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란에 나타난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연구
5. 코란에 나타난 예수의 생애:모방과 변질
예수는 코란에서 항상 존경심을 갖게 하는 말들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예수가 코란에서 가장 우선적인 예언자들 7명 중 아담, 노아, 아브라함, 모세, 다윗, 예수, 마호메트의 순서 중에 한 예언자이기 때문이다.
코란은 114수라로 이루어져 있다. 그 중에서 15수라에서 예수 자료가 나타나는데 93구절에 기록되었다.
코란에서는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에 대하여 매우 중요한 인물로 취급한다. 그에 대하여서 따로 한 장을 할애하며 또한 코란에 나타난 여인 중에서 유일하게 이름을 가지고 있는 여인이다. 코란에서는 여인의 이름이 직접적으로 드러난 부분은 한 부분도 없기 때문이다. 코란은 그만큼 예수를 낳은 마리아를 높이 평가한다. 동정녀 마리아로부터의 탄생을 코란은 지지하기 때문에 마리아를 매우 높은 위치에 두는 것이다.
가. 이므란의 딸 마리암(마리아)
코란에서는 마리아의 이름이 34회 나온다. 성경검색프로그램을 이용하여 보면 성경에는 전체 19회가 나온다. 전체 코란의 크기가 신약성경의 3분지 2수준의 분량임을 비교하여 볼 때 이 마리아의 위치가 코란에서 얼마나 높이 평가를 받고 있는 지 알 수가 있는 것이다.
마리아의 아버지는 이므란으로 코란에는 기록되어 있으며 코란에는 이므란 장을 따로 할애하고 있다. 이 이므란이라는 명칭이 어디서부터 왔는 지에 대하여서는 많은 논란이 있지만 본 논문에서는 그 부분에 대한 것을 다루지 않으려고 한다. 자세한 것을 원하는 사람은 다른 논문이나 책을 참고 하면 쉽게 접할 수 있을 것이다.
마리아는 태 속에서부터 사탄으로부터 보호받은 것으로 나타난다.
이므란의 여성이 말하길 주여! 저의 태내에 있는 것을 당신에게 바치겠나니 이를 받아 주소서 당신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시나이다. 그녀가 분만을 하고서 말하길, 주여! 저는 여자아이를 분만하였나이다. 하나님은 그녀가 분만한 것을 잘 아시도다 남자가 여자와 같지 아니하니 그녀의 이름을 마리아라 하였나이다 그녀와 그녀의 자손에게 사탄으로부터 보호할 것을 명령하였느니라
- 코란 3장 이므란 35-6-
나. 성령으로 말미암은 예수의 동정녀 탄생
놀랍게도 예수의 동정녀 탄생은 코란에도 반복적으로 주장되고 있다. 코란은 예수를 메시야로써 동정녀 마리아로부터 탄생하였다고 기록한다.
그녀가 말하길, "주여 제가 어떻게 아이를 가질 수 있습니까? 어떤 사람도 저를 스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가 말하길, 그렇게 되리라 그 분의 뜻이라면 창조하시니라 그 분이 어떤 일을 하고자 할 때 이렇게 말씀하시나니 있어라 그러면 있느니라
-코란 3장 이므란 47-
마리아에게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서 그녀로 하여금 아들을 잉태케 할 것을 예고하지만 마리아는 처녀의 몸이므로 불가능하다고 답변한다. 그것에 대해서 천사는 하나님께서는 그 분의 뜻대로 창조하신다고 답변한다. 이 수태고지에 대한 코란의 기록은 요셉의 관점으로 기술한 마태복음보다도 마리아의 관점에서 기술한 누가복음의 기록에 가깝다고 하겠다.
아마도 이것은 예수의 동정녀 탄생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보여진다. 더욱이 마리아의 남편인 요셉의 이름은 전혀 코란에 나타나지 않는다. 왜 그런가? 그것은 요셉을 마리아의 남편으로 소개하게 되면 사람들은 또 다시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에 의문을 가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코란은 반복적으로 예수의 동정녀 탄생에 대하여 강조한다. 이 동정녀 탄생은 물론 하나님의 능력으로 되어진 것이며 성령의 능력으로 되어진 것이다.
... 그녀는 순결을 지켰으니 우리(하나님)는 그녀에게 성령을 불어넣어 그녀와 그녀의 아들로 하여 온 백성을 위한 예증으로 하였느니라
-코란 21장 안비야 91-
또한 순결을 지킨 이므란의 딸 마리아가 있었느니라. 그래서 우리(하나님)는 그녀의 몸에 우리(하나님)의 영혼을 불어 넣었더니 그녀는 주님의 말씀과 계시의 진리를 증언하고 순종하는 자 중에 있었느니라
-코란 66장 타흐림 12-
코란 역시 성경과 마찬가지로 성령에 의하여서 예수가 잉태된 것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이슬람 학자들은 이것을 해설함에 있어서 성령을 가브리엘로 설명한다. 그러나 이 성령을 코란에 명백히 가브리엘로 나타나는 지에 대하여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어 보인다.
이슬람 인들이 극구 성령이라고 표현된 코란의 구절을 천사 가브리엘이라고 설명하는 것은 있는 그대로 성령을 하나님의 영으로 인정하면 기독교에서 주장하는 삼위일체를 인정하는 근거가 되어질까 하는 염려로 보여진다. 코란에서 '신의 영혼'이라고 표현된 하나님의 영을 피조물인 천사로 볼 수 있는 지에 대하여 이 주장을 뒷받침하는 구절을 발견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 논란 많은 구절들을 해석함에 있어서 라찌는 전통적인 자료로부터 얻은 많은 다양한 견해들을 기록하였다.
첫째,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의 가슴속으로 불어넣어 자궁까지 들어갔다(Wahb의 말).
둘째, 마리아의 옷자락 속으로 해서 음문까지 들어갔다. 셋째, 성령은 마리아의 소매를 잡고 그녀의 속옷 안으로 불어넣어서 가슴 안으로 들어갔다(al- Saddi의 말). 넷째, 마리아의 입 속으로 불어넣었고 그래서 자궁까지 입김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타브리도 말하기를, 가브리엘은 마리아의 소매 안으로 들어갔고 , 이렇게 함으로써 그녀는 영을 받아 수태케 되었다는 것이다.
위의 4가지 전통은 다같이 표현과 과정은 다르지만 다음의 세 가지를 모두 인정했다는 것이다. 첫째는 그것이 위에서 정해진 것이고, 둘째는 성령이 마리아 속으로 불어넣었고 , 셋째는 그래서 그녀는 잉태되었다는 것이다.
극소수의 이슬람 학자들이 예수가 반드시 처녀 잉태로만 이해되어야 한다는 주장에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그리고 전통적으로 이슬람교에서 코란의 구절들을 근거로 하여 처녀 잉태를 받아들여 왔다.
코란 19장인 마리아 장은 신약의 예수 탄생 이야기와 어느 정도 맞추어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사가랴는 아들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기록할 때까지 말을 못했고, 코란 19:10에서는 3일 동안 말을 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자카리야)가 "주여! 제게 그 예증을 주옵소서" 라고 말하니 주님께서 이르시길 "그 예증으로 네가 건전하면서도 삼일동안 사람들에게 말을 못하리라" 그리하여 그는 예배당으로부터 그의 백성에게로 나가 아침 저녁으로 하나님을 찬미하라 그들에게 손짓으로 말하더라 그리하여 요한이 태어나니 요한이여! 이 성서를 단단히 지키라 우리(하나님)는 그가 어렸을 때 그에게 지혜를 주었느니라
-코란 19장 10~12-
또한 코란은 나사렛에서 베들레헴으로 가서 예수를 낳은 것을 말한다고 본다.
그리하여 그녀는 잉태하고 멀리 떨어진 곳으로 옮겨 갔도다. 출산의 진통이 심하여 그녀는 나클 나무 줄기에 기대고 말하길 "이전에 죽어버렸다면 조용히 잊어버릴 수 있는 일인데!"
-코란 19장 22~23-
멀리 떨어진 곳이라에 대한해석은 나사렛에서 베들레헴으로 간 것을 뜻한다는 것이며 베들레헴에서 대추야자수 밑에서 해산하고 아마도 그 후에 말구유의 요람으로 옮겨갔다는 것이다.
다. 예수의 어린 시절
요람에서 말을 하는 예수
이 때 모두가 "요람 안에 있는 아기와 어떻게 말을 하란 말인가?"라고 말하더라. 이 때 그(애)가 말하길, "나는 하나님의 종으로 그분께서 내게 성서를 주시고 나를 예언자로 하셨습니다"말하더라. -코란 19장 마리아 29~30-
알파르씨르 알카비르에 의하면 "코란에는 마리아가 아들을 낳아서 안고 돌아오자 사람들이 마리아를 조롱하였고 그러자 마리아는 요람 안에 있는 아기에게 말을 걸어 물어보라고 시켰다. 예수가 젖을 빨고 있는데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는 빨지 아니하고 고개를 사람들에게 향하여 말한 다음 아이가 말을 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하여 질 때까지 말하지 아니하였다고 전하여진다."라고 하였다. 이런 기사는 원 성경에는 없는 것이다. 아마 외경 등의 기록을 참조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아랍어 유아기 복음은 예수가 요람에서 말한 것으로 되어 있다.
라. 예수의 공생애
코란에서 예수의 사역을 총괄적으로 말하는 본문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대표적인 본문은 3:48~50이다.
그 분은 성서와 지혜와 구약과 신약을 그에게 가르치시니 (그를) 이스라엘 자손에 선지자로 보내리라 "나는 너희 주님으로부터 예증을 가지고 왔도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진흙으로 새의 형상을 만들어 숨을 불어넣으면 하나님의 허락으로 새가 될 것이라. 하나님이 허락하실 때 나는 장님과 문둥이들을 낫게 하며 하나님의 허락이 있을 때 죽은 자를 살게 하며 너희가 무엇을 먹으며 너희가 무엇을 축적하는가를 너희에게 알려 주리라 너희에게 신앙이 있을 때 너희를 위한 예증이 있도다. 내 이전에 율법(구약)이 있었음을 확증하고, 너희에게 금지되었던 몇 가지를 허용하기 위해 내가 너희에게 왔으며 너희 주님으로부터 예증을 너희에게 가져왔으니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나에게 순종할 것이니라.
-코란 3장 이므란 48~50-
코란에서 예수의 사역은 이스라엘의 선지자로 보내어져서 구약과 신약을 가르치며 장님과 문둥이들을 낫게 하며 죽은 자를 살리는 이적을 행하는 것을 말한다.
마리아의 아들 예수야. 내가 내린 나의 은총을 기억하라 내가 너를 성령을 보호하여 네가 요람에서 그리고 성숙하여 사람들에게 말을 하였느니라 내가 너에게 말씀과 지혜를 그리고 구약과 신약을 가르쳤느니라 보라! 너는 흙으로 나의 뜻에 따라 새의 모양을 빚어 그곳에 호흡을 하니 나의 뜻에 따라 새가 되었느니라 또한 장님과 문둥병을 치료하였으니 나의 뜻이었고 또한 죽은 자를 살게하니 이도 나의 뜻이었느니라 또 네가 그들에게 기적을 행하매 이스라엘 자손들이 너를 음모하여 살해하려하니 내가 이를 제지하였느니라 이때 그들 가운데 불신자들은 "이것은 분명한 마술에 불과하도다"하더라
-코란 15장 마-이다 113-
코란에서 예수의 이적기사에 대해 자세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전체적인 이적의 기록만을 나타낼 뿐이다. 그러나 간단하기는 하지만 예외도 존재한다.
마리아의 아들 예수여! 너희 주님께 구하여 우리에게 하늘로부터 음식이 마련된 식탁을 내려줄 수 있는가? 라고 제자들이 물으니, "너희들이 믿는 자들이라면 하나님을 두려워하라"하더라 우리는 그 식탁에서 먹고 우리의 마음이 평안하여 당신이 우리에게 진실을 말함을 알고 그리하여 우리가 증인이 되고자 함이라 하더라. 마리아의 아들 예수가 가로되 주여! 하늘로부터 저희에게 음식이 마련된 식탁을 주어 우리에게 처음과 끝이 축제가 되도록 하여 주시며 당신으로부터 예증을 주옵소서 그리고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당신은 가장 훌륭한 양식의 주인이십니다하더라. 하나님이 말씀하사 "내가 너희에게 보내노니 그 후 그 말씀을 불신하는 자에게는 세상 어느 누구에게도 가하지 아니했던 응벌을 가할 것이니라"하시더라
-5장 마-이다 115~118-
예수의 제자들이 음식을 달라고 하자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기도하여서 음식을 베푼다. 이 본문의 의미를 최영길 씨는 이렇게 설명한다. "예수 제자들의 질문은 다음 세 가지로 풀이된다. 첫째는 이들 제자들이 믿음이 결여되었거나, 둘째는 육체적 양식에 너무나 탐닉하여 있거나, 셋째는 어린이가 아무런 의도 없이 기적을 기대하는 것처럼 이들 제자들도 어린이와 같은 질문이 아닌가? "
그러나 하늘에서 식탁을 내려 받는 기적 행위에 관하여 서로 다른 해석을 찾아볼 수 있다.
첫째, 정통파 무슬림 학자들은 예수의 기도가 있은 후 즉시 하늘에서 빨간 식탁이 내려와 1,300명의 많은 사람들이 먹고 모자라지 않았으며 거기 모인 사람들 가운데 병자는 고침을 받았고 40일간 이 기적이 계속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구약의 만나와 신약의 5천명을 먹인 기적을 생각나게 한다. 그 대표적인 학자는 10세기 자료를 남긴 따바리이다. 따바리(Tabari, ~923)는 이 식탁이 실제 하늘에서 내려와 음식이 있는 그대로 먹었고 이것은 계속적으로 베풀어져야 하는 축제로 해석하였다.
둘째로 무슬림 학자들 간에서 이슬람 신비주의 분파인 수피 주의자들은 식탁이 신령한 양식, 영적 양식의 상징, 진리의 양식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졌다. 셋째, 현대 무슬림 학자들은 하늘에서 빨간 식탁이 내려왔다는 것을 비판한다. 이들은 음식이 있는 식탁은 영적 지식을 가리키는 것이라는 점이다. 이 기사는 성경의 두 기사 즉 제자들과의 최후의 만찬과 오병이어의 기적이 혼합되어진 것 처럼 보인다. 코토렐은 이 기사가 복음서의 정확한 인용이 아니므로 이 기사가 무슬림 학자들에게 서로 다른 해석을 끌어내게 하였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예수가 여러 이적을 행하였다는 면에서 예수의 사역은 마호메트나 다른 선지자들과 대비된다. 마호메트는 전혀 이적을 행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해서 마호메트는 여러 번 그가 선지자 됨을 보이라는 요청을 받게 된다.
그 성서의 백성들이 그대에게 물어 하늘로부터 그들에게 성서를 내리게 하라 하니 그들은 모세에게 이보다 더한 질문을 하였으니 하나님을 보게 하여 달라 하였느니라 이 때 그들의 죄악함으로 말미암아 번개가 그들을 덮쳐 갔느니라 그들은 계시가 있는 후에도 우상(소)을 숭배하였도다 그럼에도 우리(하나님)는 그들을 용서하였으며 또한 모세에게 분명한 권능을 주었느니라
-코란 4장 니싸-아 153-
이러한 부분은 예수와 마호메트와 중요한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다. 코란의 위 구절과 같이 장님과 문둥이를 예수가 낫게 하고 죽은 자를 살리는 이적은 성경 곳곳에 나타난다. 그러나 진흙으로 새의 형상을 만들어 새를 만들었다는 구절은 성경에는 없는 기록이다. 이것은 외경의 영향인 것으로 보인다.
어린 예수가 다섯 살 되던 해의 일이었다... 부드러운 찰흙을 이겨서 그것으로 열 두 마리의 참새 모양을 만들었다. 이것을 만든 것은 안식일인 때의 일이었다... 그러자 예수는 손뼉을 치면서 그 참새에게 외쳐 말씀하시기를 '날아가거라' 그렇게 말하자 참새는 날개를 펼치고 지저귀면서 날아가 버렸다.
-도마에 의한 예수의 어린 시절 이야기 2:1~4-
위의 외경의 구절은 보다시피 정확하게 일치하지는 않지만 마호메트는 성경 이외에 외경에 대해서 직,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았던 것처럼 보인다.
전통적인 무슬림 주석가들은 코란에 나타난 예수의 이적기사를 사실로서 여겨 왔는데, 현대의 무슬림 학자들은 코란에 나타나는 이러한 이적 기사를 가능한 축소시키려고 하는 시도들이 있다. 예수가 진흙으로 새를 빚어 숨결을 불어 넣은 이적에 대하여 과거 어떤 사도로부터도 보이지 않았던 이런 이적이 실제 사건이라면 성경에는 기록이 되어 있었을 것이며 이 사건은 상징적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이 구절은 성장과 발전을 할 수 있는 고유한 능력이 있는 보통 사람이 예수와 만나 그의 계시를 받아들인다면 생활이 완전히 탈바꿈하게 될 것임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되어진다.
기타 다른 질병을 고친 이적에 대하여서는 상징적인 해석을 가한다. 이스라엘 사람은 몇몇 질병에 걸린 사람들을 부정하다고 생각하여 사회적 접촉을 금하였다. 그러나 예수가 이러한 질병을 고쳐 주는 것을 통하여 사회적인 제약과 불이익을 깨끗이 제거해 준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실제로 성경에서는 예수가 질병을 고칠 때 단순히 육체적인 질병만을 고친 것이 아니라 질병으로 인한 사회적인 제약을 환자로부터 풀어주는 것이 중요한 일이었다.
누가복음 17장의 문둥병 걸린 10명의 이스라엘 인들을 예수는 단지 육적으로 고쳤을 뿐 뿐 아니라 그들을 제사장에게 가서 보이도록 함으로 사회적인 제약까지도 풀어주었다. 그 외 많은 이적들이 환자들의 사회적인 차별과 제약들을 풀어주어서 다시 공동체에 속하도록 하는 것이 예수의 치유 이적의 부수적인 목적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사회적인 무자격과 불이익은 질병의 치유 없이는 원칙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다. 문둥병 등의 질병으로 인한 사회적인 격리는 격리 그 자체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질병으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질병의 치유 없이 그 사회적인 차별과 격리를 해소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예수의 이적을 단지 비유나 합리적인 해석을 통해서 해결하려고 한다면 오히려 코란 61:6에 나와있는 불신자들처럼, 이적을 보면서 그것을 합리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마술이라고 떠드는 불신자와 다르지 않게 될 것이라는 것을 그들은 기억해야 할 것이다.
또 마리아의 아들 예수가 "이스라엘 자손들이여! 실로 나는 너희에게 보내어진 선지자로써 내 앞에 온 구약과 내 후에 올 아흐맏이란 이름을 가진 한 선지자의 복음을 확증하느니라. 그러나 그가 분명한 예증으로 그들에게 임하였을 때 "이것은 분명한 마술이라"고 하였더라
-코란 61장 샤프 6-
또한 위의 3:48~50에서 특이한 점은 예수의 사역은 구약을 확증하는 것이었으며 또한 구약을 확증하면서도 구약에서 금지되었던 부분을 허용하기 위하여 왔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성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율법의 완성자로 오셨음을 말하고 있다. 코란은 예수의 공생애에 대한 기록이 많지 않다. 대부분의 기록은 예수 탄생과 죽음에 대한 자료에 집중되어 있다.
공생애 사역에서 이적기사가 아닌 가르침에 대한 기사는 이적 기사에 대하여서는 상대적으로 풍부하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요약된 형태이며 성경의 복음서처럼 자세하게 사건자체가 기록되어 있는 일은 거의 없다.
우리(하나님)는 노아와 아브라함을 보냈고 후손을 두어 예언자의 능력과 성서를 주었나니 그들 가운데는 옳은 길로 인도된 자도 있었으나 그들 대다수는 사악한 자들이었더라. 그 후 우리(하나님)는 우리(하나님)의 선지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발자취를 따르도록 하였으니 마리아의 아들 예수를 보내어 그에게 신약을 주었고
-코란 5장 마~이다 26~27-
예수가 분명한 예증과 더불어 그들에게 이르러 말하길, "내가 지혜로 더불어 너희에게 왔나니 너희가 논쟁하는 것을 밝혀 주고자 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내게 순종하라 하나님은 나의 주님이요 또한 너희의 주님이라. 그러므로 그분(하나님)만을 경배하라 이것이 바른 길이니라"
-코란 43장 주크루프 63~64-
마. 예수의 십자가 처형
"마리아의 아들이며 하나님의 선지자인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가 살해 하였도다"라고 그들이 말하도다. 그러나 그들은 그를 살해치 아니하였고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아니했으며 그와 같은 형상을 만들었을 뿐이었느니라 이에 의견을 달리하는 자들은 의심이며 그들에게 지식이 없음이며 단지 추측을 따르는 것이거늘 그들은 그를 살해하지 아니하였도다. 하나님께서 그(예수)를 오르게 하셨으니 하나님은 권능과 지혜로 충만하심이니라.
-코란 4장 니싸 - 아 157~8-
굴람 사와르는 이렇게 주장했다." 코란에 의하면 선지자 이사는 십자가에 처형되지 않았다. 오히려 전지전능하신 알라에 의해 들려 올라갔다. 알라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그들이 음모를 하나 하나님은 그들에 대한 방책을 세우셨으니 하나님은 가장 영특한 계획자이시도다.
-쿠란 3장 이므란 54-
여기서 음모라는 것은 예수를 십자가에 달리게 하려는 유대인들의 계획을 말한다. 이 구절을 해석함에 있어서 최영길씨는 그들이 예수를 살해하려고 음모하였으나 하나님은 그들의 음모로부터 그를 구하여 하늘로 승천시키고 대신 유대인을 예수와 흡사하게 하여 십자가를 지게 하였다라고 해석한다. 대부분의 이슬람 학자들 역시 다 이와같이 해석을 한다. 이슬람교인은 예수의 십자가 자리에 다른 사람을 대신해 놓음으로 큰 혼란에 빠졌다. 어떤 이는 예수 대신 죽은 이가 그의 제자였다고 하며, 다른 이는 구레네 시몬이었다고도 한다.
코란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부정하려고 애쓴다. 이슬람교 전통은 복음서 이외의 외경 자료를 근거로 하여 기독교에는 예수의 십자가 죽음에 관하여 통일된 고백이 없었다는 것을 지적한다. 바나바의 복음서(The Godspel of Barnabas)- 바나바 복음서는 매우 중요하다. 이슬람 사람들과 조금만 논쟁을 하다보면 십중 팔구는 바나바 복음서에 관한 이야기가 화제로 떠오르게 될 것이다. 바나바 복음서는 마호메트가 메시야이며 바나바에 반대했던 사도 바울이 기독교의 원래 참된 가르침을 변질시켰다고 주장한다. 바나바 복음서는 기독교에 대한 이슬람교의 많은 반대 주장을 지지해 주기 때문에 권위있는 복음서로 이슬람교인들은 받아들이지만 이 문서는 이슬람측의 위조문서임이 틀림없으며 실제로 예상되는 시기보다 500년 후를 배경으로 쓰여진 것임이 드러난다 -에서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지 않고 가롯 유다가 대신 처형당하였다는 것이다. 주로 외경에 근거하여 기독교의 예수 십자가 죽음에 관한 혼란이 있었음을 강조하면서, 이에 대한 확실한 답이 코란에 제시되어 있다는 것이다.
무함마드 아따우 라힘의 해석은 처음 체포장소에서 체포하는 자들이 예수와 유다를 혼동했다는 것이다. 가롯 유다의 각본이었던 예수 입맞춤에서, 그렇게 해서 로마 군인들이 예수를 알아보고 체포할 수 있도록 한 바로 그 장면에서 어둠과 수라장 속에서 로마군인들이 유다를 예수로 잘못 알고 체포하였고 예수는 도망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실제 체포된 자가 예수가 아닌 유다임을 알게 된 빌라도는 오히려 그러한 착오가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우연의 좋은 해답이라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유다 배신자를 예수 대신 죽게 하는 데 문제가 없었고 빌라도는 죄 없는 예수를 죽이는 죄책에서 벗어날 수 있어서 만족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는 법적으로는 죽은 것이 되므로 다시는 공적 생활을 보이며 민심을 소란케 하지 않을 것으로 여겼다는 지적이다. 이것도 여러 해석과 전설 같은 이야기 중 하나의 각본에 불과하다. 무함마드 아다우 라힘은 외경, 바나바의 복음서에 근거하여 체포당시 하나님은 가롯 유다를 예수처럼 보이게 하여 예수의 어머니와 제자들도 가롯 유다를 예수로 착각했다고 했다.
코란에 성경에 대한 긍정적인 묘사가 많이 나타난 것을 알려주면 많은 사람들이 묻는 것이 그렇다면 성경과 코란의 차이, 기독교와 이슬람의 차이는 무엇인가? 하고 묻는다. 많은 차이가 있지만 결정적인 차이는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이해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왜 마호메트는 이토록 강하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부정하는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마호메트의 편견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슬람에서의 구원은 죄지은 자 자신의 회개와 자카트(희사)와 같은 선행을 통하여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고 유일신 하나님께 귀의함으로 구원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중보자도 필요치 않다.
이슬람교에서는 하나님의 의를 알지 못하고 불의하게 사는 불신자에게 하나님의 의는 심판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은 죄 없고 깨끗한 예수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의 죄를 대신하게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악에 대한 의는 고통을 당하는 순결한 죽음에서 나타날 수 없다는 것이다. 또 코란은 아담의 존재와 사탄에게 유혹 받은 아담의 타락을 인정한다.
우리(하나님)가 일렀도다. "아담아 너와 너의 아내가 천국에 거주할지니 그대들이 원하는 양식을 먹되 이 나무에 접근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죄지은 자 가운데 있게 되느니라. 사탄이 그들을 유혹하여 그곳으로부터 나가게 하매 우리(하나님)는 그들에게 "서로가 서로의 적이거늘 너희는 종말까지 지상에서 안주하여 생활하라"하였도다.
-코란 2장 바끼라 35~36-
그러나 아담의 타락은 원죄와 연결되지 않는다.
이 때 아담은 주님으로부터 말씀을 들으사 주님께 회개하였도다 진실로 그분(하나님)은 관용과 자비로 충만하시도다.
-코란 2장 바끼라 37-
즉각적으로 아담이 회개하였고 그것이 받아들여져서 용서함을 받았다는 것이다. 코란에 근거한 규범적 삶과 공동체의 적응에 따라 인간은 그의 약함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노와 의의 해결과 대속이 필요치 않다.
또 한가지의 중요한 이유가 있다. 그는 하나님의 선지자가 무방비 상태로 그의 적의 손에 맡겨진다는 생각을 수용할 수가 없었다. 그가 초기에 쿠라쉬인들에 의해서 받은 핍박과 저항을 예수님이 유대인에게서 받은 핍박과 비교하고 있다. 마호메트에게 있어서는 그러한 핍박 가운데 패배 당해서 죽음을 당했다라는 가능성을 인정할 수 없었다. 우리는 이미 코란에서 선지자의 성공이 연이어지는 것을 기억한다면 어떤 실패의 모델도 선지자에게 수용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역사도 마호메트의 성공에 대한 소망에 맞게 다른 선지자의 경우처럼 조화시켜야만 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을 모욕과 잔인한 죽음으로부터 구원해 냄으로써 그분의 사랑을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최근에는 아주 새로운 이론이 등장했는데 사실 이것은 이미 기독교 내에서 과거에 많이 제기되었던 질문이다. 그 내용은 예수가 십자가에 달렸지만 죽기 직전 무덤 속에 묻혀졌고 그곳에서 가사상태의 기절로부터 깨어났다는 것이다. 마울비 모하메드 알리는 이렇게 주장한다.
그 단어-십자가 죽음-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써 그의 생명을 거기에서 마쳤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다. .. 십자가 처형에 대한 당시 상황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는 사실을 입증해주기보다는 그가 산 채로 들어올려졌음을 정확하게 입증해주고 있다.
물론 이러한 이론은 입증할 만한 성경적인 기초도 코란의 기초도 없이 순전히 상상의 산물이다. 첫째, 그리스도는 요셉, 니고데모, 로마 군인들의 판단에 의하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확실하며 둘째로, 예수님이 부활 후 그의 제자들에게 나타났을 때 빈사상태의 기절이나 매맞음과 피 흘림으로 반죽은 상태로 치료나 간호가 필요했던 상태에서 기력을 회복한 모습이 아니었다. 예수님이 기절상태에서 깨어나 수의를 벗어버리고, 무덤 입구의 돌문을 열고, 엠마오까지 7마일을 눈에 띄지 않게 걸어나올 수 있겠는가? 더욱이 이러한 이론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이천 년 동안 수백만 명의 사람을 기만시킨 그러한 환상적인 신비를 선포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도우셨다는 가정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선지자가 이러한 사기극에 고의로 참여하였다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이러한 주장들은 어떻게든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부인하려는 시도이다. 무함마드 자푸르울라 칸(Mohammad Zafrullah Khan)은 아흐마디야파 무슬림 신학자로서 이 점을 잘 파악했다. 즉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다는 것, 정죄 받은 죽음이 없었다는 것, 인류의 죄를 대신지지 않았다는 것, 부활이 없었다는 것, 승천이 없다는 것, 대속이 없다는 것을 성립시켜 놓으면 기독교 신학의 모든 구조는 무너지고 만다는 것이다.
만약 크리스챤들이 성경을 왜곡하여 예수를 잘못 묘사하였다고 하자. 그렇다면 구약의 선지자들이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에 대해 예언했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수가 있겠는가? 그렇게 계획하신 하나님의 의도는 이미 구약에 예언이 되어져 있다. 그 완성과 성취는 신약에 나타나는 것이다. 만약 구약을 크리스챤들이 인위적으로 왜곡하였다고 한다면 유대인과 크리스챤들이 서로 왜곡에 합의를 하였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유대인들 역시 예수를 믿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를 믿지 않는 유대인들이 크리스챤들과 협의하여 구약과 신약을 변경하였다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이슬람 인들은 그리스도의 사역의 목적이 죄인들의 형벌을 대신 지셨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 만약 이슬람인들의 말이 옳아서 크리스챤들이 예수의 죽음을 왜곡하여 예수를 신으로 만들었다고 한다면 크리스챤들은 힘없이 죽은 신을 만들어 낸 것이 된다. 만약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한 신을 만들어 낸다고 한다면 그 신을 어떤 존재로 묘사하겠는가? 전능하고 능력이 많아서 아무에게도 해를 입지 않는 신이겠는가? 아니면 인간에 의하여 십자가에 달려서 고통가운데 죽는 신으로 묘사하겠는가?
바. 예수의 승천
"하나님이 말씀하사 예수야! 내가 너를 불러 내게로 승천케 하며 불신자들로부터 세제하며 너를 따르는 자 부활의 그날까지 불신자들 위에 있게 하리라"
-코란 3장 이므란 55-
예수의 승천에 대하여서 모슬림 학자간에도 이견이 있지만 전통적으로는 승천을 인정한다. 본문에 대하여 "유대인들은 예수를 살해하려고 음모하였으나 하나님은 그들의 음모로부터 그를 구하여 하늘로 승천시키고 대신 유대인을 예수와 흡사하게 하여 십자가를 지게 하였다. "라고 이슬람 인들은 해석을 한다. 모슬렘 인들은 철저하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배격한다. 하나님께서 절대로 그의 선지자를 잔혹하게 십자가에 못박았다고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은 그의 선지자인 예수를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승천시켰다고 말한다.
사. 예수의 재림
실로 예수의 재림은 심판이 다가옴을 예시하는 것이라 그러므로 일러 가로되 "그 시각에 대하여 의심치 말고 나를 따르라 이것이 옳은 길이니라."
-코란43장 주크루프 61-
예수의 재림은 곧 심판이 다가왔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으로 "이부누 압바쓰"와 "쿠다다"는 "예수가 태어나는 것은 내세를 알리는 징후 가운데 하나로 하나님은 심판이 있기 얼마 전에 하늘로부터 예수를 내려보낸다 "또한 부카리가 전하는 하디쓰에서도 같은 내용을 전하고 있다. "너희 가운데 마리아의 아들 예수가 재림하리니..." 심판 전에 예수의 재림을 코란은 주장한다.
그 성서의 백성들 가운데 그가 임종하기 전에 그(예수)를 믿지 아니한 자 없었으며 그(예수)가 심판의 날 그들을 위한 증인이 됨을 믿지 아니한 자 없으리라.
-코란 4장 니싸-아 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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