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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천 마음 속의 교묘한 죄.

Joyfule 2021. 8. 6. 04:54

 

 

  

    크리스천 마음 속의 교묘한 죄.

      제리 브리지스(Jerry Bridges) 지음 오현미 옮김

 

 죄를 치료하는 약 - 복음, 유일한 치료제


자기 죄를 시인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더 이상 나를 나쁘게 생각하시지 않는다는 확신이 필요하다. 복음은 우리에게 그런 확신을 준다.


죄인들을 위한 복음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 찬송 '나 같은 죄인 살리신(Amazing Grace)'의 가사를 쓴 존 뉴턴은 젊은 시절 노예 상인으로 일했다. 그리고 심지어는 아프리카에서 사로잡은 흑인들을 아메리카 대륙으로 실어나르는 노예선 선장 노릇까지 했다. 그후 건강에 이상이 생겨 선원 생활을 그만둔 그는 세관원을 하다가 신학을 공부해서 마침내 목회자가 되었다. 하지만 목회자가 된 후에도 노예 상인 시절 자신이 저지른 끔찍한 죄를 결코 잊지 않았다. 말년에 뉴턴은 한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옛기억은 거의 다 사라졌지만, 지금도 두 가지만은 또렷이 기억한다네. 내가 엄청난 죄인이라는 것과 예수님은 위대한 구주시라는 것 말일세."


수 세기 전, 나중에 사도 바울로 불린 다소의 사울 역시 심각한 죄를 안고 있었다. 사도행전 7장 54절-8장 1절에 보면 그가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인 일에 연루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사도행전 9장 1-2절에서는 신자들을 핍박하는 일에도 직접 참여했던 것을 보게 된다. 생애 막바지에 이르러 바울은 그 시절의 자신을 일컬어 "훼방꾼이요, 핍박자요, 폭행자"였다고 고백한다(딤전 1:13). 그러나 똑같은 정황에서 그는 또 이런 말도 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셨다는 것이다. 죄인 가운데 내가 가장 악한 사람이다"(딤전 1:15).


존 뉴턴이나 사도 바울 모두 자기 자신을 큰 죄인으로 여겼지만, 그들은 또한 죄인인 자신에게는 위대하신 구주가 함께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크리스천들 가운데 젊은 시절의 존 뉴턴이나 사도 바울처럼 심각한 죄를 저지른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대부분은 간음을 범한 적도 없고, 누구를 죽이지도 않았으며, 마약을 판매한 적도 없고, 회사 돈을 횡령하지도 않았다. 나 자신의 경우를 봐도 어린 시절에는 부모님 말씀 잘 듣는 온순한 아이였고, 청소년 시절에는 모범생이었고, 성년이 되어서도 믿을 만한 직원이었으며, 성실한 남편이자 아버지였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비록 추악하다고 할 만한 중대 범죄를 저지른 적은 없어도 나는 남의 험담을 했고, 다른 사람을 비판했고, 적개심을 품기도 했고, 조급하게 굴기도 했고, 이기적으로 행동했으며, 살다가 힘든 일을 만났을 때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한 적도 있고, 물질주의에 굴복한 적도 있고, 내가 좋아하는 축구 팀을 우상으로 삼은 적도 있다. 바울과 마찬가지로 나도 죄인 중에 가장 악한 자라고 할 만하다. 혹은 존 뉴턴의 말을 빌려 "나는 큰 죄인이지만 나에게는 위대하신 구세주가 계시다"고 말할 수도 있다. 이것만이 내 유일한 소망이다. 이것만이 내 죄악의 유일한 치료제며, 당신에게도 역시 마찬가지다.


존 뉴턴과 바울 두 사람 모두 자신이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시점은 바로 현재다. 과거에 '죄인이었다'가 아니라 현재 '죄인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앞뒤 문맥으로 볼 때 바울은 예수님을 핍박했던 죄를 반성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뉴턴 역시 과거에 자신이 노예 상인이었다는 사실을 결코 떨쳐내지 못했다. 세월이 지날수록 오히려 자신의 지난 삶이 더 끔찍하게 여겨졌다.


그렇다면 이들은 자기 자신이 현재 죄인이라고 고백하면서도 오로지 핍박자요 노예 상인이었던 과거의 죄만을 언급하고 있는 것일까? 그렇게는 볼 수 없다. 예를 들어, 디모데전서를 쓰기 몇 년 전 바울은 스스로 모든 성도들 가운데 가장 작은 사람보다 더 작은 자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복음의 일꾼이 된 자로 묘사했다(엡 3:7-8). 사실 바울의 자기 인식은 시간이 갈수록 아래로 치닫는 것 같다. 처음에는 사도들 중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했다가(고전 15:9, 주후 55년에 기록), 나중에는 성도들 중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했으며(엡 3:8, 주후 60년에 기록), 급기야는 죄인들 중에 가장 악한 자라고 말한다(딤전 1:15, 주후 63년이나 64년에 기록).


존 뉴턴이나 바울 두 사람 모두 회심한 뒤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세월이 흐를수록 점점 더 예수님을 닮은 성품으로 자라갔음이 분명하다. 그들은 모두 회심하면서 성도가 되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성도답게 행동했다. 그리고 그렇게 성숙해져가는 과정에서 여전히 자기 안에 있는 육체의 죄성을 더 예민하게 자각했다. 그래서 존 뉴턴은 "나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크나큰 죄인이지만, 나에게는 위대하신 구세주가 계시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 역시 삶 가운데서 쉽게 지나치기 쉬운 죄 문제를 처리하는 데 조금이라도 발전을 보이려면 뉴턴처럼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추악한 죄든 용인할 만한 죄든, 우리 죄에 대한 치료제는 바로 가장 넓은 범위의 복음이다. 복음은 사실상 하나의 메시지인데, 여기서 말하는 복음은 예수님이 이땅에 나시고, 죽으시고, 우리를 위해 부활하시고, 그리고 성령을 통해 우리 안에서 현재 역사하시는 것 등 예수님의 전체 사역을 약식으로 일컫는 표현이다. 그리고 가장 넓은 범위의 복음이라고 말하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역사를 통해 우리를 죄의 형벌에서만 구하시는 게 아니라 죄의 지배 혹은 삶 가운데 있는 죄의 권세에서도 구하신다는 사실이다.예수님의 대 사역의 이 이중 측면은 어거스투스 토플레이디의 멋진 찬송, '만세 반석 열리니'(Rock of Ages)에 아름답게 설명되어 있다.

찢긴 허리에서 흘러나오는 물과 피, 죄를 이중으로 치료하사 죄책과 죄의 권세에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 (우리말 찬송에는 다음과 같이 번역되었다- 만세 반석 열리니 내가 들어갑니다 창에 허리 상하여 물과 피를 흘린 것 내게 효험 되어서 정결하게 하소서-역자 주)


하나님이 모든 죄를 용서하셨다


죄에 대한 전체적인 맥락을 짚어본 후에는 우리 삶 속에 있는 '흉하지 않은' 죄들에 대해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그 죄의 모양이 어떤지, 어떤 피해를 끼치는지, 그 죄를 어떻게 처리할지에 대해서 말이다. 그런데 그 전에 먼저 복음에 대해 자세히 알아볼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해야 하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복음은 온전히 죄인들을 위한 것이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세상에 오셨다(딤전 1:15). 그런데 대부분의 크리스천들은 복음을 '구원받을' 필요가 있는 불신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일단 예수님을 믿으면 복음은 이제 더 이상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으며, 단지 아직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전해주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께 구별된 존재들이라는 의미에서 성도이기는 하나, 그래도 여전히 죄인이다. 신약성경에서 신자들에게 주어지는 모든 윤리적 명령과 권면들은 우리 안에 여전히 죄가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디모데후서3장16절에 보면,성경이 주는 네 가지 유익 가운데 책망과 바르게 하는 것이 있다.성경의 이러한 쓰임새는 우리에게 여전히 죄가 있고,그래서 책망받고 교정받을 필요가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죄의 치료제로서 복음의 첫 번째 역할은 우리의 마음 밭을 갈아엎어 죄를 볼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한 걸음 더 나가 날마다 복음을 필요로 하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면, 스스로 의롭다 여기는 교만한 마음을 찢고 우리 안에 여전히 존재하는 죄의 현실과 마주하여 그 현실을 인정할 준비를 하게 된다.


둘째, 복음은 죄와 마주할 준비를 하게 할 뿐 아니라,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우리를 자유롭게 해준다. 죄와 마주하면 죄책감이 든다. 그것은 물론 우리에게 죄가 있기 때문이다.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하나님께서 여전히 내 죄를 헤아리고 계신다고 생각하면, 자기 보호 본능으로 내 죄와 죄책을 인정하지 않거나 가능한 한 그것을 최소화하려고 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삶 속에 있는 어떤 특정한 죄, 예를 들어 분노나 자기연민 같은 죄가 살아서 활동한다는 것을 먼저 솔직히 인정하지 않는 한 우리는 그 죄가 나타나는 것을 어떻게 처리할 수가 없다. 죄를 처리하는 것은 차치하고 나에게 그런 죄가 있다는 것을 인정이라도 할 수 있으려면 먼저 내 죄가 용서받는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어야 한다.


죄를 인정한다는 것은 어떤 상황에서 내가 이기적으로 행동했다는 것을 마지못해 시인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나는 이기적인 사람이고, 그 특정한 행위는 내 안에 여전히 남아 있는 이기심이 겉으로 드러난 것일 뿐"이라고 전심으로, 변명하지 않고 인정한다는 의미다. 그렇게 자기 죄를 시인하기 위해서는 내 이기심이 용서받는다는, 즉 하나님께서 더 이상 나를 나쁘게 생각하지 않으신다는 확신이 필요하다. 복음은 우리에게 그런 확신을 준다. 사도 바울의 이 말을 생각해보라. "주께서 불법을 용서하시고 죄를 덮어주시는 사람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않으실 사람은 복이 있다"(롬 4:7-8).


하나님은 왜 우리 죄를 인정하지 않으시는 것일까? 이미 그 죄를 예수님께 돌리셨기 때문이다. 이사야 선지자가 말하는 것처럼, "우리는 모두 양처럼 길을 잃고 제각각 자기 길로 흩어져 가버렸지만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시고 그를 공격하셨다"(사 53:6).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내 죄를 용서하셨다는 이 진리를 존재 깊이 붙잡을 때, 비로소 삶 속에서 특정한 죄가 나타나는 것에 거리낌없이 솔직하고 겸손하게 직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존 뉴턴처럼 날마다 "나는 큰 죄인이지만, 나에게는 위대하신 구세주가 계시다"라고 단언하는 것은 아주 유익하다.


셋째, 복음은 죄를 처리할 수 있도록 동기를 부여하고 힘을 부어준다. 솔직하게 죄와 직면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예수님을 닮은 성품을 키워가기 위해서는 죄를 처리해야 한다. 성경의 표현을 빌리자면, 죄를 "죽여야" 한다(롬 8:13, 골3:5). 하지만 이미 말했다시피 우리가 맞서 싸워 이길 수 있는 죄는 용서받은 죄뿐이다. 먼저 죄책을 해결하지 않고는 우리 삶 가운데서 활개치는 죄의 활동을 처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다시 복음으로 돌아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우리 죄책을 해결해주셨다는 사실을 확인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더 이상 내 죄를 인정하지 않으신다는 확신은 두 가지 일을 한다. 먼저 하나님께서 나를 대적하시는 게 아니라 내 편이 되어 주신다는 걸 확신하게 한다(롬 8:31). 나는 혼자서 죄와의 싸움터에 나가는 게 아니다. 하나님은 하늘 보좌에 앉아 나를 지켜보시면서 "언제 제대로 할래? 그 죄를 언제 해결할래?"라고 말씀하시는 분이 아니다. 늘 그러셨던 것처럼 나와 함께하시면서 "우리 함께 그 죄를 처리하자. 다만 내가 더 이상 네 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만 알아두기 바란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내게 더 이상 심판자가 아니시다. 하나님은 이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로서, 무한한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시는 분이시다. 심지어 내 죄 앞에서도 말이다. 그런 확신은 죄를 처리할 수 있도록 나를 크게 고무시키고 동기를 부여해준다.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더 이상 내 죄를 인정하지 않으신다는 확신, 그리고 죄와의 싸움에서 내 편이 되어주신다는 확신이 생기면,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 그리고 지금도 하고 계신 일에 대해 깊은 감사의 마음을 갖게 된다.


'격려'와'감사'라는 이 이중의 효과는 우리 안에 있는 죄를 처리하고자 하는 욕구를 불러일으킨다.착각하지 말라.죄를 처리하는 것은 선택사항이 아니다.우리에게는 죄를 죽이라는 명령이 주어진다.죄를 죽이는 것이 우리의 의무다.하고자 하는 마음 없이 의무적으로 하다보면 고역이 되고 말겠지만,우리 마음속에서 날마다 다시 확신하는 복음의 진리가 우리의 의무에 욕구를 불러넣어줄 것이다.복음은 우리가 저지르는 보기 흉하지 않은 죄와 교묘한 죄를 처리하고자 하는 동기에 불을 붙여준다.일상생활에서 하나님 앞에 우리가 어떤 자리에 있어야 하는지 찾고 구할 수 있도록 동기를 부여해주는 것은 바로 복음이다.


날마다 복음을 선포하라


이렇듯 하루하루 생활 속에 복음을 새롭게 적용해서 죄사함을 확신하는 것이 우리 삶 속에 있는 죄를 처리하는 중요한 과정이다. 물론 이것만으로 죄가 처리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는 의도적으로 날마다 새롭게 복음을 붙잡는 데 전념하라고 말하고 싶다.


몇 년 전,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들었다. "날마다 자기 자신에게 복음을 선포하라." 복음을 날마다 새롭게 붙들기 위해서는 바로 그렇게 해야 한다. 자기 자신에게 날마다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말할 때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해 자신의 몸을 내주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던 바울처럼 복음을 온전히 내 것으로 삼아야 한다(갈 2:20). 아버지의 사랑 또한 바로 나를 향한 사랑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도움이 된다. 예를 들어 요한일서 4장 10절 말씀을 이렇게 한 번 바꿔보자. "사랑은 여기에 있습니다. 곧 우리(내)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나)를 사랑하셔서 우리(내) 죄를 위해 그분의 아들을 (하나님의 진노를 감당할) 화목제물로 보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제 내 죄를 인정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상 내 모든 죄를 용서하셨다는 좋은 소식은 너무 극단적인 데다가 또 우리의 보편적인 사고방식과는 아주 다르기 때문에, 솔직히 사실로 믿기가 어렵다. 특히 모든 상황이 하나같이 내 이기심과 조급함, 분노를 생생하게 자각시키는 날에는 그와 같은 사실이 다 허황되어 보인다. 이 원고를 쓰고 있는 동안에도 나에게는 그런 날이 있었고, 그래서 성경을 펼쳐서 하나님의 용서에 대한 부분을 다시 읽고 나 자신에게 그 말씀을 '선포'해야 했다. 그러나 우리의 하루가 '좋은' 날인지 '나쁜' 날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심지어 최고로 여겨지는 날에도 우리는 여전히 자신에게 복음을 선포할 필요가 있다. 사실 우리 인생에 복음이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좋은 날은 단 하루도 없다.


이 부분에서 이런 궁금증이 생길지도 모르겠다. '나 자신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그렇게 중요하다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고 말이다. 정해진 방법은 없으므로 내 경우를 예로 들어보겠다. 나는 천성적으로 모든 것을 질서정연하게 처리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내 방식이 모든 이들에게 다 들어맞지는 않을 테지만, 복음을 선포한다는 것이 한 개인의 삶에서 어떤 모양으로 드러나는지 대강 감은 잡을 수 있을 것이다. 내 방식은 이렇다.


복음은 온전히 죄인들만을 위한 것이기에 나는 이런 자각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비록 성도이기는 하지만 나는 생각으로나 말로나 행동으로, 혹은 마음속 동기로 여전히 날마다 죄를 짓는다고 말이다. 교묘한 죄든 교묘하지 않은 죄든 내 생활 속에 어떤 죄가 있음을 자각하면 지체없이 그것을 하나님 앞에 시인한다. 자각한 죄에 대해 양심의 찔림을 받지 않더라도 여전히 나는 하나님 앞에 시인한다. 내 존재를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려면 아직도 멀었다고 말이다. 나는 그 죄들을 뉘우치고, 그런 다음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확인시켜주는 성경 말씀을 떠올리며 방금 고백한 그 죄에 적용시킨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하신다는 성경의 약속을 삶 전체에 보편적으로 적용시키고, 오늘 내가 하나님 앞에 올바로 설 수 있는 유일한 소망은 내 죄를 위해 흘리신 예수님의 보혈과 나를 위해 사신 그분의 의로운 삶뿐이라고 고백한다. 나를 위한 예수님의 이 이중 사역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에드워드 모트가 쓴 찬송 '이 몸의 소망 무엔가'(The Soild Rock) 가사에 아름답게 표현되어 있다. "내 소망은 오로지 예수님의 보혈과 의 위에 서 있나니(우리말 찬송에는 '이 몸의 소망 무엔가 우리 주 예수뿐일세'라고 번역되었다-역자 주). 거의 날마다 나는 이 가사와 더불어 죄사함을 약속하는 성경 말씀을 거듭 묵상하곤 한다.


성경 어느 부분의 말씀으로 나 자신에게 복음을 선포하는지 궁금한가? 내가 날마다 펼쳐보는 말씀을 몇 가지 소개하겠다.

동쪽이 서쪽에서 먼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 죄악을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다 103:12

, 나는 나를 위해 네 죄를 닦아 없애는 자니 네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겠다.  43:25

우리는 모두 양처럼 길을 잃고 제각각 자기 길로 흩어져 가버렸지만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시고 그를 공격하셨다 53:6

주께서 불법을 용서하시고 죄를 덮어주시는 사람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않으실 사람은 복이 있다 4:7-8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은 정죄를 받지 않습니다 8:1


이외에도 시편 130편 3-4절, 이사야서 1장 18절, 이사야서 38장 17절, 미가서 7장 19절, 에베소서 1장 7절, 골로새서2장 13-14절, 히브리서 8장 12절, 히브리서 10장 17-18절 등이 있다.


하나님의 죄사함을 확신하기 위해 성경의 어떤 부분을 읽든,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흘리신 피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성경 구절에 그 사실이 명시적으로 나와 있든 나와 있지 않든 말이다. 히브리서 기자의 말처럼 "참으로 피 흘림이 없으면 죄사함도 없다"(히 9:22). 이 말씀의 문맥으로 볼 때 예수님의 보혈이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용서해주시는 객관적 근거가 된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복음이 전하는 좋은 소식의 첫 부분은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은 그 아들의 죽음을 통해 우리 모든 죄를 용서하신다는 것이다. 토플레이디의 찬송가 가사를 다시 언급하자면, 이것이 바로 이중 치료의 한 부분이다. 즉, 죄책에서 정결케 되는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죄의 권세에서 정결케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