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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흔적들] 아기까지 죽었던 학살의 현장, 제암리

Joyfule 2018. 6. 29. 08:00



[특별한 흔적들] 일본의 학살로 참혹했던 그 곳, 제암리




제암리는 경기도 화성시 향남읍에 있는 농촌 마을이다. 두렁처럼 생긴 바위가 있어 두렁바위 또는 제암이라 한데서 '제암(리)'이라는 명칭이 생겼다. 3·1운동 이후, 일본 군경이 이 마을 사람들을 교회에 가두어 놓고, 휘발유를 끼얹고 불을 질러 많은 사람이 죽었다. 지금 이곳에는 제암리 3·1운동순국기념관과 기념탑, 순국선열합동묘 등이 있다. 1982년에 제암리 학살현장의 유적은 사적 제299호로 지정되었다.

1985년의 제암리 교회 모습 /조선 DB

일제강점기, 민족의 저항과 일본의 보복 만행

1919년에 3·1운동과 함께 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퍼져나가면서, 제암리 일대에서도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마을 청년을 비롯한 제암리 사람들은 장날을 이용해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발안장날 시위) 일본 경찰은 총칼을 휘두르고 매질을 하는 등 무력으로 이를 진압했다. 그러나 주민들은 이후에도 장날에 만세를 부르고 봉화를 올리는 등 시위를 계속했다.

날이 갈수록 시위가 격화되자, 일본은 수원·안성지방의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특별검거반을 편성하고 파견했다. 이때 1차 검거반의 보복에서 수촌리·화수리, 2차 검거반의 보복에서 화수리를 중심으로 그 부근 우정·장안 양면 내 25개리, 그리고 제암리와 고주리에서 방화와 학살 등이 자행됐다.

제암리 학살사건

1919년 3월 31일 발안장날 시위 당시 군중들의 주재소 습격사건은 4월 15일 향남읍 제암리와 팔탄면 고주리에서 일본이 자행한 보복의 도화선이 되었다. 3월 31일, 4월 5일 발안장날 시위와 4월 3일의 화수리·수촌리 시위가 벌어진 후, 중위 아리타 도시오(有田俊夫)가 발안지역 치안을 맡기 위해 도착한 것은 4월 13일이었다. 다른 지역의 시위 주모자들은 2차에 걸친 검거 작전으로 대부분 체포된 반면, 발안 시위를 주도했던 제암리 주모자들은 체포되지 않았음을 안 아리타는 제암리를 토벌하기로 했다.

일본에 의해 파괴된 제암리 마을(왼쪽), 파괴된 제암리 교회 /제암리 3·1운동순국기념관 홈페이지, 국가보훈처, 독립기념관

1919년 4월 15일 오후 2시경, 아리타가 이끄는 일본 군경이 앞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던 제암리에 도착했다. 그들은 주민들에게 만세 시위 때 자신들이 저지른 폭력에 대해 사과한다며, 15세 이상의 남자들을 제암리 교회로 모이라고 했다. 약 30명의 마을 사람들이 교회당에 모이자, 아리타는 출입문과 창문을 모두 잠그게 하고 집중사격을 명령하고 예배당과 민가에 불을 질러 23인이 잔인하게 희생되었다.

제암리 학살사건으로 가족을 잃은 여성들(왼쪽), 제암리 학살사건 사망자 명단 /독립기념관, 연합뉴스

※ 참고

제암리 사건은 제암리·고주리 사건이라 불러야 합당하다. 향남읍 제암리와 팔탄면 고주리는 비록 면 단위는 달랐지만 경계를 맞대고 이웃해 있는 마을들로서 발안장날 시위를 비롯한 독립만세운동 과정에서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고, 일본군의 학살만행 또한 같은 시간대에 동일한 선상에서 자행되었기 때문이다.

ㅡ 제암리 3·1운동순국기념관

1970년 일본인들의 모금으로 다시 지어진 제암리 교회(왼쪽), 1982년 제암리 학살사건 희생자 유해 발굴_/제암리 3.1순국기념관 홈페이지, 조선 DB

유해 발굴과 기념관 건립… 기억하자는 노력

사건 63년이 지난 1982년 9월 25일, 23구의 시체가 발굴되고 합동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당시 유해 발굴에 참여한 관계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전동례 할머니의 증언에 따라 한 달여간 유해 발굴이 진행되었으나 유해를 찾지 못했고, 마지막에 최응식 할아버지의 증언에 의해 발굴한 곳에서 유해를 찾았다고 한다.) 이후 1983년 이곳에 제암리 3·1운동순국기념관이 들어서며 23인 순국묘지, 23인 상징조각물, 전시관, 시청각 교육실, 제암 교회, 3·1정신교육관, 3·1운동순국기념탑 등이 조성되었다.

제암리 3·1운동순국기념관(왼쪽), 제암리 교회 /제암리3·1운동순국기념관 홈페이지, 조선 DB

기념관은 일제의 만행을 고발하고 우리 민족의 독립에 대한 열망을 기억하자는 의미로 사건이 일어난 제암리 교회 자리에 지어졌다. 이곳은 사진과 증언을 통해 제암리 사건을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으며, 당시 경기지역과 전국의 만세운동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위치: 경기도 화성시 향남읍 제암리 392-2)

일본의 은폐와 왜곡

아직까지 일본 정부의 인정과 공식적인 사과는 없었다. 오히려 일본의 학자들은 "조선에 주둔한 지 얼마 안 되어 현지 상황에 익숙하지 못한 일부 군인이 일본인의 희생에 흥분하여 일으킨 '우발적인' 사건"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제암리 기독교와 천도교 지도자 명단을 미리 파악하고 소집한 점, 제암리가 아닌 고주리의 천도교 지도자까지 파악해 살해한 점 등을 봤을 때, 신빙성이 부족하다.

조직적 은폐 드러난 일본군 사령관 일기(2007년 발견)

당시 조선 주둔 일본군(공식 명칭은 '조선군') 사령부가 사건을 조직적으로 은폐했음을 보여주는 당시 사령관의 일기가 2007년 초에 발견됐다. 일기의 주인은 3·1운동 당시 조선 주둔 일본군 사령관이었던 우쓰노미야 다로(宇都宮太郞) 대장이었다. 발견된 15년분의 일기 등 사료 중에는 독립운동의 진압 실태와 민족운동가에 대한 회유 내용 등이 상세하게 기록돼 있다고, 당시 아사히 신문이 보도했다.

우쓰노미야는 1918년 7월부터 1920년 8월까지 약 2년간 조선주둔 일본군 사령관을 지냈다. 1919년 4월 15일 발생한 제암리 사건에 대해 그의 일기는 일본군이 약 30명을 교회에 가둬 놓고 아기까지 죽이고 방화했지만 일본군이 거짓 발표를 통해 이를 부인했음을 증명한다.

우쓰노미야는 그해 4월 18일자 일기에서 "사실을 사실대로 하고 처분을 하면 가장 간단하겠지만 학살·방화를 자인하는 것이 돼 제국의 입장에 심대한 불이익이 되기 때문에, 간부들과 협의한 끝에 '저항을 했기 때문에' 살육한 것으로 하고, 학살·방화 등은 인정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밤 12시 회의를 끝냈다"고 적었다.

앨버트 테일러

3·1운동을 세상에 알리고, 제암리 학살사건 첫 보도한 언론인

앨버트 테일러(왼쪽), 앨버트 테일러의 손녀 제니퍼 테일러씨가 2016년 2월, 자료 사진을 모은 책자를 들어보이고 있다. /이진한 기자

미국 언론인 앨버트 테일러(1875~1948)는 아들 브루스(1919~2015)가 태어난 1919년 2월 28일 서울의 세브란스 병원에 있었다. 당시 의료진은 3·1운동을 앞두고 일본의 수색을 피해 독립선언문을 외국인 병실 침대 밑에 숨겼는데, 마침 앨버트가 이를 보도해 3·1운동이 세계에 널리 알려졌다고 한다.

이후에도 테일러는 제암리 학살사건을 취재해 처음으로 보도했고, 스코필드, 언더우드와 함께 조선 총독을 항의 방문하는 등 한국의 독립운동에 적극 협조했다. 1941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며 미국과 일본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테일러 일가족은 가택 연금 상태가 되었고, 이듬해 5월 조선총독부의 외국인 추방령에 따라 미국으로 추방됐다. 광복 직후인 1945년에는 한국에 남겨두고 간 재산을 찾기 위해 미군정청 고문 자격으로 한국에 입국하기도 했다. 1948년 6월 29일 미국에서 73세를 일기로 심장마비로 사망했고, 유해는 '한국에 묻히고 싶다'는 그의 유언에 따라 대한민국으로 이송되어 서울외국인묘지공원에 안장되었다.

스코필드 박사

학살의 참상, 세계에 알렸던 선교사

"나는 강하고 굳센 호랑이의 마음으로

한국인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겠다" - 石.虎.弼

한국식 이름 석호필(石虎弼)로도 유명한 스코필드(Frank William Schofield) 박사는 캐나다 토론토대에서 세균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1916년 캐나다 장로회 소속 선교사로 한국에 왔다. (2016년은 그가 한국 땅을 밟은 지 100주년이 되는 해였다.)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에서 세균학을 가르쳤던 그는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일본 학살의 참상을 사진으로 촬영해 세계 곳곳에 폭로했다.

스코필드 박사는 3·1운동 현장에서 카메라를 들고 인근 건물로 올라가 일본군이 만세를 부르는 한국인을 총·칼로 잔인하게 진압하는 장면을 사진으로 남겼고, 일본의 고문과 3·1운동에 대한 보복행위를 고발하는 '제암리의 대학살 보고서(The Massacre of Chai-Amm-Ni)' '수촌 만행 보고서(Report of the Su-chon Atrocities)' 등을 썼다. 아직까지 남아있는 3·1운동 초기의 몇 안 되는 사진들은 그가 찍은 사진이 대부분이다. 스코필드 박사는 이 사진들을 비밀리에 해외에 보내 언론에 투고했고, 독립을 향한 한국인들의 열망과 일본의 잔혹한 진압이 전 세계에 알려지게 했다.

또, 그는 제암리 학살사건을 듣고 제암리 현장 답사 후, 캐나다 선교본부에 일본의 만행을 기록한 '꺼지지 않는 불꽃(The Unquenchable Fire)'이라는 298쪽의 보고서를 제출했다. (이 보고서는 2부를 작성해 한부는 캐나다로 강제 출국됐을 때 가져갔고, 다른 한 부는 훗날을 위해 세브란스 지하실 바닥에 숨겼다. 일부(제15장)를 구입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 보고서는 독립선언서, 독립탄원서, 3·1운동 때의 시위 행렬 광경, 감옥 경험담, 일본 경찰에 고문당한 한국인들을 치료한 이야기 등을 담고 있다.) 그는 한국의 독립을 위한 활동을 계속 해나갔다.

이후, 일본의 살해 위협을 받고 1920년 한국을 떠난 스코필드 박사는 1958년 국빈 자격으로 한국에 돌아와 서울대 수의과대학 교수로 재직했다. 1968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을 받은 그는 내가 죽거든 한국땅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1970년 4월 12일 한국 땅에서 영면, 외국인 최초로 국립 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스코필드 박사 동상 /연합뉴스

학살 피해자 아들이 제작한 영화 '두렁바위'

영화 '두렁바위' 스틸컷

제암리 학살사건을 다룬 영화 '두렁바위'는 제암리 사건으로 숨진 독립운동가 안종후 씨의 아들 고(故) 동순(1912년생)씨가 1971년부터 2년에 걸쳐 제작했다. 제작 37년 만인 2009년에 공개된 이 영화는 사실과 허구가 복합된 세미 다큐멘터리 형식이다. 1919년 3·1운동을 전후해 화성 제암리의 종교인들과 젊은이들이 벌인 독립운동, 이어지는 일제의 보복, 23인을 교회에 가두고 학살하는 제암리 사건을 1시간여 동안 그리고 있다.

기념관에서 열리는 '끝나지 않은 역사' 展

제암리 3·1운동순국기념관은 2017년 4월 15일부터 2018년 2월 28일까지 제2전시실에서 '한·불·중 학살, 끝나지 않은 역사'라는 제목으로 전시회를 열어 당시 제암리·고주리 학살사건 관련 사진과 그림, 서적 등을 소개한다.

전시회에서는 제암·고주리 순국열사 29명 가운데 안종락 선생의 사진 원본과 순국열사의 후손인 故 안용웅 전 유족회장이 일본 정부의 사과를 받기 위해 일본에서 재판을 추진하며 작성한 편지도 볼 수 있다. 편지에는 제암·고주리 학살사건 당시 일본군의 안내자였던 사사카와 아들이 재판 청구를 위해 일본을 방문한 고 안용웅 회장에게 돈 봉투를 전달했다 거절당한 내용 등이 담겨 있다.


■ 참고

제암리 3·1운동순국기념관

한국관광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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