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성을 위한 ━━/치유영성회복

크리스천 마음 속의 교묘한 죄.5

Joyfule 2021. 4. 23. 01:27


 

  

     크리스천 마음 속의 교묘한 죄.5

    - 제리 브리지스(Jerry Bridges) 지음 오현미 옮김

 

 성령의 권능 - 죄의 권세에서 깨끗케 하시는 능력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한 가지 방법은 우리에게 죄를 깨닫게 하시는 것이다.

 

"성령을 따라 행하십시오"

 

앞서 살펴본 어거스투스 토플레이디의 찬송은 '이중 치료'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것은 곧 죄책에서뿐만 아니라 죄의 권세에서도 정결케 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아들의 죽음을 통해 우리를 죄책에서 정결케 해주셨다. 우리를 너그럽게 대해주고 싶으셔서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용서해주시는 것은 그분의 공의가 충족되었기 때문이다. 우리 죄가 절대적으로 용서받는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역사적 사실만큼이나 견고한 사실이다. 복음의 이 놀라운 진리를 확실히 붙잡아야 한다. 삶 속에서 묵인하며 지나치는 우리 죄가 용서받는다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만 그 죄와 직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토플레이디의 찬송은 이렇게 죄책에서 정결케 되는 것뿐만 아니라 죄의 권세에서 정결케 되는 것도 말하고 있다. 하지만 살면서 어떤 특정한 죄와 지치도록 씨름할 때는 복음이 정말 우리 삶 속에 있는 죄의 권세와 관련이 있는 것인지 의아해지기도 한다. 반복적으로 씨름하고 있는 어떤 고질적인 죄의 패턴을 '죽이는' 데 과연 어떤 발전이 있기는 한 건지 궁금할 때도 있다. 토플레이디처럼 '만세 반석'이신 예수님께서 정말로 우리를 죄책은 물론 죄의 권세에서도 정결케 해주신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죄의 권세에서 정결케 되는 데는 두 가지 단계가 있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첫 단계는 죄의 주권 혹은 죄의 지배력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으로, 이는 어떤 크리스천에게나 의심할 여지없이 완전하게 일어난다. 두 번째 단계는 아직 남아 있는 죄의 존재와 그 활동에서 자유롭게 되는 것으로, 이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계속해서 점진적으로 진행된다.바울은 로마서6장에서 이 이중적 구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로마서 6장 2절에서 바울은 우리가 "죄에 대해 죽었다"고 말하며, 8절에서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게 죽었다"고 말한다. 즉, 그리스도의 죽음에 연합함으로써 우리는 죄책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우리 삶 가운데 있는 죄의 지배력에 대해서도 죽었다는 것이다. 이는 모든 크리스천들에게 해당되는 사실이며, 우리가 구원받는 순간, 즉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둠의 권세에서 건져내어 그분이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로 옮겨주시는 때 성취된다(골 1:13).

 

"우리가 죄에 대해 죽었다"는 바울의 말은 하나의 선언문이다. 우리가 구원받는 순간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주셨다. 우리는 그 결정적 사건에 무엇을 더할 수도 없고, 우리가 죄책과 죄의 지배에 대해 죽었다는 사실에서 무엇을 뺄 수도 없다.

 

그러면서 바울은 또 이렇게 권면한다"그러므로 여러분의 죽을 몸에서 죄가 왕 노릇 하지 못하게 해 몸의 정욕에 순종하지 말고"(롬 6:12). 우리가 죄에 대해 죽었는데, 어떻게 죄가 우리에게 왕 노릇을 할 수 있다는 것일까?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죄란, 비록 우리 삶을 지배하는 권세는 잃었어도 여전히 우리 일상생활 속에서 주도적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하는 죄의 존재와 그 활동을 말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죄는 우리 마음속에서 영적 게릴라전을 계속 펼치고 있는 것이다. 이 전투에 대해 갈라디아서 5장 17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육체의 욕망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이 바라시는 것은 육체를 거스릅니다. 이 둘이 서로 적대 관계에 있으므로, 여러분은 자기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없게 됩니다.

 

우리는 육체의 욕망과 성령의 욕망 사이에서 벌어지는 이 싸움을 날마다 겪는다. 둘 사이의 이 긴장 관계 때문에 복음이 정말 이 죄의 권세에 대해서도 효력이 있는 것인지 의아해하기도 한다. 복음이 과연 우리를 원하는 방향으로 끌어당길 능력이 있을까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 삶 속에 모습을 드러내는 비교적 '보기 흉하지 않은' 죄를 생각하면 특히 더 그런 의문이 든다. 이런 교묘한 죄 가운데는 아주 집요한 것도 있는데,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그 죄들과 싸움을 벌여야 한다. 이제 그 죄에 대해서는 한 고비 넘겼다고 생각했다가도 며칠 지나지 않아 또다시 그 죄와 마주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렇게 죄와 싸움을 벌일 때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한다. '이제 죄가 나를 지배하지 못한다고 했는데, 난 왜 아직도 이 모양이지? 복음이 정말로 죄에서 나를 정결케 한 걸까? 내 일상에서 여전히 활개치는 이 교묘한 죄를 죽이는 것이 가능하기는 할까?

 

이 집요한 의문에 대한 바울의 답변이 갈라디아서 5장 16절에 나온다. "내가 또 말합니다. 여러분은 성령을 따라 행하십시오. 그러면 결코 육체의 욕망을 채우려고 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성령을 따라 행한다는 것은 성령의 지배적 영향력 아래 살면서 성령께 의지하는 것이다. 바울은 우리가 그렇게 하면 육체의 욕망을 채우려 하지 않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실제 생활에서 성령의 지배적 영향력 아래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바로 우리 마음을 계속 성령께 드러내보이면서 성경에 나타난 성령의 도덕적 뜻에 순종하려 애쓰는 것이다. 기도를 통해 성령께 의지하면서 그 뜻에 순종할 수 있게 해주는 성령의 능력을 계속 소리쳐 구해야 한다.

 

크리스천의 삶에는 내가 '의존적 책임'이라고 이름붙인 기본 원칙이 있다. 하나님 앞에서 그분의 말씀에 순종할 책임과, 이른 바 '용인할 만한' 죄든 용인할 수 없는 죄든, 우리 삶 속에 있는 모든 죄를 죽여야 할 책임이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우리 스스로에게는 이 책임을 이행할 만한 능력이 없다. 사실 우리는 우리에게 힘 주시는 성령의 능력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책임있는 존재기도 하고 의존적인 존재기도 하다.

 

성령을 따라 행하고자 애쓸 때 성령이 우리 안에서, 그리고 우리를 통해 역사하셔서 삶 속에 남아 있는 죄의 권세에서 우리를 깨끗케 해주시는 것을 점점 더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우리는 이생에서는 완전해질 수 없다. 하지만 발전할 수는 있다. 이것은 분명 점진적인 발전이며, 때로는 아무 발전도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진심으로 우리 삶 속의 교묘한 죄를 처리하기를 원한다면 성령이 우리를 도우시는 것을 확신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여러분 안에서 선한 일을 시작하신 분이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그 일을 성취하실 것"이라는 약속이 주어져 있다(빌 1:6).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 시작하신 일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실 것이다.

 

실제로 신약성경의 서신서들을 주의깊게 읽어보면, 서신서 기자들, 특히 바울 같은 이는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이 일을 성부 하나님의 역사로 돌리기도 하고, 성자 예수님의 역사로 돌리기도 하며, 또 때로는 성령의 역사로 돌리기도 한다. 사실 우리가 영적으로 변화되는 역사에는 성삼위 하나님 모두가 개입하시지만, 성부와 성자께서는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을 통해 일하신다(고전 6:19). 바울은 성령을 통해 우리의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볼 수 있다(엡 3:16). 그리고 누군가가 기막히게 표현한 것처럼, "성령은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것을 전달한다."그러므로 내가 성령의 능력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성부,성자,성령의 능력이 성령에 의해 우리에게 전달되어 우리 안에서 역사한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