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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천 마음 속의 교묘한 죄.

Joyfule 2021. 8. 4. 02:55

 

 

  

   크리스천 마음 속의 교묘한 죄.

      제리 브리지스(Jerry Bridges) 지음 오현미 옮김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인에게 돌을 던지라"(요 8:7). 누구라도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이 유명한 구절은 간음을 하다가 현장에서 잡혀온 한 여인에 관한 이야기에서 시작된다. 죄인을 비난하는 사람들의 가슴 한가운데를 찌르는 예수님의 말씀이다. 이 같은 표현은 이제 우리 문화에서 하나의 관용구로 널리 사용되고 있다. 비슷한 의미로 "너희가 심판받지 않으려거든 심판하지 말라"는 말씀도 있다(마 7:1).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죄에 대해 다루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죄란 우리 시대 문화의 자명한 죄가 아니라 이 책의 주독자층인 크리스천들의 교묘한 죄다.나 역시도 여기서 언급하는 죄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한 탓에 우리가 알게 모르게 짓는 이러한 죄의 실례로 나 자신의 서글픈 경험을 인용하기도 했다.


이 책을 쓰게 된 동기는 내 안에서 어떤 자각이 점점 커졌기 때문이다. 그것은 흔히 보수 복음주의자라고 불리는 크리스천들이 사회 표면 위로 극명하게 드러나는 보다 큰 죄악들에만 깊이 신경쓰느라 자신이 저지르고 있는 '세련된' 혹은 '교묘한' 죄에 대해 심각하게 논의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렇듯 스스로 깨닫고 돌이키기가 쉽지 않은 '점잖은' 죄에 대해 이야기하겠지만,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이 책이 우리에게 희망을 보여주게 되기를 바란다. 우리는 희망이 보이지않을 정도로 죄에 파묻혀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 이미 복음을 통해 우리의 죄책과 우리를 지배하는 죄의 세력을 해결해 주셨으므로 우리는 그 복음을 믿어야 한다.

복음은 오로지 죄인들만을, 복음의 필요성을 깨닫는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다. 크리스천들 가운데는 복음을 불신자들만을 위한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일단 예수님을 믿으면 더 이상 복음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복음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로 단지 구원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하루하루 삶 속에서 끊임없이 활동하는 죄를 처리할 수 있는 힘을 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복음이 필요하다.


생활 속에서 우리가 만날 수 있는 모든 교묘한 죄들을 다 다룰 수는 없었지만, 동역하는 많은 친구들이 내가 작성한 기나긴 죄의 목록을 검토한 뒤 그 가운데 좀더 일반적인 것들만 추려낼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유익한 제안으로 도움을 준 친구들에게 깊은 감사를 표한다.

또 다른 세 분에게도 특별한 감사를 드리고 싶다. 이 책의 편집인이자 개인적으로 절친한 친구이기도 한 돈 심슨이 아주 큰 도움을 주었다. 다른 저서에서도 함께 일한 적이 있는 밥 베빙튼 박사는 원고를 읽고 유익한 제안을 해주었으며, 제시 뉴턴 부인은 원고를 컴퓨터에 입력해주는 일을 맡아주었다. 마지막으로, 기도로 이 프로젝트를 후원해준 여러 이름 모를 분들이 있다. 그분들에게도 깊은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께 이제부터 영원히 영광을 돌려드린다.


평범한 성도 - 하나님께 구별된 사람


성경에 '성도답지 않은 행동'을 나타내는 단어 하나가 있다. 바로 '죄'다.


누가 성도인가?


고린도 교회는 신학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었다. 교인들은 교만하고 까다롭기가 이를 데 없었다. 그들은 심각한 부도덕 행위를 묵인했으며, 서로 법정 다툼을 일삼았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자유를 업신여겼고, 주의 만찬을 욕보였으며, 영적 은사의 목적을 오해했다. 그리고 장차 있을 신자의 부활에 대해서도 혼동을 일으키고 있었다. 하지만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이들을 '성도들'(고후 1:1), 또는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불렀다(고전 1:2).


사람들 사이에 통용되는 단어의 의미는 시간이 지나면서 자주 변한다. 성도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요즘 같으면 고린도 교인들처럼 행실이 엉망인 사람들을 성도로 여길 수는 없을 것이다. 세속적이고, 육적이고, 성숙치 못한 사람들이라고는 할 수 있어도 분명 성도라고는 부를 수 없다.로마 카톨릭의 전통에서는 생전의 성품이 보기 드물게 훌륭하고 업적이 뛰어난 크리스천들에게 사후에'성인 자격'을 부여했다.이 글을 쓰기 몇 달 전,전세계적으로 칭송받던 교황 요한 바오로2세가 세상을 떠났는데,대중들 사이에서는 벌써 그를 성인으로 시성해야 한다는 정서가 널리 확산되고 있다.


교회사의 흐름을 보면, 바울을 포함해 초기 사도들은 대개 다 성인으로 불렸던 것이 분명하다. 예를 들어 내 할아버지가 다니시던 교회는 성(St.) 바울 감리교회였다. 예전에 살던 도시에는 성 요한 침례교회가 있었고, 장로교회 목사인 내 친구는 지금 성 안드레 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다. 전에 나는 영국 국교회인 성 도마 교회에서 설교한 적도 있다. 심지어 나중에 유다를 대신해 사도로 뽑힌 맛디아도 호주 시드니에 있는 성 맛디아 교회로 한 몫 낀다. 물론 이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바티칸에 있는 성 베드로 성당이다.


오늘날에는 로마 카톨릭과 정교회를 제외하면 '성인'이라는 말이 거의 쓰이지 않는다. 쓰인다 해도 대개는 나이가 지긋하고 성품이 대단히 경건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한다. "세상에 성인이 있다면 우리 할머니가 바로 성인일 겁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기도와 성경 읽기를 하루도 거르지 않으며 선한 행실로 사람들 사이에 칭찬이 자자한, 친절하고 자애로운 한 여성의 이미지가 퍼뜩 떠오른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어떻게 그 엉망진창인 고린도 교회 신자들을 성도라고 부를 수 있었을까? 사실 바울은 상대를 이런 식으로 부르기를 좋아했던 것 같다. 그는 다른 몇몇 서신에서도 이 같은 호칭을 쓰고 있고, 신자들을 성도라고 부르는 경우도 많았다(롬 1:7, 롬 16:15, 고전 1:2, 고후 1:1, 엡 1:1, 빌 1:1, 빌 4:21-22, 골 1:2).


바울은 어떻게 평범한 신자들, 심지어 문제투성이인 고린도 교회 교인들을 성도라고 부를 수 있었을까?

그 해답은 성경에서 이 단어가 어떤 의미로 쓰였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성도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하기오스'(hagios)다. 이 단어는 사람의 성품이 아니라 존재 상태를 뜻하는 말이며, 그 문자적 의미는 '하나님께 구별된 사람'이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신자는 다 성도인 것이다. 가장 평범하고 지극히 성숙치 못한 신자일지라도 말이다.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게 돼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을 향해 말한다(고전 1:2). 바울이 '거룩하게 된다'는 말을 사용한 것에 우리는 또 한 번 놀랄 수도 있다. 우리는 흔히 이 단어를 거룩한 삶과 연관지어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룩하게 된다'(sanctified)는 말과 '성도'(saint)라는 말 모두 똑같은 헬라어 어군에서 나온 말이다. 성도란 간단히 말해 거룩하게 된 사람이다. 바울의 말을 문자적 의미 그대로 옮겨보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구별되어, 구별된 사람들로 부름받은 이들"에게 편지를 쓴다는 것이다.


무엇을 위해 구별된 것일까? 좀더 자세하게 묻는다면, 누구를 위해 구별된 것일까? 대답은 '하나님을 위해서'다. 모든 참된 신자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위해 구별하신, 혹은 따로 떼어놓으신 이들이다. 바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해 자기를 내주사 우리를 모든 불법에서 구속하시고 정결하게 하셔서 선한 일에 열심을 내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신 분'으로 묘사했다(딛 2:14). 그리고 고린도전서 6장 19-20절에서는 "여러분은 자신의 몸이 자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까? 하나님께서 값을 치르고 여러분을 사셨습니다"라고 말한다. 이 두 군데 말씀을 보면 성경에서 성도라는 말을 어떤 의미로 쓰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성경에서 말하는 성도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로 값주고 사서 자신에게로 구별하여 자기 백성이 되게 하신 사람이다.


'구별된다', '따로 놓인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우리집 근처에 있는 미 공군 사관학교에서 비슷한 예를 찾아볼 수 있다.사관학교1학년 생도들의 생활은 일반 대학교 신입생들과는 아주 다르다.버스에서 내려 사관학교 운동장에 첫발을 딛는 순간부터 일 년 내내 그들은 매우 엄격한 훈련을 받게 된다.태평스럽게 살아온 미국인 청소년들을 장차 장교가 될,규율 바른 사관생도로 변모시키기 위한 훈련이다.학년이 올라가면서 이 규율이 조금씩 느슨해지기는 해도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는다. 4학년이 되어서도 여전히 과중한 학업에 시달려야 하며 행동상 요구사항 또한 적지 않다.


사관학교와 일반 대학교는 왜 이렇게 다른가? 공군 사관학교 남녀 생도는 공군 장교가 되기 위해 실제적 의미에서 미 정부에 의해 '따로 구별'된다. 미 정부가 생도 한 명을 4년 동안 교육시키고 훈련시키는 데는 30만 달러가 넘는 돈이 든다. 사관학교는 교사나 월스트리트 은행가가 되려는 젊은이들을 준비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다. 공군 사관학교는 한 가지 목적, 즉 미 공군 장교가 될 사람들을 준비시키기 위해 존재한다. 그리고 사관생도들은 그 목적을 위해 '따로 구별'된다.


공군 사관학교에 입학하는 젊은이들과 비슷하게 신자들은 하나님께서 따로 떼어놓으시고, 하나님께 구별되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모된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신자는 다 성도다. 하나님께서 죄 많은 옛 생활에서 따로 떼어놓으시고 구별하셔서, 그 삶이 변모됨에 따라 점점 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사람 말이다.


"성도답게 행동하십시오!"


성경적 의미에서 볼 때 '성도됨'이란 얼마나 큰 업적을 남기고 얼마나 훌륭한 성품을 지녔느냐가 아니라, 그 사람이 어떤 존재 상태에 있느냐를 말한다. 즉, 성령의 역사에 의해 완전히 새로운 삶의 상황에 있게 되는 것을 말한다. 바울은 이것을 일컬어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며(행 26:18), "어둠의 권세에서 구해내셔서 그분이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로 옮기시는 것"이라고 했다(골 1:13).


우리는 우리 행위로 성도가 되는 게 아니다. 오직 성령의 초자연적이며 직접적인 역사에 의해 성도가 된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이런 깊은 변화를 일으키셔서 우리가 실제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신다(고후 5:17). 존재 상태의 이 변화는 에스겔서 36장 26절에 예언적으로 설명되어 있다. "내가 너희에게 새로운 마음을 주고 너희 안에 새로운 영을 줄 것이다. 내가 너희 육신으로부터 돌과 같이 굳은 마음(하나님의 은혜에 아무 반응이 없는 죽은 마음)을 없애고 너희에게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은혜에 반응을 보이는 살아 있는 마음)을 줄 것이다."


이야기가 여기서 끝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위에서 살펴본 에스겔서 말씀의 맨 마지막 문장을 보면, 성도란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알다시피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솔직하게 말해서 우리는 잠자는 시간 빼고는 거의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생각이나 말로나 행동으로 죄를 짓는다. 스스로 최선이라고 행한 행동조차도 불순한 동기로 얼룩져 있을 때가 허다하며 그 행위 자체도 불완전하기 짝이 없다. 우리 중에 누가 "나는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엉망진창이었던 고린도 교회는 성도들도 태도와 행동에서 수없이 많은 죄를 지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물 제 1호다.


왜 그런가? 하나님의 약속은 그게 아닌 것 같은데, 우리 일상생활의 현실은 왜 이 모양인가? 그 답은 갈라디아서 5장 17절과 같은 말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육체의 욕망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의 욕망은 육체를 거스릅니다. 이 둘은 서로 상반되기 때문에 여러분이 원하는 것들을 할 수 없게 합니다."


이 말씀은 육체와 성령 간의 게릴라전에 대해 설명한다. 그리고 이 싸움은 모든 크리스천들의 마음에서 날마다 벌어지고 있다. 그런 까닭에 베드로는 영혼을 대적해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멀리할 것을 권면한다(벧전 2:11). 고린도후서 5장 17절과 에스겔서 36장 26절은 모든 새신자들의 마음에서 반드시 일어나는 결정적 변화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그 변화의 역사는 즉각적이고 절대적인 게 아니다. 이 변화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며, 이생에서는 결코 완성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것을 자신이 저지르는 죄에 대한 변명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구별된 삶으로 부름받은 성도들이라는 사실을 늘 명심해야 한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첫 번째 편지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게 돼(하나님에 의해 구별되어) 성도(구별된 자들)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호칭으로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고나서 그는 성도답게 행동할 것을 편지를 끝마칠 때까지 강력하게 권면한다. 어떤 의미에서 바울의 편지는 이 말 한 마디로 요약될 수 있다.


"여러분은 성도들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성도들답게 행동하십시오!"

즉, 존재 상태에 걸맞게 처신하라는 것이다. '성도'라는 말은 기본적으로 하나님께 구별된 사람들이라는 우리의 새로운 존재 상태를 설명하는 말이기는 하지만, 여기에는 일상생활에서 성도답게 살아야 할 책임의 개념이 담겨 있다.


50여 년 전 미 해군 장교로 복무했던 시절,우리가 지켜야 할 규율 가운데는'장교답지 못한 행위'라는 표현이 있었다.한 번의 질책으로 끝나는 사소한 잘못에서부터 군법회의에 회부되어야 할 중대한 범죄에 이르기까지 장교답지 못한 행위는 다양했다.하지만 이 말은 단순히 정도에서 벗어난 행동만을 뜻하는 게 아니었다.그 행실이 우리가 흔히 장교에게 기대하는 행동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말이었다.장교답지 못한 장교란,장교가 마땅히 이행해야 할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사람을 말한다.


크리스천에게도 이와 비슷한 표현을 쓸 수 있다. '성도답지 못한 행위'라고 말이다. 이런 말을 들으면 그 즉시 행동을 중지해야 하지 않겠는가? 남의 험담을 하거나 참을성 없이 행동하거나 화가 날 때, 우리는 그것이 성도답지 못한 행동이라는 사실을 떠올려야 한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체적으로 우리는 고린도 교인들처럼 행동하고 있다.부르심과 일치하지 않는 삶이다.


성경에 성도답지 않은 행동을 나타내는 단어 하나가 있다. 바로 '죄'다. '장교답지 않은 행도'이 이런 저런 불량한 행위를 폭넓게 아우르는 것처럼, '죄'라는 말도 나쁜 짓을 널리 포괄하는 말이다. 험담에서부터 간음에 이르기까지, 참을성 없는 것에서부터 살인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다 죄다. 물론 죄에도 심각성의 차이는 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따져볼 때 큰 죄든 작은 죄든, 죄는 죄일 뿐이다. 죄는 성도답지 못한 행동이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성도로 생각하지도 않을 뿐더러 험담하는 것이나 참을성 없는 것을 죄로 여기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스스로 성도로 여기지 않으므로 이 새로운 존재 상태에 성도답게 살아야 할 책임이 수반된다는 사실도 모르는 것이다. 죄는 크리스천 공동체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이 하는 행동이다. 세상 사람들의 부도덕하고 비윤리적인 행동에서는 죄를 금방 알아보지만, 소위 '성도의 용인할만한 죄'에 대해서는 너무도 무감하다. 그 결과 우리는 세상 사람들처럼 자기 죄를 부인하며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