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 마음 속의 교묘한 죄.
제리 브리지스(Jerry Bridges) 지음 오현미 옮김
죄의 흉악성 - 우리 죄 때문에 예수님이 고통당하시다
죄는 영적·도덕적 종양이다. 그대로 두면 우리의 내면 전체로 퍼져나가 삶의 모든 영역을 감염시킨다.
죄의 본성을 직시하라
'암'이라는 말은 듣기만 해도 겁나고,절망과 좌절감을 불러일으킨다.나는 암이 남의 집 일인 줄로만 알았다.그러나1987년,우리집에도 그 일이 닥쳤다.아내가 비호지킨 임파종 진단을 받은 것이다.그때 내가 보인 첫 반응은 우리에게 이런 일이 일어날 리 없다며 현실을 부인하는 것이었다.그러나 그런 일이 일어났고,아내는 일 년 남짓 후 병세가 악화되어 힘겨운 모습으로 세상을 떠났다.
암은 악성 종양이라고도 한다. 의학적으로 '악성'이라는 말은 무한히 자라날 가능성이 있는 종양, 처음에는 인접한 세포로 퍼졌다가 곧 전신의 다른 부분으로 전이되는 종양을 뜻한다. 악성 종양은 그냥 두면 온몸으로 침투하여 전이되는 경향이 있어서, 결국에는 죽음을 초래한다. 이러니 '암'이나 '악성'이라는 말을 들으면 겁이 날 만도 하다.
죄는 영적·도덕적 악성 종양이다. 제재하지 않고 그대로 두면 우리의 내면 전체로 퍼져나가 삶의 모든 영역을 감염시킨다. 더 심각한 경우, 주변에 있는 다른 신자들에게까지 '전이'될 수도 있다.사람은 영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고립되어 살 수 없다.우리의 말과 태도,행동,심지어 마음속 생각까지도 주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친다.
바울은 바로 이 사실을 염두에 두고 이런 말을 했을 것이다. "더러운 말은 어떠한 것도 여러분의 입 밖에 내지 말고 오직 성도를 세워주는데 필요한 대로 선한 말을 해서 듣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끼치도록 하십시오"(엡 4:29). 다른 사람에게 하는 말이든, 누구에 관한 말이든 우리가 하는 말은 상대방을 세워주기도 하고 무너뜨리기도 한다. 말은 그 말을 듣는 사람의 마음을 오염시키기도 하고 은혜를 끼치기도 한다. 그것이 바로 말의 위력이다. 내가 누군가의 험담을 할 경우, 나는 그 사람을 헐뜯을 뿐만 아니라 내 앞에서 그 말을 듣고 있는 사람의 마음까지도 오염시킨다.힘든 일 앞에서 불평을 할 경우,그것은 하나님의 주권과 선하심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 불평을 듣고 있는 사람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유혹하는 것이다.이렇게 해서 내 죄는 상대방의 마음에'전이'된다.
하지만 죄란 단순히 그릇된 행동이나 불친절한 말, 혹은 입 밖에 내지 않은 악한 생각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죄란 우리 마음에 내재된 어떤 본성, 혹은 정신적 힘을 말한다. 우리의 죄악된 말과 행동, 생각은 우리 안에 자리잡고 있는 죄의 본성이 겉으로 표현된 것일 뿐이다. 마음이 새롭게 된 사람도 예외는 아니다. 사도 바울은 이 본성을 일컬어 '육체'라고 했다.육체라고 불리는 이 본성은 워낙 현실적이어서 바울은 때로 이것을 의인화하여 표현하기도 한다(롬7:8-11,갈5:17).
여기에 우리가 늘 마음에 새기고 있어야 할, 있는 그대로의 진실이 있다. 비록 마음이 새로워졌더라도, 죄의 절대 지배에서 자유롭게 되었더라도, 우리 안에 성령이 거하신다 할지라도, 이 죄의 본성이 여전히 우리 안에 잠복하여 우리 영혼과 싸움을 벌인다는 것이다. 이 진리의 끔찍한 현실을 깨닫지 못하면 이른 바 '보기 흉하지 않은' 혹은 '용인할 만한' 죄가 자라서 번성할 토양을 만들어주는 셈이다.
크리스천들은 이 시대의 도덕 문화에 비추어 우리의 성품과 행동을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세상 사람들에 비해 전반적으로 좀더 높은 도덕 기준에 따라 살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 '이정도면 괜찮지'라고 생각하기 쉬우며, 하나님 또한 그렇게 생각해주실 것으로 짐작해버리고만다. 우리 안에 여전히 똬리를 틀고 있는 죄의 현실과 마주하지 못하는 것이다.
암 환자는 대개 자기 몸 속에 암 세포가 자라고 있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다가 위급한 단계, 혹은 말기에 이르러야 알게 된다. 1987년 병원을 찾을 당시, 아내 역시 자기 배에 악성 종양이 자라고 있다는 사실을 꿈에도 알지 못했다. 아내를 검진했던 의사는 유능한 종양 전문의였지만 종양이 임파선까지 전이됐다는 사실을 알아내지 못했다. 암은 이렇듯 우리를 기만한다. 완치가 된 줄 알았다가도 어느 날 뜻하지 않게 몸 속 어디에선가 또다시 등장하는 것이 암이다.
암이 작용하는 방식은 죄, 특히 별 생각없이 저지르는 죄나 세련된 죄가 우리 삶 속에서 작용하는 방식을 잘 비유해 보여준다. 이런 죄를 나타내는 또 하나의 적절한 표현은 '교묘한 죄'다. '교묘하다'는 말은 다양한 의미를 담고 있는데, 대개 긍정적이기보다는 약삭빠르고, 교활하고, 음흉하고, 믿을 수 없다는 아주 강한 부정적 의미를 나타낼 때가 많다. 일상에서 쉽게 지나치고 마는 죄를 교묘하다고 말하는 것은 그 사소해 보이는 죄가 우리를 기만하기 때문이다. '이건 별로 나쁜 행동이 아니야'라고 생각해버리거나, 혹은 죄인데도 불구하고 죄로 여기지 않거나 심지어 자기 행동에 대해 아무 생각이 없게 만든다. 그렇다. 우리가 저지르는 세련된 죄 중에는 너무 교묘한 나머지 아무 생각없이 저지르게 되는 것도 있다. 죄를 저지를 당시는 물론 그 뒤로도 영원히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 알게 모르게 저지르는 죄를 무의식적으로 부인하면서 살 때가 많다.
이 시대에는 너도 나도 '나는 괜찮은 사람'이라고 여기는 풍조가 뚜렷하다. 크리스천들 역시 이런 인생관에 어느 정도 영향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이와 대조적으로 17세기 청교도 시대의 신자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 전혀 다른 견해를 갖고 있었다. 그들은 자기 안에 자리잡고 있는 죄의 현실을 두려워했다. 내 서재에는 그 시대 목회자들이 쓴 책이 네 권 있는데, 제목은 다음과 같다.
『죄의 죄악성 The Sinfulness of Sin』
『죄의 해악 The Mischief of Sin』
『은밀한 죄를 해부하다 The Anatomy of Secret Sins』
『죄악의 사악함 혹은 죄의 넘치는 죄성 The Evil of Evils or The Exceeding Sinfulness of Sin』
이 책을 쓴 목회자들은 죄의 실체를 파악하고 있었다. 죄란 우리 안에 있는 악마적 힘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죄의 죄악성』을 쓴 랠프 베닝은 특별히 다양한 표현으로 죄를 설명한다. 몇 페이지 안 되는 지면 가득히 그는 말한다. 죄는 비열하고, 추하고, 불쾌하고, 악의적이고, 해롭고, 파괴적이고, 가증스럽고, 짓궂고, 전염성 강하고, 사악하고, 혐오스럽고, 치명적이라고.
이 단어들이 주는 충격을 곰곰이 생각해보자. 이는 세상 사람들의 추악한 죄뿐만 아니라 우리 크리스천들이 별 의식없이 빠져드는 죄까지도 설명하고 있다. 조급함과 교만, 분노와 좌절, 자기 연민 같은, 우리가 쉽게 넘기는 죄들을 떠올려보라. 불쾌하고 해롭게 느껴지는가? 실제로 이 죄들은 매우 불쾌하고 해롭다. 영적인 삶에서 이런 죄들을 그냥 넘긴다는 것은 몸 속에 암세포를 키우는 것만큼이나 위험하다. 보기에는 별 것 아닌 죄가 그보다 훨씬 심각한 죄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정욕이 담긴 시선이 포르노 중독이나 어쩌면 간음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살인은 분노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많은데,이는 분노가 원한으로 자라다가 증오로 이어지고,급기야 살인에 이르기 때문이다.
이쯤해서 책을 그만 덮어버리고 싶어질지도 모르겠다. 이 책을 읽기 시작한 건 정죄를 당하기 위해서도, 교묘한 죄를 들춰내고 싶어서도 아닐 테니 말이다. 어둡고 우울한 심정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당신은 지금 격려를 받고 싶지 정죄를 당하고 싶은 게 아니지 않은가. 그렇다면 끝까지 이 책을 놓지 말기 바란다. 기쁜 소식은 조금 뒤에 전해주겠다. 지금은 별로 달갑지 않은 소식을 계속 살펴볼 수밖에 없다. 아니, 달갑지 않다 못해 점점 더 불쾌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불쾌한 소식이 정말 얼마나 나쁜 소식인지 깨닫게 되면, 이후에 알게 될 기쁜 소식이 얼마나 더없이 좋은 소식인지 더 알아보고 감사하게 될 것이다.
모든 죄는 하나님께 대한 반역이다
죄가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그리고 우리 삶 속에 얼마나 악한 죄의 성향이 있는지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우리 죄가 하나님께 어떤 영향을 끼치느냐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죄는 중대한 반역이라고 했다. 과장된 표현이라고 생각된다면 성경에 나오는 '반역'이라는 말에 대해 생각해보라. 예를 들어 레위기 16장 21절에서 이 말은 권위에 대한 반항을 뜻한다. 이는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반항이다. 그러므로 내가 만약 험담을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반항하는 것이다. 누군가에 대해 적개심을 품은 채 그 사람을 마음으로 용서하지 않는다면 그 또한 하나님께 대한 반항이다.
이사야서 6장 1-8절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절대 위엄 가운데 계신 하나님의 이상을 본다. 그는 천사들이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분의 영광이 온 땅에 가득하시다"고 외치는 소리를 듣는다(3절). '거룩하다'는 말을 세 번 반복하는 것은 최고의 거룩함을 표현하는 의미다. 하나님은 무한히 거룩하시다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무한히 거룩하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이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도덕적 정결성을 말하는 게 분명하지만, 여기에는 그보다 훨씬 많은 뜻이 담겨 있다. '거룩하다'는 말이 하나님과 관련하여 쓰일 때는 그분의 무한하시고 초월적인 위엄을 나타낸다. 온 우주 위에 임하는 그분의 주권적인 다스리심을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죄를 짓는다는 것, 어떤 식으로든 하나님의 율법을 범한다는 것은 비록 우리가 보기에는 아주 사소해 보일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권위와 초월적 위엄에 반항하는 것이다. 좀 거칠게 말하자면, 우리의 죄는 하나님의 위엄과 주권적 통치에 대한 공격이다. 그것은 정말로 중대한 반역이다.
다윗이 밧세바와 더불어 간음한 뒤 그녀의 남편 우리아를 죽음으로 몰아넣어 자신의 죄를 덮으려 했던 사건을 기억하는가? 하나님께서는 상한 마음으로 나단 선지자를 다윗에게 보내 그 죄를 지적하셨다. 나단의 말을 들어보자.
그런데 네가 어떻게 여호와의 말씀을 무시하고 여호와 보시기에 악한 짓을 했느냐? 네가 헷 사람 우리아를 칼로 쓰러뜨리고 그 아내를 네 것으로 만들지 않았느냐? 너는 그를 암몬 사람의 칼에 맞아서 죽게 했다. 그러니 그 칼이 네 집에서 결코 떠나지 않을 것이다. 이는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를 네 것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삼하 12:9-10
'무시하다', '업신여기다'라는 말이 9절과 10절에 연이어 쓰인 것에 주목하라. 먼저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율법)을 무시했다. 그리고 나단을 통해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을 업신여겼다. 이 말씀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죄란 하나님의 율법을 무시하는 것이며, 그것은 곧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다윗이 얼마나 큰 죄를 저질렀는지에 대해서만 알 뿐, 나단의 질책이 바로 우리 자신에게도 적용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기 쉽다. 하지만 우리가 보기에 크든 작든, 모든 죄는 하나님께 대한 반역이다. 만약 스스로 사소하게 여기는 죄에 빠진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율법을 무시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와 동시에 하나님 자체를 업신여기는 것이다.다음 번에 누군가에 대해 비판적인 말이나 불친절한 말을 하고 싶은 유혹이 들 때는 반드시 이 사실을 떠올리라.죄에 대한 설명이 점점 더 불쾌해질 것이라고 말한 이유를 이제 알겠는가?
하지만 아직 끝이 아니다. 더 나쁜 소식이 있다. 우리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짓는 죄에 대해 이야기하면서(엡 4:25-32)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성령 안에서 구속의 날까지 인 치심을 받았습니다"(30절). 우리의 죄를 하나님의 주권적 권위에 대한 반역이요 하나님의 율법과 그분의 인격을 무시하는 행동으로 여긴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우리의 통치자요 심판자로 보는 것이다. 한편 우리의 죄를 성령을 슬프게 하는(하나님을 슬프게 하는) 행동으로 보는 것은 하나님을 우리의 구속자요 아버지로 여긴다는 뜻이다. 우리의 죄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슬프게 한다. 누군가에게 불친절하게 대하거나 혹은 나에게 불친절한 사람을 용서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 아버지의 마음을 슬프게 하는 행동이다.
죄를 지을 때 우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슬프게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악용하기도 한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우리의 허물을 용서하신다고 말했다(엡 1:7). 그건 정말 복된 진리인 것이 분명하지만, 죄는 그 교묘한 기만성으로 우리에게 속삭일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미 용서해주셨으므로 우리의 불친절한 말이나 분노는 별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죄를 용서해주신다는 것은 죄를 간과하거나 묵인하신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은 절대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반드시 죄를 심판하신다. 하지만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자신의 아들 안에서 그 죄를 심판하셨다. 이사야 선지자의 말처럼 "우리는 모두 양처럼 길을 잃고 제각각 자기 길로 흩어져 가버렸지만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셨다"(사 53:6).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바로 그 죄를 아무런 의식없이 반복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남용해야 할 것인가?
우리가 행하는 모든 죄된 생각, 죄된 말, 죄된 행동은 다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것이다. 다윗은 이렇게 말했다.
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보셨으니 나를 아실 것입니다. 내가 앉고 서는 것을 아시고 멀리에서도 내 생각을 아십니다. 주께서는 내가 길을 다니는 것과 내가 눕는 것을 아시니 내가 하는 모든 일을 샅샅이 알고 계십니다. 오 여호와여, 내가 말을 혀에 담기도 전에 주께서는 그것마저 다 아십니다. 시139:1-4
하나님은 우리 모든 생각을 아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말을 입 밖에 내기도 전에 그 말을 들으시며, 우리의 모든 행동을 보신다. 심지어 우리의 행동 동기까지 다 파악하신다. 그래서 바울은 주께서 오실 때 "마음의 동기를 드러내실 것"이라고 말했다(고전 4:5).
이 말은 우리의 모든 반역, 하나님과 하나님의 율법을 무시하는 모든 행위, 성령을 슬프게 하는 모든 행동, 하나님의 은혜를 남용하는 모든 행위, 우리의 모든 죄가 다 하나님께서 보시는 데서 공개적으로 저질러지는 행동이라는 뜻이다.보좌에 앉아 계시는 하나님 앞에서 그런 모든 죄를 저지르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뜻이다.
앞서 청교도 목사 랠프 베닝의 책 『죄의 죄악성』을 이야기했다. 책 제목에서 같은 말이 불필요하게 반복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베닝은 이 제목에서 한 가지 사실을 지적하려 하고 있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전적으로 거룩하시고, 오로지 거룩하시고, 완전히 거룩하시고, 늘 거룩하신 반면, 죄는 죄되고, 전적으로 죄되고, 오로지 죄되고, 완전히 죄되고, 늘 죄된다." 우리의 죄가 추악한 죄든 그다지 보기 흉하지 않은 죄든 관계없다. 모든 죄는 다 죄되고, 오로지 죄되고, 전적으로 죄된다. 우리가 보기에 큰 죄든, 작은 죄든 하나님 보시기에는 다 가증스럽다. 하나님은 예수님이 흘리신 피로 우리 죄를 용서해주시지만, 결코 죄를 묵인하시지는 않는다. 예수님은 우리가 저지르는 모든 죄, 우리가 죄라고도 생각하지 않는 교묘한 죄를 다 지시고 우리 대신 하나님의 저주를 받으셨다. 바로 여기에 죄의 흉악성이 있다. 우리 죄 때문에 예수님이 고통당하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 죄에 관한 나쁜 소식이다. 우리는 이 소식에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 죄인이라고 생각되는 다른 사람들에게 책임의 화살을 돌리겠는가? 어떤 특정 인물이 이 부분을 꼭 읽기를 바라는가? 아니면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앉아 지금까지 삶 속에서 무심코 지나친 죄에 대해 회개하고 뉘우치는가? 그럴 마음이 든다면 이제 당신은 좋은 소식을 들을 준비가 된 것이다. 정말, 정말, 좋은 소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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