서 쓰는 가면과 점심시간에 여류 명사 앞에서 쓰는 가면은 종류가 다르다. 회의 석상이나 가정에 돌아가 가족과 있을 때는 다시 바꾸어 그때 그때의 상황에 적합하다고 여겨지도록 적응하여 남들이 그에게 기대한다고 생각되는 방식으로 행동하게 된다.

우리 모두가 그런 수법을 쓰는 이상은 다른 가면을 쓴다는 것이 그다지 해로운 것 같지는 않다. 실제로 현대 생활의 복잡한 사건들에 대처하기 위해 융은 퍼소나가 유용하며 필수적이기까지 하다고 믿었다.

그러나 퍼소나는 매우 해로울 수도 있다. 만약 어떤 한 사람이 그 퍼소나가 진정한 자기의 본성을 반영하고 있다고 믿는다면 그는 단순히 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역할자 자체가 되어버린다. 그 결과 그 사람의 자아는 오로지 퍼소나와만 동일시되어 성격의 다른 국면들은 충분히 발달하지 못하게 된다. 그 사람은 진정한 자신(self)으로부터 소외되어, 팽창한 퍼소나와 축소된 다른 성격의 국면들 사이에 긴장이 생긴다. 이런 현상은 심리적 건강을 방해한다. 융은 그런 사람들이(대개 중년기 무렵에) 진정한 자신을 표현하지 않음으로써 그들 자신마저 기만하여 거짓된 삶을 살았음을 인식하게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건강한 성격이 목표로 하는 것은 퍼소나를 축소시키고 나머지 성격을 개발시키는 것이다. 물론 모든 역할이 속임수이다. 건강한 사람과 건강하지 못한 사람의 차이를 보면, 후자는 다른 사람들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마저도 속인다. 건강한 사람들은 자기들이 연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동시에 자기 내면의 본질을 안다.

연관된 한 쌍의 원형(archetype)으로 아니마(anima)와 아니머스(animus)가 있다. 우리 각자는 생물학적으로 심리적으로 다 이성(異性)의 특질과 성격을 갖는다. 생물학적으로는 양성(兩性)이 모두 이성의 호르몬을 분비한다든가 하는 것이고, 심리적으로는 모든 사람이 남성적 혹은 여성적인 방식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여성의 성격이 남성적 요소(아니머스 원형)를 포함하고 남성의 성격이 여성적 요소(아니마 원형)를 포함한다.

이 원형들은 남녀가 수없이 오랫동안 같이 살면서 각 성(性)이 이성(異性)의 성격을 약간 받아들이는 과정상의 경험에서 발달되었다. 이런 원형들을 통해서 우리는 어느 정도 이성을 이해할 수가 있다. 우리는 그 속성 중의 어떠한 것을 좋아할 소인을 가지고 있는데 이러한 것이 이성과 적응하여 함께 살아가는 데 도움을 준다.

이 원형들의 심리적 건강을 위해서 우리 각자는 양쪽을 모두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말은 즉 남녀 모두 동시에 자기의 성별(性別)에 맞는 능력을 나타내는 한편 남성은 여성적 성격(온화함 같은 것)을, 여성은 남성적 성격(공격성 같은 것)을 표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 사람이 양성적 본성을 모두 표현하지 못하면 건강한 성격은 이루어질 수가 없다. 그러한 표현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이 매우 중요한 이성적(異性的) 성격은 발달하지 않은 채 잠복하여 성격의 일부가 억압되고 한쪽으로 치우치게 된다. 융의 견해에 따르면 심리적 건강을 손상시킬 수 있는 이 편중성은 성격 전체의 충분한 발달과 표현을 저해하는 것이다. 모든 분야가 조화롭게 발달하여 어떤 부분도 다른 부분을 희생시키며 성장되어서는 안 된다.

그림자(shadow)는 가장 강력하지만 잠재적으로는 해로운 원형이다. 그것은 인류의 조상으로부터의 원시적 동물 본능을 포함하고 있어 가장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이것은 인간 본성의 양측이 모두 표현되어야 하는 가장 선한 국면과 악한 국면을 포함하고 있으므로 특히 문제시되는 원형이다.

부정적인 측면에서 그림자는 사회가 사악하고 죄를 짓는 것이고 부도덕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충동을 포함한다. 그런 까닭에 그림자는 어두운 측면으로서 다른 측면들과 조화롭게 진보되기 위해서는 약화되어야 한다. 우리가 이런 동물적이고 원시적인 충동을 억압하지 못하면 사회의 관습이나 법률과 충돌하기 쉽다. 그러므로 문명세계의 인류가 되기 위해 그림자의 힘을 제어해야 하지만 그들을 완전히 억압해 버리면 그것이 가진 바람직한 특질을 감소시키거나 파괴시킬 염려가 있다. 그림자는 동물 본능의 근원일 뿐 아니라 자발성, 창의력, 통찰력, 그리고 깊은 정서 등 완전한 인간성에 필수적인 성격의 원천이기도 하다. 그림자가 완전히 억압당했을 때 성격은 극히 가치있는 과거의 본능적 지혜로부터 완전히 차단당하여 무기력하고 생기가 없어진다고 융은 생각했다.

그러나 그림자를 완전히 억압하여 사람의 행동을 세련시키고 그림자가 긍정적으로만 표현되게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건강한 성격을 갖기 위하여는 여기서도 역시 성격의 한 부분을 배제하고 다른 한쪽 면, 혹은 부분만을 지나치게 억제하거나 발달시킬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게 된다. 우리가 이제껏 살펴 본 바와 같이 서로 상반되는 것들이 조화롭게 섞이고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 융의 건강한 성격 이론의 기초가 되고 있다.

자아(ego)가 그림자(shadow)의 지배력을 조절하여 양면이 균등하게 표현될 때 그 사람은 생기있고 박력있으며 삶에 열의를 갖게 된다. 그리고 정서와 의식이 다같이 강력하므로 정신적 육체적 영역에 모두 주의를 기울일 수 있고 반응할 수 있다. 융은 그림자가 균형을 이루고 있을 때의 동물적 본능의 몇몇 표현이, 창조적인 사람들을 그렇게 생기있고 폭발할 듯 활력있게 보이게 하는 이유라고 생각했다.

그림자가 완전히 억압되어 있을 때는 성격이 단조롭고 무기력할 뿐만 아니라 자기 본성의 어두운 부분이 반란을 일으킬 가능성마저 있게 된다. 나쁜 동물적 본능은 억압한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자아(ego) 속에서 잠복하고 있다가 위기나 취약기가 오면 지배권을 다시 장악할 수가 있다. 그렇게 되면 사람은 무의식부의 지배를 받게 되는 건강하지 못한 상태가 된다.

가장 중요한 원형(原型,archetype)은 자신(self)이다. 융은 그것을 생의 궁극적 목표라고 생각했다. 자신이란 성격 모든 부분의 통일성, 완전성, 그리고 전체성을 향해 노력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 자신(self)이 발달되었을 때 사람은 자기와 세계가 조화로움을 느낀다. 미발달 혹은 불충분한 발달상태에 있는 자신(self)은 성격이 뒤죽박죽된 상태에서 심리적 건강을 충분히 누릴 수 없게 된다. 자신(self)이라는 원형(archetype)은 성격의 모든 부분을 한데 묶어 균형있게 하는 것, 즉 성격의 중심점을 자아(ego)로부터 의식부와 무의식부 중간 지점으로 옮겨놓은 것과 같은, 의식과 무의식 과정의 동화(assimilation)를 이루어지게 하는 것 같다. 그러므로 무의식으로부터 온 자료가 보다 활동적인 성격의 일부가 된다.

완전한 자아의 인식이나 실현은 어렵고도 인내를 요하는 오랜 작업이며 완전히 성취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우리 대부분이 끊임없이 노력은 하나 거의 도달할 수 없는 하나의 목표이다. 그러므로 자신(self)은 동기를 갖게 하는 힘으로 작용하고 목표를 항상 미래에 두어 사람을 앞으로 끌어당긴다.

자아인식(self-realization)을 위해서는 자신에 대한 객관적 지식이 필요하다. 먼저 자신(self)의 본질을 알지 않고는 자아를 실행할 수 없다고 융은 쓰고 있다. 이것이 자아인식으로 접근해 가는데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리는 이유이며 자기에 대한 지식을 갖기 위해서는 뿐만 아니라 훈련(discipline), 인내력, 지속성 등 고된 작업이 필요하다.

또 한가지 자아 인식을 위해 요구되는 조건은 여러 부분이 충분히 나타나 발달하는 것인데 그것은 중년에서야 비로소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융의 일생에서와 같이 우리는 인간의 발달 단계에서 중년기가 심리적 건강을 성취하는 데 있어서 가장 결정적 시기라는 것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